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낙원 전체를 둘러싼 외벽. 그 높이는 수백여 미터에 달하고, 두께는 수십여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장벽. 그런 외벽 위에서 발라르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낙원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워낙 높이가 높아 개미 크기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는 그들이 이 낙원을 혼란에 빠트린 ‘어스인’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스인, 마치 신기루처럼 도시에 모습을 드러낸 수천 명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 어스인이라는 괴상한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을 어스 소속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 어스라는 것이 국가를 의미하는 건지, 도시를 의미하는 건지, 아니면 집단을 의미하는 건지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했지만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낙원에서는 어스와의 접촉에 성공했고, 어스에서는 사절을 파견하기로 했다. 바로 저 어스인들이 그 사절일 터였다. 발라르는 그들을 보기 위해 외벽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어스인들이 도시 안으로 들어오는 것까지 확인한 그는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가 지상에 도착했을 때, 이미 어스인들은 낙원 방위 사령관, 황승준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낙원은 여러분들을 환영하오. 낙원 방위 사령관, 황승준이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어스의 간부인 강순철입니다.”
강순철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남자는 야성미가 넘치는 근육질의 소유자였다. 그가 걸치고 있는 갑옷은 온통 붉은색인 투박한 디자인이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잘 어울렸다.
‘저게 바로 파워 슈트란 말이지.’
갑옷을 보며 눈을 빛내던 발라르는 얼른 입을 열었다.
“어스인들을 뵙게 돼 영광입니다. 저는 낙원의 과학자, 발라르입니다.”
황승준은 발라르가 끼어들자 살짝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껄껄 웃었다.
“허허, 이 친구가 대단합니다. 우리 낙원의 미래라고 할 수 있지.”
“…발라르요?”
강순철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확장되는 걸 발라르는 놓치지 않았다.
“예, 제 이름에 무슨 문제라도…?”
강순철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 같아서 말입니다.”
“하하, 제 이름이 흔하긴 합니다.”
겉으론 웃어넘겼지만, 발라르는 속으로 생각했다.
동공이 확장되는 것은 보통 놀랄 때 보이는 반응이다. 그가 흔하지 않은 자신의 이름을 듣고 놀랄 만한 이유는 그가 생각하기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는 것.’
물론 강순철이 그의 정체를 아는 것이 아주 의외는 아니었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기 전에, 그는 천재 과학자로 명성이 자자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무언가 기시감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놓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뭘까?’
발라르가 생각에 잠긴 사이, 황승준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친구의 명성이 대단해서, 아마 들어 보신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어쨌거나… 잡담은 이쯤 하고 안쪽으로 이동하실까요?”
“예, 감사합니다.”
황승준과 강순철은 곧 안쪽으로 이동한다. 따라온 낙원인들과 어스인들도 그 뒤를 따랐다. 생각에 잠겨 있던 발라르 역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천천히 걷기를 대략 수십여 분, 그들은 거대한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낙원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됩니다. 지금까지가 외성이고, 지금 저 문이 외성과 내성을 연결하는 문입니다. 우리는 ‘헤븐즈 게이트’, 천국의 문이라고 부릅니다.”
“아름답군요.”
강순철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감상평을 말했다.
예술품에 관해서 별 흥미가 없던 그였지만, 그런 그를 감탄하게 만들 정도로 눈앞의 문은 아름다웠다. 정말 천국의 문이 있다면 저런 디자인일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닙니다. 저 문의 기능에 대해서 말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지요.”
“어떤 기능이…”
“아무래도 극비이다 보니 모두 말할 순 없지만, 단단합니다.”
“아, 그렇군요.”
“정면에서 플라즈마 대포를 맞고도 흠집 하나 생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현대 기술력의 ‘정점’이라 말할 수 있는 플라즈마 대포의 순간적인 위력은 어지간한 핵무기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그런 플라즈마 대포를 맞고도 멀쩡하다는 것은 천국의 문이 그 정도로 단단하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방증인 것이다.
‘어떠냐? 우리 낙원의 기술력이?’
황승준은 내심 그의 놀라는 반응을 기대했다. 하지만 강순철은 고개만 끄덕일 뿐, 별로 놀란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살짝 자존심이 상했으나, 그는 이내 자기 합리화를 했다.
‘플라즈마 대포가 뭔지 모르는 거 같은데. 그래, 저런 중세 갑옷이나 걸치고 다니는 촌뜨기들이 플라즈마 대포를 어떻게 알겠어?’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강순철이 플라즈마 대포를 수천 번 이상 다뤄본 경험이 있다는 것을, 때문에 오히려 그에 관한 지식은 어지간한 기술자들을 뺨칠 정도로 상당하다는 것을 말이다.
생체 안드로이드 로봇, Q가 사용하는 대표적인 무기는 플라즈마 대포다. 아나스타샤와 김민수는 플라즈마 대포를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테스트를 했고, 강순철이 그 테스트를 도왔다.
‘플라즈마 대포를 막아낼 정도면 상당한 방어력은 맞지. 음, 맞나?’
