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그들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걸 방증이라도 하듯 ‘우리들’ 연합원들은 흉흉한 시선으로 에일리를 쳐다보고 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 이럴 줄 알았다면 통역을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이제 와서 그녀를 돌려보내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어차피 같은 쉘터에 거주하는 이상, 두 연합원들은 싫어도 마주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살짝 마력을 방출했다. 그들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내가 한 일이라는 걸 깨달은 듯 그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통역해 주십시오.”
그녀는 조금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네, 뭐라고 통역할까요?”
“나는 당신들이 과거에 어떤 악연이 있든 상관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와 살고 싶다면 과거의 악연은 잊어야 한다, 라고 전해주십시오.”
“우리들 연합…을 받아들일 생각이신가요?”
에일리의 얼굴에 불안감이 어린다. 굳이 통찰안을 사용해 그녀의 생각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그녀가 불안해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새로운 세력이 합류한다면, 이곳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낮아질 것을 우려해서겠지. 마치 우리 그룹의 중국인들과 러시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내 알 바는 아니다.
내가 ‘테라인’들을 돕고자 하는 것은, 순수한 호의일 뿐이다. 우리 그룹 일이라면 모를까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솔직한 내 생각이었다.
생각을 마친 나는 입을 열었다.
“네, 그들을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아…”
“단순히 우리들 연합뿐만이 아니라, 도시 곳곳에 숨어 있는 생존자 그룹을 전부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아, 쉘터를 만든 건 그러한 이유 때문이셨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만들고 있는 쉘터는 면적만 놓고 보면 십만 명 넘게 수용 가능하다. 공간 확장된 안전 가옥들까지 감안한다면 그 숫자는 몇 배로 늘어날 것이다.
이 시설들을 건설한 목적은 전부 테라인들을 돕기 위함이었다.
내 눈치를 살피던 그녀가 곧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에서 유창하게 흘러나오는 외국어. 적대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우리들 연합원들의 얼굴이 어느 정도 누그러진다.
곧, 우리들 연합의 리더가 입을 열었다.
“뭐랍니까?”
“제안을 받아들이겠대요. 단, 저쪽- 그러니까 우리 시궁창 연합에서 먼저 시비를 걸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전해주세요.”
“…예.”
에일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전했고, 나는 그녀가 올바르게 말을 전하는지 확인한 후, 그룹원들을 시켜 ‘우리들’ 연합원들에게 도시 안내를 시켰다.
그렇게 상황을 일단락시킨 나는 쉘터의 장벽 위에 올라가 담배를 물었다.
장벽 위엔 한승주의 센트리건들이 촘촘하게 깔려 있었다. 바닥에 즐비하게 좀비 시체가 늘어져 있는 걸 보면 한바탕 한 모양이었다. 담뱃불을 붙이자 담배 끝이 파츠츠 타들어 간다.
한 모금 빨아들였다가 내뱉었다.
‘평화롭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삼 일째.
시간이 흐르면 숨겨진 변수가 나타나지 않을까 했는데, 아직까지 변수라 부를 만한 존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곳곳에 숨어 있는 생존자들과, 좀비들이 전부일 뿐이다.
‘그나저나…’
물끄러미 도시를 바라본다.
정확히 말하면 도시 너머에 있는 ‘낙원’을. 이곳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져 있지만, 통찰안으로 도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지금의 내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강순철 씨는 잘하고 있으려나…’
낙원의 사절로 파견된 그들은 지금쯤이면 낙원에 도착했을 것이다. 잘 도착했는지, 낙원인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갈 걸 그랬나.’
궁금하다. 다음번에는 내가 따라가야겠다, 속으로 생각하면서 나는 담배를 지상으로 던졌다. 바로 그때였다. 내 팔목에 차고 있는 시계가 울리기 시작한 것은.
내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는 평범한 시계가 아니다. 내가 소유한 X-347 행성과 드나들 수 있는 포탈 시계.
이 포탈 시계는 단순히 차원문을 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X-347 내부에 있는 플레이어와 연락할 수 있는 연락 기능도 가지고 있다.
물론 X-347 내부에서 내게 연락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플레이어는 단 한 명밖에 없다. 그 정체는 바로 해저 연구 기지에서 실험 및 연구를 하고 있는 아나스타샤.
“무슨 일입니까, 아나스타샤?”
-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 지금 행성이 침공당했어요.
“침공?”
- 우주 해적이라 불리는 놈들인데… 아무래도 레비아탄을 노리는 것 같아요.
“제가 꼭 가야 되는 상황입니까?”
- 이미 거인들이 전투를 벌였고, 패배했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분명 동화 세계의 미션은 중요하지만, 꾸준히 기프트를 채굴할 수 있는 X-347 역시 중요하긴 매한가지다.
“내가 넘어간다고 해서, 미션을 실패하는 건 아니지?”
- 네?
“아나스타샤한테 물어본 게 아닙니다.”
그제야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다.
- 미션을 실패하진 않습니다만 획득한 기여도가 초기화됩니다. 그리고 미션 실패 시, 패널티가 적용됩니다.
동화 세계의 패널티는 평범한 패널티가 아니다. 스킬 삭제에 능력치 하락까지. 특히 삭제되는 스킬을 고를 수도 없고, ‘무작위 스킬’이 삭제된다는 것은 공포나 다름없는 일이다.
