186화
행성 A-607. ‘소니아’라는 원래 이름보다는 ‘정령계’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이 행성에는 정령들이 거주한다. 그런 행성을 지배하는 것은 정령들을 다스리는 정령왕들.
원소 그 자체라 말할 수 있는 정령왕들은 올림푸스의 신들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정령왕이라고 모두 동일한 힘을 가진 건 아니고, 개체마다 차이는 존재한다.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는 역대 불의 정령왕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정령왕으로 손꼽힌다. 진노(眞怒)한 그가 행성 하나를 통째로 파괴했던 일은 우주에서도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런 이프리트는 지금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 진심으로 너를 죽여 보라고?
다름 아닌, 자신을 죽여 보라는, 다소 도발적인 의미가 함축된 부탁이었다.
“예.”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그는 불쾌한 표정으로, 대답한 인간 남자를 바라본다. 절벽에 걸터앉은 채, 다리를 꼬고 오만하게 그를 마주 보는 인간 남자.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그의 계약자- 이진서였다.
그와의 첫 만남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 그는 이진서를 꽤나 마음에 들어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이유는 역시나 이진서의 능력에 기인한다.
소환된 분신은 본체만큼 강하지 않다. 분신의 힘은 계약자의 능력(마력)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그보다 약한 하찮은 미물들에게 죽어 나가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진서에게 소환된다면 그럴 일은 없었다. 그의 마력은 인간, 아니, 전 우주를 통틀어도 최상위권에 속했으니까.
그에게 소환된 그는 정령계에서의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힘의 제약에서 꽤 많이 벗어날 수 있었다. 심지어 반년 전엔 잠시 본체를 불러냈던 적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힘의 제약을 상당히 많이 받았지만.
‘이런 놈을 다시 찾기는 힘들지.’
진심으로 자신을 죽여 보라는 도 넘은 부탁에도 그가 이진서를 단숨에 죽이지 않는 이유였다. 생각을 마친 그가 입을 열었다.
- 지금이라도 그 말을 번복한다면, 네놈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하지.
다른 정령왕들이 들었다면 틀림없이 놀랐을 한 마디였다.
불 같은 성정을 가진 그는 ‘인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으니 말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 정도로 그가 이진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이 건방진 계약자는 그 호의조차 걷어차 버렸다.
“왜, 겁납니까?”
이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는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 겁이 나? 내가? 하, 선을 넘는구나. 그게 네놈의 유언이라면, 들어주마.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몸집이 점점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절벽을 빼곡하게 채울 정도로 거대해진 그가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 그의 몸집에 걸맞은 검이 생성된다.
‘태고의 불.’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최초의 불. 지금 생성된 검은 그 태고의 불을 벼려내 만들어낸 것이다. 그의 검이 하늘 높이 들렸다가, 지상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정통으로 맞는다면, 아무리 이진서라 한들 소멸돼 버릴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그가 검을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단순히 그뿐만이 아니라 그의 거대한 몸이 앞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진서는 이프리트가 떨어트린 ‘태고의 불’을 손으로 들었다. 그 모습에 그는 또다시 당황했다. 태고의 불을 맨손으로 쥘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으니까.
“실망이네요, 그게 끝입니까?”
- 감히…
일말의 당황함은 분노로 전환된다. 잘려 나간 그의 몸이 원상태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번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땅이 메마르기 시작한다. 갈라지는 것을 넘어 통째로 타오른다.
지금 그는 정령계를 ‘소환’하는 것이다. 그는 손을 뻗는다. 정령계와 함께 소환된 불의 정령들이 이진서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한둘이 아니고, 수천, 수만에 이른다.
게다가 실시간으로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 오만한 네 놈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거대한 불사조 수십여 마리가 그에게 달려든다. 피닉스. 개체 하나하나가 일국의 군사와 맞먹는다는 엄청난 힘을 가진 최상급 정령.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닿지 못한다.
“떨어져라.”
이진서의 중얼거림과 함께, 하늘을 비행하던 그들의 몸이 지상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마치 무언가에 짓눌린 듯 일어나지 못했다. 이프리트는 또다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짓은 같은 정령왕이나 가능할 터.’
-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는 이내 부정했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고작 인간 따위가 자신과 동급이라고, 비록 한순간이지만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걸. 그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일대의 화염이 그에게 몰려들기 시작한다. 몰려든 화염은 그의 몸 안에서 압축된다.
- 소각.
과거, 행성을 폭발시킬 때 그가 사용했던 기술. 그 원리는 막대한 화염을 그의 몸 안에 충전했다가 한순간에 방출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때’의 위력과는 차이가 있다.
이진서의 능력이 상승하며 힘의 제약이 많이 풀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본체와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자그만 행성을 초토화시킬 자신은 있었다.
화염을 모두 충전할 때까지, 이진서는 멀뚱멀뚱 보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것이 오만함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인지 아직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중요하지 않았다. 오만함 때문이라면 그 대가를 치를 것이고, 다른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의 화염 앞에서는 의미를 상실할 테니 말이다. 마침내 압축된 화염이 방출된다.