강화된 플라즈마 대포의 위력은 웬만한 플레이어들에게도 위협이 될 정도로 대단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웬만한’ 플레이어일 때의 이야기다. 그 기준점을 이진서로 놓는다면…
정면에서 플라즈마 대포 수백 발을 얻어맞아도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던 이진서다.
‘저 문이 아무리 단단해도 리더보다 단단할 리는 없겠지.’
그야말로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자, 이제 들어가시지요.”
그의 말과 함께, 천국의 문이 끼이익 금속 긁는 소리를 내며 열린다. 마침내 낙원의 내성이 그들의 앞에 펼쳐졌다.
***
같은 생존자들을 노예로 잡아 부리는 일은, 이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선 흔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이진서에게 포로로 잡힌 ‘시궁창 연합’ 역시 자신들이 그런 꼴이 될 거라 생각했다.
노예처럼 일을 하다가, 종국에는 좀비에게 먹이로 던져질 운명…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빗나갔다. 이진서는 그들에게 일을 시켰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예처럼 그들을 부리진 않았다.
정해진 노동만 한다면 휴식 시간이 주어졌고, 식사로는 생전 처음 보는 진귀한 요리가 제공됐다.
도시의 물자는 풍족했지만, 일 년이 흐른 지금은 더 이상 풍족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음식은 상해버렸다. 물론 유통 기한이 긴 통조림류는 멀쩡했지만, 그마저도 이미 동이 나버렸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해본 것이 언제인지 그들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들은 제공된 요리를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접시가 나올 때마다 그야말로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그야말로 영락없는 거지꼴이었다.
“천천히 먹어요, 천천히.”
요리조원, 이미나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예…”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들이었지만, 이내 다시 활기차게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배를 통통 두드렸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맛있긴 더럽게 맛있네…”
“대체 이런 요리는 어떻게 만든 거지?”
시궁창 연합의 리더, 김재한의 물음에 옆에 있던 여자, 에일리가 되물었다.
“왜요?”
“아니, 그렇잖아. 여기 요리 들어간 재료가 하나같이 이 세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인데. 그런 요리를 아무렇지 않게, 그것도 심지어 우리한테 제공했다는 게 말이 돼?”
“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요. 아까 여자 반응 못 봤어요? 우리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잖아요.”
“그게 뭐 어때서?”
“누군가를 동정한다는 것은 그만한 여력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에요. 저 사람들에게 저 요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죠.”
“뭔가 꿍꿍이가 있을지도 몰라.”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저런 꿍꿍이라면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옳소, 옳소.”
“아니, 나도 그냥 한번 해본 말이야.”
김재한은 머쓱한 듯 말했다.
분명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하기야 생각해보면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평범했던 그들이 시궁창 생활이나 하고 있는 것이 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이 세상은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여기다가 쉘터를 세우는 목적이 뭘까?”
그들은 이곳에 쉘터를 세웠다. 거의 수십만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쉘터였다. 그들이 동원된 작업은 바로 ‘쉘터 건설 작업’이었다.
“거주하려고?”
“어쩌면 저들의 동료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죠.”
“가까이 낙원이 있는데?”
고작 수십 킬로미터만 이동하면 낙원이 있다. 그들이 이곳에 쉘터를 건설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좋게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늘 위의 태양은 두 개일 수 없는 법이니까.
“그 사람 무력 봤잖아요. 낙원도 안 무섭나 보죠. 그리고 우리 모르게 물밑에서 교류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 네 말이 맞다.”
김재한은 생각을 관두기로 했다. 어차피 그들의 상황은 그들을 따라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친절하게 대하지만, 그들이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때, 건물 안으로 남자가 들어왔다.
“히익.”
김재한은 입을 턱 막았다. 남자의 얼굴이 그가 잘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얼른 고개를 내렸다. 마치 PTSD가 온 것처럼 온몸이 떨렸다.
딱밤 하나에 얻어맞아 피분수를 뿜던… 비단 그만 그런 것은 아닌지라,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일한 반응을 보였다. 남자- 이진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명, 한 명만 바깥으로 나와 주세요.”
“혹시 무슨 일인지 여쭤도 될까요?”
에일리의 물음에 이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통역이 필요한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혹시… 한국어, 아니, UK어 말고 다른 나라 언어 아시는 분 계십니까?”
“제가 알아요.”
“예, 이리로 오세요. 대가는 지불하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재한은 불안감 어린 표정으로 함께 빠져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무슨 일입니까?”
“뭐, 리더도 모르는데 저인들 알겠습니까… 에일리는 좋겠네. 무슨 대가를 받을까?”
“지금 그게…”
김재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진서와 함께 따라나간 에일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당황한 눈초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우리들 연합?”
“아는 사람들입니까?”
“아, 예…”
그녀의 얼굴을 알아봤는지 사람들의 눈 역시 커진다. 그들의 눈엔 경계심이 어렸다.
“어째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겁니까?”
“우리들 연합은 우리 시궁창 연합하고 별로 사이가 안 좋았거든요.”
“뭐, 서로 전쟁이 났다거나, 그런 겁니까?”
“비슷해요.”
에일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