신화 등급 스킬은 삭제될 수 있다 쳐도, 만약 초월 등급 스킬이 삭제되기라도 한다면 손해는 그야말로 극심하니 말이다. 하지만 패널티가 무섭다고 넘어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초월 등급 스킬과 X-347 둘 중에 뭐가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둘 다 소중해서 어느 한쪽을 고르기 힘들지만 굳이 고르라고 한다면 X-347이었다. 게다가 X-347에는 아나스타샤만 있는 게 아니다. 거인족도, 용족도, 인간들도 존재한다.
뭐, 인간들의 경우엔 범죄자들도 상당수지만…
나는 한승주를 불렀다.
“또 뭘 시키려고요? 할 일은 다 한 거 같은데?”
“아, 그게 말입니다…”
그녀는 내 설명을 듣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넘어가야 한다고요? 지금요?”
“예, 사정이 그렇게 됐습니다. 승주 씨라면 순철 씨와 힘을 합쳐 잘해나갈 거라고 믿습니다.”
“아니, 그런 엄청난 일을 저한테 맡기는 건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에요?”
“아마도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건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주 해적.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레비아탄을 빼앗아가려는 걸 보면 그들의 무력 역시 상당하다고 가정해야 한다.
나조차 쉽사리 그들과의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 사실을 이야기해봐야 불안감만 야기할 것이기에, 나는 굳이 이야기하진 않았다. 대신 나는 그녀에게 기프트를 넘겼다. 5억 기프트. 기프트를 넘겨받은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렇게나 많이…?”
“심시티 짓는다고 생각하고, 제가 없는 동안 도시를 완벽하게 지어보세요. 행여나 좀비 수십만 마리가 몰려온다 하더라도 너끈하게 막아낼 수 있을 만큼.”
“그냥 이걸로 신화 등급 스킬 구매하면…”
가끔 만날 때마다 신화 등급 기계 공학 스킬을 가지고 싶다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던 그녀였다. 물론 그 부탁을 들어준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화 등급 기계 공학 스킬은 비쌌다.
가격도 절묘하게 딱 5억 기프트.
‘공교로운 가격이긴 하네. 회수할까?’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격인가…
“안 됩니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여기 승주 씨 말고도 3천 명이나 되는 그룹원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저도 안다고요.”
“그룹원들에게 대신 양해 말씀 부탁드리고… 순철 씨 돌아오면 순철 씨에게도. 그리고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세요.”
“어떻게 연락하면 되는데요?”
나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기프트 계약(G)을 사용합니다.]
푸른 선이 이어진 것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됐습니다. 필요하면 주문을 외우면 돼요.”
“무슨 주문이요?”
“아무 주문이나 외우면 됩니다. 뭐, 너무 유치한 주문만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저를 뭐로 보는 거예요. 제가 어린 애도 아니고… 아무튼 알았어요.”
나는 잔뜩 귀찮다는 낯빛을 하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손목시계를 눌러서 차원문을 열었다. 한승주가 뒤에서 뭐라고 소리쳤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너머로 발을 뻗었다.
툭.
바닥에 착지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분명 맑아야 할 하늘엔 잔뜩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그리고 난 먹구름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함선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우주 전함?”
아나스타샤가 일전에 설명했던 그 우주 전함이 틀림없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방법을 생각하다가 일단 그녀를 찾기로 했다. 그때, 우주 전함에서 플라즈마 레이저가 발사됐다.
아직 이쪽의 존재를 눈치채진 못한 듯, 내가 아닌 지상을 향해서였다. 거대한 돌덩어리를 던지던 거인이 레이저를 맞고 고함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죽진 않았지만, 데미지가 심각한지 빈사 상태에 이르렀다.
‘저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되겠네.’
아무래도 우선순위를 바꿔야 할 것 같다. 방치해서 이 행성의 생명체를 죽게 만들고 싶진 않았으니 말이다.
“영령 빙의.”
어떤 영령에 빙의할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옐레나를 선택했다.
[영령 빙의(G)를 사용합니다.]
[대마도사, 옐레나가 몸에 빙의됩니다.]
[마력에 따라 동화율이 설정됩니다.]
[마력 388을 확인했습니다.]
[현재 동화율 100%] [지속 시간 : 1시간] [재사용 대기시간 : 48시간]
[영령의 능력치와 스킬의 일부를 불러옵니다.]
[마력 요새(L)를 일시적으로 습득했습니다.]
[파워 워드(G)를 일시적으로 습득했습니다.]
신화 등급에 도달한 영령 빙의를 사용하면, 신화 등급의 스킬을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비록 재사용 대기시간은 똑같이 적용되긴 하지만…
‘파워 워드’ 같은 경우에는 재사용 대기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연속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다만 상당한 양의 마력을 소모하기에 일반적으로는 한 번 내지 두 번 사용하는 것이 고작이지만…
나는 마력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적어도 마인화 상태에서라면 말이다.
[마인화(改)(EX)를 사용합니다.]
온몸에 힘이 끓어 넘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우주 전함을 향해 가볍게 손짓을 하며 중얼거렸다.
“떨어져라.”
거대한 우주 전함이 기우뚱거린다. 나는 한 번 더 중얼거렸다.
“떨어져라.”
금속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우주 전함이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통찰안의 3단계 시험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시험 제한 시간 : 일주일]
[일주일 안에 시험을 치르지 않으면, 사용자는 통찰안의 안에 갇히게 됩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메시지에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메시지를 닫고 추락한 우주 전함을 향해 중얼거렸다.
“미티어 스웜.”
운석 무리가 추락한 우주 전함을 향해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하나, 둘… 그 숫자는 순식간에 수십, 수백을 초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