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이 문은 천국의 문, 헤븐즈 게이트랍니다.”
강순철의 말에 우리의 앞에 있는 문을 바라본다. 날개를 펼친 천사가 악마에게 활시위를 겨누고 있는 형상이 조각된 거대한 문. 솔직히 문이라기보단 ‘예술 작품’에 가까운 디자인이다.
이내, 통찰안을 사용해 자세한 정보를 확인한 나는 이 문의 특징이 단순히 디자인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천국의 문>
내구 : 750,000/750,000
설명 :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계된 문.
기능 : 오토 리페어 Lv.40, 오토 쉴드 Lv.40, 매직 쉴드 Lv.40, 충격 완화 Lv.40
1급 안전 가옥 이상의 내구와 40레벨의 기능들. 적혀있는 대로라면 어지간한 충격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을 것이다.
“무너트리면 낙원인들이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을 겁니다. 리더라면… 하실 수 있겠죠?”
그렇게 말하는 강순철의 눈동자엔 열망이 깃들어 있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저 문이 낙원인들에게 중요하긴 한 모양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강순철의 얼굴이 환해진다. 나는 품안의 검을 뽑는다. 엘론. 거인왕이 썼던 검은 내 마력에 감응해 푸른색으로 빛나다 못해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 번에 베어내긴 힘들겠지만.’
그가 기대하는 것은 내가 저 문을 종잇장처럼 단번에 베어내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나라 하더라도, 무려 내구가 75만에 달하는 문을 단번에 박살 내는 것은 힘들었다.
뭐,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체력과 마력의 90%를 소모해, 엄청난 데미지를 주는 극한의 발도술이라면 저 문이라 하더라도 단번에 베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양날의 검이지만, ‘미미르의 샘물’도 있으니 그리 부담 가는 건 아니었다. 생각을 마친 나는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날아간 검기는 단숨에 문을 베어낸다.
문은 겉보기엔 멀쩡했다.
나는 속으로 시간을 셌다.
‘1초, 2초…’
정확히 3초를 셌을 때, 문에 실선이 생기더니, 실선에서 마치 피 분수를 뿜어내듯, 강렬한 마력의 파도가 일었다. 거대한 문은 깔끔하게 잘려 나가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쾅!
순간적으로 엄청난 강풍이 일었다. 마침내 드러난 낙원의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쓰러진 문을 밟았다. 터벅, 터벅. 그런 내 뒤를 그룹원들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개선장군처럼 입성한 내게 총을 겨누고 있는 수십 명의 군인들, 고층 빌딩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수많은 시민들…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Hello.”
***
낙원의 외벽을 보호하는 14,000기의 플라즈마 대포들이 일제히 발사되는 소리는 휴일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낙원의 시민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 정도의 엄청난 굉음이었다.
천둥이라도 친 건가 바깥을 확인한 그들은 낙원의 상공을 시위하듯 저공비행하고 있는 전함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군사 훈련이라도 하나?”
그들은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한편, 낙원의 수뇌부들은 난리가 났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보고 받으신 대로입니다. 낙원의 외성이 점령당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 말인가?”
“어스인들입니다.”
“어스인들이 갑자기 왜?”
말해놓고서도 그는 자신이 어이없는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적대 관계인 어스인들이 낙원을 공격한 건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왜?’보다는 ‘어떻게?’라는 말이 지금의 상황에는 더 어울리리라.
“어스인들은 대부분 전력을 상실했던 것 아니었나?”
어스인들이 종종 테러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 낙원 내부까지 들어와 공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벨메일은 그것이 어스인들의 전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비단 그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수뇌부들 역시 회의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런데 대체 지금의 상황은 뭐란 말인가? 낙원의 지도자, 벨메일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아니…”
벨메일은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쿵, 지면을 울리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는 바라봤다.
“천국의 문이…”
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천국의 문이 앞으로 넘어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천국의 문이 앞으로 넘어졌다는 건 이제 어스인들이 내성까지 침입할 수 있다는 의미나 다름이 없었다.
“고작 10분 만에…”
하늘에 전함이 나타나고, 그가 보고를 받은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다. 그는 작금의 상황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차라리 꿈이라고 믿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가면 갈수록 최악이었다. 이번엔 시내가 시끄러워졌다.
“벨메일님! 감염자들이 풀려났습니다.”
낙원 내부엔 감염자들이 있었다. 연구 목적을 위해 잡아놓은 감염자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받은 보고는 그 감염자들이 풀려났다는 것이었다.
“어스인들의 소행인가? 비겁한 놈들…”
벨메일은 치를 떨었다.
“모르겠습니다. 감염자들이 닥치는 대로 시민들을 습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할까요?”
“일단 시민들부터 대피시키게.”
“어디로 말입니까? 대피할 곳이 없습니다. 일단 벨메일님부터라도 대피하셔야 합니다.”
벨메일은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아무리 시민들을 소중하게 생각해온 그였지만, 그의 목숨보다 우선순위가 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우선순위인 게 하나 있었다.
