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뻗어진 홍현기의 손톱을 피해낸 나는 그를 향해 딱밤을 날렸다. 하지만 그는 딱밤이 닿기 전에 몸을 뒤로 날렸다. 일반적으로 그가 내 공격을 피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아무리 힘 조절을 했다곤 하나, 속도까지 조절을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 이유를 이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습득한 전설 등급 스킬 미래시(未來視)의 효과다.
사용할 시, 1분 동안 1초 뒤의 미래를 보여주는 스킬. 즉, 지금 홍현기는 1초 후 내게 딱밤을 맞는 미래를 보고 공격을 미리 피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몸이 하얀색으로 물든다. 이내, 그의 등에 거대한 날개가 펼쳐졌다. 내가 가진 초월 등급 스킬, 마인화의 반대되는 스킬이라 할 수 있는 ‘천사화’였다.
물론 마인화와 달리 천사화는 전설 등급 스킬이다. 지속 시간도 5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5분에 한해서는, 마인화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자랑하는 ‘사기 스킬’이었다.
‘천사 좀비라니, 이건 좀···’
아름다운 날개를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을 뚝뚝 흘리는 그의 하관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이 폭발적으로 나를 향해 뻗어졌다.
0.1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 그의 주먹은 정확히 내 가슴에 명중했다. 마치 비행하듯 내 몸이 뒤로 밀려난다. 뒤에 있던 건물들이 나를 지탱하지 못하고 우르르 무너졌다.
벽에 부딪힌 내게 잔해가 우수수 떨어진다. 나는 마력을 방출해, 잔해를 날려버리며 쓰게 웃었다.
‘강하네.’
지난 반년 동안 강해진 건 나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나보다 몇몇 플레이어들의 성장세가 더욱더 돋보였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성장 한계에 거의 도달한 나와 달리, 그들은 아직 성장할 여지가 더 많이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런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홍현기는 특출하게 성장한 케이스였다.
‘뭐, 단점은 명확하지만 말이야.’
나는 때때로 그의 전투 코치를 해주기도 했었다.
그런 만큼, 나는 그의 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천사화를 사용한 그는 어지간한 간부들을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게 전부다.
천사화가 끝난 상태의 그는 부작용으로 진혜연보다도 약해진다. 한마디로 지금 내가 5분을 버티면 그를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소리다. 물론···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괜히 5분 안에 발라르가 도망가 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5분을 지체하기에는, 1분 1초도 아까운 시점이었다. 그렇다면··· 제압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머리를 살짝 옆으로 틀어 홍현기의 주먹을 피해냈다.
“시간 가속.”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위의 시간이 느려진다. 홍현기의 몸놀림 역시 느릿느릿해졌다. 물론 실제로 느려진 것이 아니라 내 체감 시간이 달라지며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나는 손을 들었다. 그가 몸을 숙인다. 아마 또다시 미래를 예측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별 의미는 없었다. 손가락을 접고, 주먹을 강하게 쥔 후 휘둘렀다.
그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아마 미래를 본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엔 대처하지 못했다. 쾅! 엄청난 폭음과 함께 그의 몸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힘 조절을 너무 못했나?’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를 바라보며 나는 혀를 찼다. 좀비일 때 기억을 기억하는 건 아니겠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난 그의 입에 시간 회귀의 물약을 흘려 넣었다.
그의 몸이 빠르게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곧, 그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힘없는 목소리인 걸 보니, 체력이 없는 듯 보였다.
“혀, 형?”
“설명은 나중에 할게. 일단 피해 있어라.”
“네, 형.”
그는 당황한 낯빛 그대로,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외부로 시선을 돌린다. 그 사이, 그룹원들은 좀비를 제압했다. 좀비에게 물린 그룹원들도 몇 보였지만, 시간 회귀의 물약을 미리 챙겨뒀으니 알아서 복용하면 될 것이다.
‘어디 있냐?’
통찰안을 사용한 나는 이 모든 일을 벌인 주모자를 찾기 시작했다. 마력을 싣자, 내 인지의 영역이 확대된다. 낙원 전체에서, 낙원 외부 수십··· 수백 킬로미터까지.
마침내 나는 그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낙원 바깥의 우주 기지에서 그는 여자와 함께 우주선에 탑승해 있었다. 아마 우주로 도피할 생각인 듯 보였다. 우주선이 점화된다. 물리적으로 이동하기엔 늦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요격’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난 지금 당장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텔레포트.”
내 몸이 흐릿해진다. 눈을 떴을 때, 난 우주선 안에 있었다. 발라르와 그의 옆에 있는 금발 여자가 얼빠진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이내, 발라르의 얼굴에 미소가 깃들었다.
“아아, 오셨군요.”
라그나로크에서 봤던 그의 모습이 무겁고 진중했다면, 이 세계의 그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좋게 말하면 쾌활하고 나쁘게 말하면 경박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잊지 않았다. 그의 미래는 지구를 코인 채굴기로 만든 신이고 지금의 그는 바이러스를 무차별적으로 뿌려 그룹원들은 물론 낙원인들까지 전염시킨 사이코라는 걸 말이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한 말투인데.”
