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나는 시스템의 경고에 따라 시나트리온을 죽이지 않았다. 그동안 시스템은 내게 많은 도움이 돼왔고, 시스템의 말을 들어 손해 봤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뭐, 사실 ‘죽이지 않았다’라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비록 약화된 상태라곤 하나 그 발라르와 동일한 이계의 신격. 전력을 다한다 하더라도 죽이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의 분노는 부메랑처럼 내게 돌아오게 될 터였다. 즉, 내게 선택지는 한정돼 있었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시나트리온을 바라봤다. 고작 돌이나 제대로 지났을 법한 아이가 천진난만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겉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모양새.
그 모습을 보며 무심코 미소를 짓던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겉모습에 속지 않아야 한다. 눈앞에 존재는 이계의 신격이다, 이계의 신격. 속으로 되새기던 나는 물었다.
‘어떻게 하지?’
[플레이어, 시나트리온에게는 치료가 필요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살리기로 한 이상,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편이 낫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치료? 시간 회귀의 물약이라도 사용하면 되나?’
[시간 회귀의 물약보다는 스킬을 사용하는 걸 추천 드립니다.]
‘스킬?’
[플레이어, 이진서에게는 신격의 권능이 있습니다. 그것도 하위 신격도, 중위 신격도 아닌 최상위 신격의 권능이.]
시스템이 말하는 신격의 권능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가진 초월 등급 스킬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시계를 의미하는 것이겠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스킬.
시간 회귀의 물약과는 조금 다르다. 시간 회귀의 물약은 생명체의 시간‘만’ 회귀시켜주고 그 목적도 어디까지나 치료 목적에 한정된다. 결정적으로 죽은 이를 살리지는 못한다.
하지만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시계는 죽은 이조차 살릴 수 있다. 그야말로 사용법은 무궁무진한 셈. 물론 그 대가로 상당량의 기프트를 지불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긴 하다.
‘기프트가 얼마나 들려나.’
플레이어의 상처만 치료한다면 그 비용은 수십만 기프트 안팎으로 끝나지만, 시나트리온은 그냥 플레이어가 아닌 이계의 신격이다. 기프트가 얼마나 필요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이내 한번 사용해보기로 결심을 내리곤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시계를 사용했다. 순간적으로 세상에 시계태엽이 뒤덮인다.
째깍, 째깍. 시계태엽들이 일제히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 상태에서 시나트리온을 바라보자 숫자가 떠오른다.
[2,000,000,000]
그의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선 20억 기프트가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비싸네.’
비쌀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무려 20억 기프트나 들어갈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좀 억울한데, 기프트 계약을 맺지를 못하나?’
물론 20억 기프트의 대가로 이계의 신격이라는 시나트리온을 부려 먹을 수만 있다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언젠가 싸우게 될 발라르와의 전투에서도 큰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직접 계약을 맺은 플레이어들끼리는 상하 관계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기프트 계약을 맺지 못합니다. 다만…]
‘다만?’
[저희 컴퍼니에서는 이런 일에 대비해 공증을 서고 있습니다.]
플레이어 시스템을 만든 컴퍼니라는 곳에서 공증을 선다면,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강력한 신격들조차 노예처럼 부리는데 설령 이계의 신격이라 하더라도 무시하진 못할 것이다.
‘물론 기프트가 들어가겠지?’
[당연합니다.]
‘얼만데?’
[1 기프트입니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1 기프트? 그동안 플레이어 시스템은, 컴퍼니는 극한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10억 기프트라면 모를까 1 기프트라는 건…
‘의심스럽네.’
무슨 꿍꿍이속인지, 괜스레 불안감부터 치밀었다.
[본래대로라면 10억 기프트입니다. 하지만 컴퍼니에선 플레이어, 이진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서비스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게 정말 끝이야?’
[플레이어, 이진서가 플레이어 시스템을 필요로 하듯, 저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플레이어, 이진서는 저희에게 도움이 될 일이 있을 겁니다.]
도움이 될 일이라… 어차피 내게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깊게 생각할 것 없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 편할 것이다.
생각을 마친 나는 입을 열었다.
“시나트리온, 나는 당신을 치료하기 위해 20억 기프트라는 상당한 양의 기프트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에, 나는 당신에게 몇 가지 요구를 하려 합니다.”
그러자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던 시나트리온이 입을 열었다.
“어떤 요구지?”
그의 목소리는 영혼을 울리는 듯한 강력한 힘을 담고 있었다.
“먼저 당신이 나를 포함한- 지구와 X-347에 있는 생명체들을 해치지 않길 원합니다. 물론 이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것이 아닌, 상호 불가침을 의미합니다.”
“수락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우리를 보호해주길 원합니다.”
“누구로부터?”
“발라르, 당신과 같은 이계의 신격입니다.”
그의 눈에 파문이 일었다.
“불가능하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는 나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발라르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전에 만났거나,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말할 정도로 발라르가 강력하다는 것 역시…
물론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혼자 상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상대가 발라르만 있는 건 아닙니다. 당신과 같은 우주 해적- 혹은 다른 이들의 침입으로부터도 보호해주길 원합니다.”