“티나, 티나는 어디 있지?”
그의 딸, 티나.
“모르겠습니다. 행적이 묘연합니다.”
“찾아, 당장 찾아! 찾아서 옥상으로 데려오게.”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옥상으로 향했다. 그가 머무는 건물의 옥상에는 군용 수송기가 있다. 군용 수송기라면 충분히 이 도시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스인들에 의해 옥상이 점거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는 깔끔하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꽤 높은 사람처럼 보이는데요? 묶어요.”
“예, 리더, 아니 부리더.”
“그냥 한승주라 부르라니까. 거참… 무슨 브리더도 아니고.”
한승주의 말에 그룹원들이 벨메일에게 다가가 쇠사슬로 꽁꽁 묶었다. 그의 호위들은 대부분 죽거나, 아니면 그와 같이 꽁꽁 묶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묶인 채 강제로 무릎 꿇려진 그는 옥상을 통해 내성을 내다볼 수 있었다. 사방에서 화염이 일고, 시민들은 정신없이 대피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 감염자들.
‘이건 지옥이다.’
“이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
한승주는 씁쓸하게 웃었다. 지옥 같은 장면이라고는 그녀 역시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풍경을 바라보며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동정이나 연민 같은 것이 아닌, 복수의 달콤함이었다.
‘내가 사이코가 됐나?’
잠시 의문을 떠올린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동안 받은 걸 생각하면 당연하지.’
그때였다. 그녀는 난데없이 떠오른 풍선들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웬 풍선?”
그 순간, 풍선들이 일제히 터진다. 퍽! 퍽! 그리고 그 안에서 터져 나오는 검은색의 연기. 자욱하게 깔린 연기는 순식간에 낙원 전체를 뒤덮는다. 그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미친놈들, 또다시 이런 짓을…”
그녀는 그 연기의 정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미 한번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러스’가 담긴 생화학 무기. 저 연기에 닿는 이들은 모조리 감염자가 되고 만다.
“다들 안으로 들어가요!”
하지만 늦었다. 연기는 이미 그들의 몸을 휩쓸었다. 그룹원들이 몸을 벌벌 떨었다. 그때였다. 한승주는 하늘을 바라봤다. 거대한 시계태엽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저게 무슨…”
그와 동시에, 시간이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눈으로 보면서도, 직접 겪으면서도 도저히 믿지 못할 기적 같은 장면.
“이제 리더는… 시간마저 되돌리실 수 있는 겁니까?”
“아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레비아탄과의 전투를 직접 보지 못했던 그녀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그때와는 경우가 다르다. 그때는 단순히 수송선을 수복하는 데 그쳤다면, 지금은 무려 도시 전체의 시간을 되돌렸으니 말이다.
설마 이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는… 그녀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녀는 그룹원들에게 말했다.
“혹시 또 생화학 무기를 사용할지도 모르니까 빨리 방호복 착용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룹원들이 방호복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
변수는 존재했다. 나조차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설마 도시에 바이러스를 그대로 뿌릴 거라곤 말이다. 바이러스가 퍼졌다면 대혼란이 빚어졌으리라. 도시엔 그룹원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크로노스의 시계를 사용해, 도시 전체의 시간을 되돌려버렸다.
그 덕에 많은 기프트를 소모했지만, 전혀 아깝진 않았다. 괜히 어설프게 수습하겠다고 하다간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게 된다는 걸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라르인가.”
난 이 정신 나간 소행을 저지른 이가 발라르일 거라고 내심 확신하면서 블링크를 사용했다. 좀비들이 낙원인들을 쫓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살려주고 싶은 생각조차 없었다.
하지만 좀비들이 우리 그룹원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디 갔나 했었는데, 이 씨발놈들이?’
내가 이렇게 분노하는 이유는 저 좀비들의 정체가 우리 그룹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 중엔 홍현기도 보였다.
“현기야, 미안하다.”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스스로 실험체를 자처했던 홍현기. 하지만 나는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가 있던 건물은 물론, 도시 전체를 뒤져봐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그가 죽은 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가 좀비 무리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사족 보행으로 나를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그 속도는 보통 빠른 게 아니다.
서문주의 실험 결과에 의하면, 저 바이러스에 감염돼 좀비가 되면 생전보다 신체 능력이 월등히 상승한다고 했었다. 즉 플레이어 좀비는 플레이어보다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홍현기는 그룹 내에서도 꽤 상위권에 드는 플레이어고.
‘아니, 단순히 그뿐만이 아니지.’
좀비의 손이 붉게 빛난다. 붉은 달의 가호. 홍현기가 가진 스킬이다. 좀비임에도 불구하고,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손이 나를 향해 뻗어진다.
그리고 나는 그의 손에 가슴을 꿰뚫…리는 일 따위는 당연히 벌어지지 않았다. 홍현기와 나의 차이는 생각보다 꽤 크다. 그건 좀비가 됐다고 해도 따라잡을 수 있는 차이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