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내가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변수가 있지 않은 이상, 내가 이 세계의 발라르에게 패배할 확률은 그야말로 0에 수렴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물며 다른 낙원인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준비해놓겠습니다.”
“저 혼자 가도 됩니다. 힘드실 텐데 쉬셔도…”
하지만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낙원 놈들 때문에 고통받은 지 거의 반년이 다 돼갑니다. 복수는… 직접 제 두 눈으로 보고, 하고 싶습니다. 아마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그를 이해했다. 반년 동안 이 세계에서 ‘저항군’까지 꾸려가며 버텨온 그들이다. 고작 며칠 머무는데 그쳤던 나와는 느끼는 감정의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지원자들을 모집하세요.”
내 허락에 그는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곧 올 때가 됐는데 말이야.”
황승준의 중얼거림에, 그의 부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벌써 보름째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곧 올 때가 됐다’는 것은 어스인 저항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5개월 전, 낙원은 어스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사실 전쟁이라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긴 했다. 일방적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기습을 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과정이야 어쨌건, 어스인들은 궤멸했고, 그들 중 태반은 좀비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것이 완벽한 승리라 말할 순 없었다.
소수의 어스인들이 빠져나가, ‘저항군’을 창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후, 저항군의 테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정찰용 드론과, 외부에 있는 시설들은 모조리 파괴됐다.
낙원에서는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군대를 내보냈지만, 그들의 무력은 상상 이상이라 오히려 궤멸하고 말았다.
결국 또다시 생화학 무기를 사용했지만 이번엔 어스인들도 대비를 한 탓에 효과가 없었다. 이제 와서는 사실상 방관하는 것 말고는 처치조차 곤란한 골칫거리였다.
물론 낙원 방위 사령관으로서, 그는 저 극악무도한 테러범들을 언제 날을 잡아 모조리 플라즈마 대포로 날려버릴 거라며 씩씩거리곤 했었다.
“정보부 쪽에서는 별말 없었지?”
“녀석들의 근거지를 찾는 데 실패했답니다.”
“뭐, 워낙 잘 숨어다니는 쥐새끼들이니 당연하겠지. 얼른 빨리 잡아서 그놈들을 소탕해야 할 텐데 말이야.”
“과학자들이 녀석들을 찾는 탐지기를 곧 개발한다고 하니, 아마 할 수 있을 겁니다.”
황승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다. 곧,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함선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저, 저게 뭐야?”
“……”
물론 그렇게 묻는다 한들, 부관이 대답할 말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 역시 지금 낙원의 외곽 상공에 떠 있는 정체불명의 함선에 대해 알고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황승준은 무전기를 들었다.
“지금, 낙원의 북서쪽 상공에 미확인 비행체가 출현했다. 플라즈마 대포를 사용하겠다.”
- 확인했습니다.
들려오는 무전을 확인한 그는 입을 열었다.
“모조리 조준해.”
낙원의 외벽에 달린 플라즈마 대포들은 완벽한 AI 체계를 갖추지는 못했다. 따라서 그의 명령에 응답한 대포는 절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숫자는 무려 칠천 기에 달했다.
그 위력이 핵폭탄에 맞먹는다 할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가진 플라즈마 대포가 한 기도 아니고 칠천 기. 일제히 발사한다면 어지간한 중소 도시 정도는 먼지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다.
아무리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함선이 거대하다 한들, 플라즈마 대포에 맞는다면 마찬가지의 신세가 되고 말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마침내 플라즈마 충전이 시작됐다.
대포의 총구에 플라즈마 구체가 맺히기 시작한다. 곧, 쾅! 강렬한 폭음과 함께 칠천 기의 플라즈마 대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고막을 찢을 정도의 엄청난 굉음.
눈을 멀게 만들 만큼의 엄청난 폭발이 뒤를 이었다. 부관은 눈을 감았고, 이 장면을 우연히 지켜본 다른 이들 역시 눈을 감았다. 황승준은 선글라스를 착용한 탓에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경악하고 말았다.
“마, 말도 안 돼.”
거대한 전함은 아무렇지 않게, 플라즈마 광선들을 받아내고 있었다. 허무하게도, 작은 흠집조차 생기지 않았다.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는 이해해보려 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비상식. 그는 불현듯 어스인들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를 떠올렸다. 그래,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들은 비상식적인 존재다.
지난 반년간, 그들을 파악했다 생각했지만 아직까지 파악하지 못한 게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한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녀석들을 죽이지 못하면 우리가 죽는다.’
그의 얼굴이 절박해졌다. 저러한 기술력을 가진 함선에 공격 무기가 하나도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공격 무기란 건 자신들은 물론, 어쩌면 낙원 전체를 궤멸시킬 만큼 강력한 무기일 것이 틀림없었다.
“이 돼지 새끼들아, 쳐다만 보고 있지 말고 빨리빨리 움직여라.”
그는 무전기에 대고 정신없이 소리쳤다. 수동으로 움직이는 나머지 플라즈마 대포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위군들이 탑승한 것이다. 그 모습을 확인한 그는 명령을 내렸다.
“반드시 저 함선을 떨어트릴 때까지… 정신없이 발사해라!”
플라즈마 대포들이 또다시 함선을 겨냥한다. 그때였다.
- 사령관님, 마스커스 중위입니다. 그, 그!