나는 일단은 그의 말을 받았다. 일단은 그의 장단에 적당히 맞추며, 그에 관한 정보를 캐낼 생각이었다.
“예, 기다렸습니다.”
내심 그의 말이 거짓일 거라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통찰안으로 판별한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나는 이 세계에서 그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데 그는 어째서 나를 기다렸다는 것일까?
의아해진 나는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 나를 기다린 거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부탁?”
하지만 그에게 대답이 들려오는 대신, 옆에 있는 여자가 불안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발라르?”
나는 통찰안을 사용해 그녀의 정보를 확인했다. 티나라는 이름의 여자. 아름답긴 하지만, 그뿐이다. 그녀는 평범한 테라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말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이 남자는 대체 누구야?”
발라르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티나, 드디어 기회가 온 거야.”
“무슨 기회?”
“놈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기회.”
“누구에게? 어스인들에게?”
저 여자는 아직 내가 어스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녀의 말을 부정한 그는 혀로 입을 축이며 말했다.
“우리의 행성을 멸망시킨 것도 모자라서, 거짓된 세계에 가둬버린 ‘존재’ 말이야.”
“······”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 동화 세계 안의 존재들은 기록된 과거의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자신들이 과거의 존재인데다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세계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으니 ‘컴퍼니’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조치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 상식을 깨버린 것이다. 잠시 침묵하자, 그가 히죽 웃으며 물어왔다.
“놀라셨습니까?”
“어떻게 알았지?”
“신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아니, 정정하죠. 미래의 ‘저’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헤븐 콜이라도 사용한 건가?’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헤븐 콜(Heaven Call)의 원리는 컴퍼니의 데이터를 빌리는 것이다. 플레이어라면 헤븐 콜을 통해 연락이 가능하지만 이 세계의 발라르는 플레이어가 아니다.
즉, 내가 모르는 모종의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뭐, 미래의 발라르는 신들을 상대하고도 일방적으로 살해할 정도의 ‘괴물’이니까 그런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한들 이상할 것은 없지만 말이다.
나는 열망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잘 알겠군? 내가 너와 악연이 아주 많다는 걸 말이야.”
“아, 그건 몰랐는데···”
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가, 다시 본래의 생글생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계시를 받았다고 한들, 모든 걸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는 정보는 지극히 단편적인 것들뿐이니까요.”
잠시 말을 쉰 그가 입을 열었다.
“‘컴퍼니’라는 존재가 이 행성에 운석을 떨어트렸다는 것. 그리고 미래의 저는 복수를 위해 그 컴퍼니를 제거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
“···뭐라고?”
발라르는 ‘컴퍼니’와의 직접 계약자다. 때문에 나는 그와 컴퍼니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발라르가 컴퍼니를 제거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찰안으로 그의 마음을 들여다봤지만, 사실이었다.
“그래, 그런데 내게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게 뭐지?”
“저를 도와주십시오, 아니, 정정하겠습니다. 미래의 저를 도와주십시오.”
문득 궁금해져 그에게 물었다.
“지금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미래의 네가 시킨 일인가?”
말해놓고서도 바보 같은 질문을 했노라고 생각했다. 발라르가 내 도움 따위 필요할 리 없다. 오히려 이쪽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적대했으면 적대했겠지.
“아닙니다, 제 부탁입니다.”
역시나 그는 부정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말하지.”
잔뜩 기대감을 가진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미쳤냐?”
발라르와 컴퍼니. 둘 중에 어느 쪽의 편을 들어야 한다면,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는 너무나 명확한 사실이었다.
먼저 발라르. 그는 내게 원수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우리 지구에 변이체 바이러스가 퍼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반면 컴퍼니는 내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금껏 나를 도왔다. 만약 플레이어 시스템이 나를 돕지 않았다면 나는 진즉 죽었을 것이다.
‘아니, 그냥 편을 들을 것도 없이.’
비록 발라르가 신을 죽이긴 했지만 컴퍼니는 신들조차 고객으로 삼고, 때로는 노예로 부리는 곳이다.
컴퍼니의 역량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몰라도, 발라르가 컴퍼니를 이길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컴퍼니에서 발라르를 죽여주면, 깔끔할 텐데 말이야.’
“미래의 저와 어떤 악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을 한번 내려다 보십쇼. 전부 컴퍼니 놈들이 저지른 소행입니다. 당신들의 세상도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 정말 컴퍼니의 소행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우리 세상을 그렇게 만든 게 미래의 너다.”
“예?”
그가 바보 같이 물어왔다.
“한마디로 번지수 잘못 찾았다고.”
말을 마친 나는 그를 향해 가볍게 주먹을 휘둘렀다. 퍽! 그의 몸이 우주선을 뚫고 바깥으로 나가떨어진다. 티나가 기겁하면서 그에게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