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지하철 차량 안에서 수십 개의 총구가 나를 겨누고 있다. 개중에는 광고판에서 봤던 플라즈마 총도 보인다. 하지만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기야 생각해보면 긴장감이 드는 게 웃기다. 총이다. 김민수와 아나스타샤가 힘을 모아 개량한 플라즈마 대포를 정면에서 맞고도 멀쩡한데, 고작 총 ‘따위’에 데미지를 입을 리 없다.
지금의 내게 데미지를 조금이라도 주고 싶다면 적어도 핵폭탄 정도는 가져와서 눈앞에서 터뜨려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도 어떤 핵폭탄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손 들어라.”
그러나 그런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순순히 나를 안내한 남자의 말에 따라 손을 들었다. 일단 장단에 맞춰주며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러자 남자가 내게 다가와 갑옷을 강제로 벗기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벗길 수 있을 리 없다. 내가 걸친 갑옷은 평범한 갑옷이 아닌, 태양신, 루의 갑옷이니까.
낑낑거리는 그에게 속으로 웃으면서 나는 루의 갑옷을 벗었다. 무게 때문인지 갑옷을 든 그가 휘청휘청거린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갑옷을 바닥에 내던졌다. 데구르르, 바닥을 구른다.
음, 루가 길길이 날뛸 텐데… 어딘가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며 씩씩대고 있을 태양신을 떠올리며 나는 쓰게 웃었다.
“이제 묻는 말에 대답해라.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색이 보이면 바로 쏘겠다.”
“좋게 말할 때 대답하라고, 형씨.”
차량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물론 여전히 총구는 나를 향해 겨눈 상태 그대로였다. 그들은 내 온몸을 밧줄로 칭칭 묶었다. 나는 순순히 묶여줬다.
“어디서 왔지? 역시 낙원인가?”
“아까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실대로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게 윽박지르듯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라. 이 근방에서 그만한 세력을 거느릴 만한 곳은 낙원밖에 없다. 그러면 설마… 정부 소속이라고 말할 생각이냐?”
그의 얼굴에 의구심이 어린다. 다른 사람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정부 소속?”
“설마, 정부가 아직까지 건재하다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정부 소속? 미안하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체 네놈들은 어디 소속이지?”
“글쎄… 굳이 따지자면 어스(Earth) 소속이라 할 수 있을까?”
“어스?”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들의 반응에 피식 웃었다. 어스. 지구의 영어 이름. 하지만 이 평행 세계의 지구는 어스 대신 테라(Terra)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내 말장난을 알지 못한다.
“감히 장난을…”
그래도, 내 표정을 보고 내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걸 용케 눈치챈 남자가 내 머리에 총구를 더욱더 밀접해왔다. 방아쇠를 쥐고 있는 그의 손가락은 당장이라도 당겨질 듯 움찔거렸다.
‘뭐, 여기까지 할까.’
이 잠깐의 대화로 어느 정도 원하는 정보는 캐냈다. 그들의 대화와, 그들의 생각을 읽으며 이 세계와 ‘낙원’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대충이나마 알았다.
‘이들에게 캐낼 게 더 남아있지도 않은 것 같고.’
애초에 이들은 추방자들이다. 낙원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 낙원에서들은 이들을 스캐빈저라고 칭하는 모양이다. 뭐, 이들의 삶을 생각하면 그들이 스캐빈저로 사는 것은 당연하지만.
“숙여라. 당장 숙이지 않는다면…”
가볍게 힘을 준다. 내 온몸을 묶고 있던 밧줄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그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 내 움직임이 빨랐다.
그의 총을 쳐낸 나는 그에게 딱밤을 날렸다. 퍽! 피분수를 뿜으며 날아간 그는 지하수로의 벽에 거칠게 부딪친다. 우수수 그를 향해 오물들이 떨어져 내린다.
최대한 힘 조절을 했기에, 죽지는 않았다.
“저 새끼 죽여!”
그들의 총구가 불을 뿜기 시작한다. 정신을 집중한다.
세상이 느릿느릿해진다. 탄환이라 하더라도, 플라즈마 광선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느려진 세상 속에서 유유히 탄환의 비를 걷던 나는 그들에게도 딱밤을 날렸다.
그들은 어김없이 피분수를 뿜으며 날아갔다.
“오, 오지 마, 이 괴물…!”
사람들이 달아나기 시작한다. 물론 그들을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확실히 지구인보다 신체 능력이 우월하긴 하지만 그래봐야 나와 그들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 말이다.
안전 가옥을 구매해, 그들을 안에 수감한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여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나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아까, 지하수로의 철문을 열어줬던 그 여자다.
“아직 한 명 남았었나?”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항복한다면 무력을 사용하는 일은 없도록 하지.”
다행히 그녀는 눈치가 빨랐는지, 얼른 총을 바닥에 내려놨다. 나는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그녀 역시 안전 가옥에 가둔 나는 천장을 향해 가볍게 중얼거렸다.
“디그.”
본래는 땅을 파는 마법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지하수로의 천장이 괴상하게 일그러지더니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터져나갔다.
뻥 뚫린 천장 위로, 좀비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바닥에 떨어진 그들은 몸을 일으켜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 바닥을 나뒹굴던 루의 갑옷과 무구들이 내 몸에 장착된다.
사람들을 상대론 힘 조절을 해야 했지만, 좀비들을 상대론 힘 조절을 할 필요가 없다. 좀비들이 내게 달려든다. 나는 주먹을 휘둘렀다.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좀비의 몸이 분해된다.