마스커스. UK의 굵직한 전쟁이란 전쟁은 모두 참석했던 베테랑으로, 그가 가장 신뢰하는 부관들 중 하나였다.
“그, 뭐?”
- 대포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입니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는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원 껐다 다시 켜면 되잖아?”
- 전원을 껐는데도 자기 마음대로 움직입니다! 어, 어!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플라즈마 대포에 자아(自我)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마음대로 움직인단 말인가?
“왜?”
쾅! 치지지직. 귀를 찢는 강렬한 폭발음과 그 이후엔 통신 두절.
“마스커스 중위, 마스커스 중위!”
하지만 마스커스 중위에게 대답이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그저 헤프닝일 것이다. 그는 억지로 자기 위안을 했다. 그러나 곧, 그는 깨달았다. 단순한 헤프닝이 아니라는 것을.
플라즈마 대포들이 겨눠진다. 하늘이 아닌, 지상을 향해서, 타 있는 탑승자들을 향해서, 혹은 낙원의 외벽을 향해서.
“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
그는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곧 이것이 그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허겁지겁 외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사, 사령관님?”
옆에 있던 부관이 멍청하게 그 모습을 바라본다. 그와 동시에, 일제히 플라즈마 대포들이 불을 뿜었다. 쾅! 쾅! 플라즈마 대포는 그 엄청난 위력을 입증해내는 데 성공했다.
내부에 있던 사용자들은 흔적도 없이 한순간에 가루로 변해버렸으며, 건축물들은 물론, 외벽 역시 우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황승준은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가 운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아무리 다른 이들보다 상황 판단을 빨리했다곤 하지만, 고작 낙하산 정도로 폭발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는 없으니 말이다.
그저…
“구면이지, 우리?”
그를 향해 미소 짓는 중년 남자를 보며,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중년 남자의 정체란 다름 아닌, 어스인들의 사절로 방문했던 ‘강순철’이었기 때문이다.
***
나는 함선에 탑승한 채, 지상을 내려다보며 잔뜩 신이 난 노인을 바라본다. 얼핏 보기엔 평범한 노인처럼 보이지만 그의 정체는 영령이었다.
수십 만에 달하는 괴물들로부터 ‘단신으로’ 도시를 지켜냈다는 전설적인 기계 공학자(Mechanic), 레일리. 몇 번 영령 빙의를 사용한 적은 있지만, 소환한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가 자아낸 참상(慘狀)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레일리, 감사합니다.”
“아니야, 나도 오랜만에 재미 봐서 좋았어.”
그는 센트리건을 제작, 제조하는 것 말고 몇 가지 스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스킬 중 하나가 바로 ‘해킹’이었다. 해킹. 글자 그대로 기계를 탈취하는 스킬이다.
물론 그런 유사한 스킬을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과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령답게 그가 사용하는 해킹은 차원이 달랐다. 고작 스킬 한 번으로, 낙원 전체를 ‘지배’했으니 말이다.
본래 우리에게 발사돼야 할 플라즈마 광선은 그 주인들에게로 향했다.
“마음 같아선 더 머물고 싶지만… 내가 있어 봐야 방해만 되겠지.”
“아닙니다, 얼마든 머무셔도 환영입니다.”
“아니야, 오늘은 이쯤 할 테니, 다음에 또 필요해지면 그때 불러주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 전투를 통해 그의 능력은 확실히 보증됐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를 소환해, 함선 제조를 맡겨도 되는 일이었다.
말을 마친 그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아예 사라져버린다. 나는 뒤를 바라본다. 타오르는 눈빛을 하고 있는 그룹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누가 그랬었다. 복수는 꿀보다 달콤하다고.
평소 틀린 말이라 생각해왔지만, 이제 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갑시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매스 텔레포트’
매스 텔레포트. 술자 자신만 이동하는 것이 아닌, 다른 이들과 함께 이동할 수 있는 마법. 매스 텔레포트 마법은 그 사용 난이도가 텔레포트 마법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스 텔레포트 마법이 훨씬 까다로운 이유는 바로 그 필요 마력량이 상당하기 때문이었다. 연병수의 설명에 의하면 일정 숫자마다 곱절로 늘어난다고.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당할 수 있었다. 수백 명의 그룹원들이 지상으로 이동하는 것은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뭐, 살짝 무리한 느낌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보여주기’라는 게 있지 않은가. 나는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들처럼 ‘복수’하는 그룹원들을 바라봤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강순철이 사람 하나를 잡아 왔다.
“리더, 이놈이 사령관입니다.”
그의 손에 잡힌 채 벌벌 떨고 있는 중년 사내.
“아, 이름이 황승준이라고 했었나요?”
“예, 맞습니다.”
사령관이라면 그만큼 알고 있는 정보도 많을 것이다. 정보를 캐묻기 위해 입을 열 찰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알고 있는 건 뭐든지 다 불겠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쇼.”
“에라이 비겁한 새끼야.”
강순철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 버렸다. 뭐, 그 모습이 꼴불견이긴 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재밌네. 뭐, 안내시키면 재밌을 것 같네요.”
낙원을 바라본다. 처음 보는 풍경이지만 낯설지 않다. 도시를 둘러싼 거대한 장벽만 제외한다면 우리 쉘터와 비슷한 풍경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