그와 동시에, 이진서 역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막으려면 진즉 움직였어야지.
- 늦었다. 오만의 대가를 치러라.
방출된 화염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그들이 있던 절벽은 물론, 그를 향해 달려오던 이진서 역시 화염에 뒤덮인다. 그러나 그의 화염은 멈추지 않고 계속 퍼져나갔다.
이 행성의 모든 것을 불태울 때까지, 화염은 ‘절대로’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진서가 죽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 아쉽게 됐군.
그러나 그는 이내 아쉬움을 털어버렸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시간이 흐른다면 대체할 만한 계약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라우라,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인간 여자.
그녀라면 앞으로 수십 년 이내에는, 그를 대체할 수 있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던 그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녀석이 죽었다면,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있을 리가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계약자인 이진서가 죽었다면, 그의 마력으로 소환된 그 역시 사라졌어야 옳다.
그 말은 즉, 이진서가 살아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러나 이진서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때, 공간이 일그러졌다. 공간에서 튀어나온 검이 그를 꿰뚫었다.
그는 그제야, 이진서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눈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그의 몸에 새겨진 검은 문신 역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진서가 들고 있는 검은 단순히 그를 꿰뚫는 것에 그치지 않고, 휘둘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베이고, 베인다.
이프리트는 몇 번이고 저항했지만, 저항은 무의미했다.
- 감히…!
분노를 터뜨렸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팔을 재생하면 팔이 잘리고, 다리를 재생하면 다리가 잘린다. 이미 두 눈은 그의 검에 꿰뚫린 지 오래였다.
그는 일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이게 정녕 인간의 힘이란 말인가.’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인간치고 강하긴 하지만 하찮은 미물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가 일순간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성장했다.
이 상태로 일 년, 이 년이 흐른다면? 언젠가는 그를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아니, 뛰어넘을 것이다. 그것은 미래 예지에 가까운 확신이었다.
‘아니, 인정할 수 없다.’
두려움은 곧 분노로 치환되고, 다시 그의 힘으로 치환된다. 그의 몸이 하얀색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재생하던 그의 몸을 계속해서 베어내던 이진서는 뒤로 물러났다.
그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이프리트가 뭘 하려는 건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정령왕의 직위를 유지하며 쌓아 올린 신성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잘려 나간 그의 몸이 순식간에 재생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의 몸이 점차 ‘원래의 형상’을 되찾기 시작했다. 반인반조. 일순간, 그의 본체가 소환된 것이다.
그러나 지난번에 소환됐을 때와는 달랐다. 지금의 그는 갑옷을 걸치고 있었고, 거대한 검을 착용하고 있었다. 완전한 현계라 부를 순 없지만, 4할 이상은 불러냈다고 해도 무방했다.
말이 4할이지, 한 행성을 지배했던 ‘신’의 힘의 4할이다.
- 살아남을 수 있다면, 살아남아 봐라.
이진서 역시, 이번만큼은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본능으로 느낀 것이다. 이번 공격은 지금의 그에게도 ‘충분히’ 위협적일 거라는 것을. 그는 중얼거렸다.
“마인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마인의 그것처럼 뿔이 자라나고, 등에서는 검은 날개가 펼쳐진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시간 가속.”
그의 세상이 느려지기 시작한다.
“영령 빙의.”
그의 몸 역시, 이프리트와 마찬가지로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프리트가 붉은 날개를 펼친다. 이진서 역시 검은 날개를 펼쳤다. 마침내, 이프리트와 이진서의 몸이 격돌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사방으로 퍼지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시간이 멈췄기 때문이다. 이프리트와 이진서는 서로 마주 보며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소행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다음 순간, 허공에 떠오르는 메시지.
[이 이상의 무의미한 전투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전투를 중지하십시오.]
플레이어 시스템이 그들을 제지한 것이다.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자, 이진서는 순순히 검을 내려놨다. 이프리트 역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마찬가지로 검을 내려놨다.
그 역시 컴퍼니에 매인 몸이라 컴퍼니의 제지를 무시하는 것을 원하진 않았고, 무엇보다도 이진서가 전투 의지가 없는데 더 전투를 벌이기도 뭐했기 때문이다.
- 흥이 깨졌군. 다음에 날 불러내면, 그때는 진짜 죽여주마.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보십시오.”
이진서도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
발라르는 저항했지만, 결국 정신이 지배된 채 백신을 만드는 데 협조했다. 그렇게 완성된 백신은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는 좀비들에게 뿌려졌다.
백신은 시간 회귀의 물약처럼 절대적인 효과를 가지진 않았지만, 상당수의 좀비들이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아직, 완료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명백했다.
“큭큭, 저를 죽일 겁니까? 저를 죽인다면…”
“지겹다, 지겨워.”
나는 가볍게 엘론을 휘둘러 그의 목을 날려버렸다. 그걸로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