이번엔 무사히 넘어갔지만, 다음에 비슷한 일이 벌어져도 무사히 넘길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는 이해했다는 듯 그 조막만 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얼마나?”
“얼마까지 알아보고… 아니, 얼마나 가능하십니까?”
괜스레 농을 건네려 했던 나는 그가 눈살을 찡그리자, 얼른 말을 바꿨다.
“지금 나는 주군을 잃어, 갈 곳을 잃어버린 상태다. 내가 몸을 담을 곳을 찾을 때까지로 하지.”
“그 기간이 짧지는 않겠죠?”
“인간의 시간으로 불만족스럽지는 않을 거다.”
“우리의 계약은 컴퍼니의 공증을 받게 될 겁니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한다.”
[1 기프트를 지불해 직접 계약자, 이진서와 직접 계약자, 시나트리온은 계약을 맺었습니다.]
[계약 내용은 상호 동의하에 수정이 가능하며 만약 계약을 어길 경우, 저희 컴퍼니에서는 어긴 쪽에게 상당한 패널티를 부여할 것입니다.]
패널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서술되진 않았지만, ‘상당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정도면 평범한 패널티는 아닐 것이다.
강렬한 빛과 함께, 나와 시나트리온 사이에 가느다란 선이 이어졌다. 손가락으로 선을 건드려봤지만, 실체가 없는지 내 손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그 사이,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 약속대로 이행해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2,000,000,000 기프트를 소모해, 시간을 되돌립니다.]
그의 시간이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아볼 수 없는 중성적인 외모의 청년으로 변한 그는 손을 가다듬었다.
그는 이내, 그가 타고 온 우주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거대한 블랙홀이 생겨나더니 우주선을 그대로 집어삼켜 버렸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은 걸 보면 마법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스킬인가?
“확실하군. 잘 부탁한다.”
그는 내게 악수를 건넸고, 나는 그의 악수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는 ‘신’을 얻었다.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나는 지구로 피신한 X-347의 생명체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칠중 안전 감옥, 아니 안전 가옥 안에 있는 레비아탄 역시 해저 시설에 다시 돌려놨다. 뭐, 녀석에게는 오히려 묶여있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일을 대충 마무리 지은 나는 지구로 건너가, 시나트리온에게 우리 쉘터를 안내했다.
“앞으로 여기서 묵으시면 됩니다.”
“고맙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민혁이, 여기 이 친구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아직 시나트리온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정민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였다.
“예, 필요한 게 있으시면 뭐든지 제게 말씀해주십쇼.”
“그러지.”
“아, 그리고…”
나는 손목에 차고 있는 포탈 시계를 빼서, 정민혁에게 내밀었다. 그는 엉거주춤 시계를 받아들었다.
“복사해라.”
“예? 아, 예, 형님.”
그는 신화 등급 스킬, ‘복사(Copy)’를 배웠다. 말 그대로 아이템이나 스킬을 복사할 수 있는 스킬이다. 물론 완전한 복사가 아니라 일시적인 복사지만…
어떤 아이템이든 복사할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유용하다 말할 수 있었다. 그의 손이 푸른빛으로 물들고, 곧 푸른색의 포탈 시계가 하나 더 생성됐다.
나는 시나트리온에게 포탈 시계를 내밀었다.
“X-347과 지구를 연결하는 포탈 시계입니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시나트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이곳에서의 일은 모두 다 마친 셈이었다. 설령 우주 해적들에게 침공받는다 하더라도, 발라르급의 괴물이 아닌 이상 그가 지키는 지구, X-347 행성은 안심일 것이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뒷말은 정민혁이 따라 한 것이었다. 그의 어깨를 두드린 나는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형님, 동화 세계는 어떻게 되신 겁니까?”
“동화 세계? 다시 가봐야 돼. 갑작스러운 소동 때문에 잠시 나온 거야.”
내가 이 세상으로 넘어온 지 고작 세 시간 정도가 흘렀다. 시간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별다른 문제가 벌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예, 형님. 파이팅입니다!”
그의 파이팅은 언제나 힘이 넘쳤다.
“그래, 너도 고생해라. 저 양반 잘 모시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나는 시스템에게 요청해, ‘동화 세계’로 향하는 포탈을 열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마침내 나는 테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나를 맞이한 건 좀비였다. 수십 마리의 좀비들이 우르르 내게 달려들었다. 그들을 향해 주먹을 뻗으려던 나는 주먹을 내려놨다.
좀비들의 얼굴이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많이 망가져 있긴 하지만, 틀림없이 우리 그룹원들이었다.
‘이상하네.’
어째서 그들이 바이러스에 감염이 된 채로,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는 걸까. 그리고 다른 그룹원들은 어떻게 된 걸까. 생각하는 사이에도, 그들은 내게 닥치는 대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지금껏 상대해온 다른 좀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생전보다 훨씬 더 뛰어난 듯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제압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나는 그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