바닥에 뿌려지는 살점과 핏물들을 보며 나는 엘론을 꺼냈다. 역시 주먹보다는 검을 쓰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검집에서 꺼낸 엘론은 찬란하게 빛난다.
검에 마력을 실은 나는 좀비들을 향해 가볍게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원래의 크기를 되찾은 엘론이 지상을 향해 떨어져 내린다.
쾅! 마치 핵폭발이라도 터진 것처럼 강렬한 폭발과 함께, 세상이 섬광으로 물든다. 그리고 섬광이 잦아들었을 때, 살아있는 좀비는 없었다.
나는 엘론을 원래 크기로 만들고, 검집에 넣었다. 느껴지는 시선에 안전 가옥을 돌아보니 사람들이 그 모습을 경악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인 나는 상점에서 부유석을 구매했다.
[45,000기프트를 지불해 부유석(L) x10을 구매했습니다.]
구매한 부유석들을 안전 가옥에 던지듯 부착한 나는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안전 가옥이 느릿느릿하게 땅에서 떠오르기 시작한다.
하늘 요새를 만들 당시 내 마력 컨트롤 능력은 부유석을 다룰 정도가 되지 않았다. 옐레나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재능’의 차이라고.
하지만 지난 반년간, 나는 재능을 뛰어넘을 정도의 노력을 했고, 부유석을 다룰 정도의 정밀한 마력 컨트롤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무사히 올라가는 걸 확인한 나는 가볍게 도약한다. 그룹원들이 우르르 내게 달려왔다. 주위에 좀비 시체가 즐비한 걸 보니, 저들이 처치한 듯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저들은 왜 저기에 갇혀서…”
둥둥 떠다니는, ‘시궁창 연합’의 사람들이 갇힌 안전 가옥을 손으로 가리키며 내게 물어오는 강순철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별일 아닙니다.”
굳이, 그에게 내가 그들에게 ‘위협’을 받았다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뭐, 사실대로 말한다 하더라도 믿어줄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낙원의 위치를 알았습니다.”
“어디입니까?”
“뭐, 여기서 저쪽으로 대략 50km 떨어져 있다더군요.”
“낙원으로 바로 가실 겁니까?”
“저쪽에서 환영할지 모르겠네요. 낙원은… 결코 이방인들에게 친절한 도시가 아니랍니다.”
그들의 생각을 엿본 바로는 오히려 우리를 경계할 확률이 높았다. 적대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이렇게 말하니 낙원이 이상한 것 같지만, 뒤집어 놓고 생각해보면 그들의 반응은 당연하다.
당장 우리 세계만 해도 그랬다. 아포칼립스 세계에서는 변이체와 좀비뿐만이 아니라, 같은 생존자들 역시 적으로 돌변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들이 우리를 적대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다. 동화 세계의 ‘미션’을 클리어하기 위해서 그들의 존재는 필수불가결이니 말이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소규모로 사절을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대규모로 우르르 몰려가면 경계심만 키우기 십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절은 어떠한 사람으로…”
“만약 자원자가 없다면 제가 갈 생각입니다.”
그편이, 제일 마음이 편하긴 했다.
“아닙니다, 킹(King)이 직접 움직일 순 없죠. 제가 가겠습니다.”
강순철의 말에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를 믿는 만큼, 나 역시 그를 굳게 믿고 있었다. 통솔력이 탁월한 그가 사절을 맡아준다면 안심이다.
“그나저나… 저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안전 가옥 내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렸는지, 창문을 통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공포로 가득했다.
“원래는 살던 곳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습니다만… 조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비록 거짓된 세상이긴 하지만 좋은 일을 하면 다 부메랑처럼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역시 리더이십니다.”
“그리고 이 도시엔 저들 말고도 생존자들이 제법 많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일단은 그들을 ‘구출’하는 데 주력할 생각입니다.”
“예, 그렇게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그에게 내 생각을 전한 나는… 본격적으로 토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한승주 씨.”
“왜요?”
안 보인다 했더니, 또 건물에 처박혀서 노트북으로 게임을 하고 있던 한승주를 찾아 말했다.
“플라즈마 생성기, 이곳에 설치해주세요.”
“플라즈마 생성기? 여기다가 뭐 도시라도 세우게요?”
“세운다는 표현보다는 재건한다는 표현이 좋겠네요. 뭐, 얼마나 인원이 늘어날지는 모르겠지만.”
한승주는 무척이나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투덜투덜거리긴 해도, 시키는 일은 꼬박꼬박 잘하는 그녀였다.
“알았어요.”
그녀에게 명령을 내린 나는 이번엔 안전 가옥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자,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사람들이 두려운 얼굴로 뒷걸음질 친다. 그들에게선 저항의 의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기야 그 꼴을 당했는데, 저항을 한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대단한 일일 것이다.
“제, 제발 우리를 살려주세요.”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다시는 어스님들에게 대항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짐짓 냉정하게 말했다.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나는 이미 한 번, 당신을 믿었지만 그 믿음의 대가는 당신도 알다시피 협박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당신들에게 벌을 내릴 겁니다.”
짤막하게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그리고 그 벌은 아주… 당신들에게나, 내게나, 잔혹할 겁니다.”
“제발 한 번만 다시 기회를 주신다면…”
그들의 표정은 이제 새파랗다 못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농담이 너무 심했나? 어쩌면 그들의 머릿속에선 그들이 고문당하는 장면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아줄 생각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테고… 협박을 한 것도 사실이니 그들에게 나름의 벌을 준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