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드론에 촬영된 영상을 전해 받은 미래 도시, 낙원의 수뇌부는 혼란에 빠졌다. 느닷없이 나타난 정체불명의 인간 무리와, 그들의 리더로 보이는 듯한 남자가 보여준 비상식적인 힘.
그들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며, 그들의 등장은 앞으로 낙원, 아니 이 세계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 어찌 됐건, 분명 앞으로 낙원의 미래가 걸려 있는 중요한 사안임이 틀림없었다.
늦은 새벽, 낙원의 지도자인 벨메일은 긴급히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 소집된 이들은 하나같이 낙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실세’들이었다. 회의장 문 앞에서 발라르는 서성거린다.
그의 모습은 무언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안 들어가고 있어요?”
그런 그를 부른 건, 생기발랄한 붉은색 머리 여자였다. 발라르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를 돌아봤다.
“아, 티나.”
“또 사람들 때문에 그래요?”
“티나도 알다시피, 나는 공황 장애가 있잖아?”
“괜찮아요, 내가 있잖아요. 그리고 설령 바보 같은 짓을 한다 하더라도 아무도… 낙원, 아니 우리 인류의 미래인 당신을 무시하지 못할 거예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제가 막아줄게요.”
그렇게 말하며 티나는 발라르에게 팔짱을 낀다. 그는 엷게 미소를 흘리며 그녀에게 귓속말로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한결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회의장 문을 열어젖혔다.
거대한 회의장 안에는 이미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한 명도 아니고, 수백 명의 사람이. 그리고 그들은 전부 입구에 들어온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의장의 한가운데 앉은 중년 남자- 벨메일 역시 그들을 쏘아본다. 그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두 사람은 조금 늦었군.”
“새벽에 갑작스러운 소집이라니 너무하잖아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새벽이었을 텐데.”
“…정말 할 말 없게 만드는 아빠라니까?”
마지막 말은 발라르에게 말한 것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벨메일에게 충분히 전해질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다 들린다, 어서 앉기나 해. 다들 미안하오, 내 딸이 조금 개념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하하.”
“발라르, 자네도 얼른 앉게.”
발라르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그의 이름이 적혀져 있는 자리에 착석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영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벨메일은 이내 그에게 눈을 떼곤 본론을 꺼냈다.
“오늘 우리가 모인 이유를 아는 사람도, 아직 모르는 사람도 있을 거요. 일단 다들 영상을 보고, 그다음에 시작하는 걸로 하지.”
가운데 놓인 홀로그램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한다. 영상이 끝났을 때, 회의장 안의 사람들은 ‘충격’에 빠져 있었다. 이미 영상을 접했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 대체 저들은 누구입니까? 혹시 우리 낙원이 비밀리에 양성한 초능력자 부대라든가, 뭐 그런 겁니까?”
상업 지구의 큰 손, 김다정의 물음에 벨메일은 고개를 저었다.
“애석하게도 그런 건 아니요.”
제복을 걸친 낙원 방위 사령관, 황승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희 군부에서는 저런 이들을 길러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가 저들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소. 저들이 걸치고 있는 무기도, 저들이 사용하고 있는 힘에 대해서도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지.”
“그런데, 저렇게 많은 숫자가 접근할 때까지, 우리 낙원에 근접해서 무력을 사용할 때까지 우리가 몰랐다는 게 말이 돼요?”
티나는 별 뜻 없이 던진 물음이었으나, 황승준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의 말이 낙원의 방위를 담당하는 자신을 힐책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들이 나타날 당시, 우리 군부의 레이더는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저들은… 마치 유령처럼 허공에서 나타난 셈입니다.”
“그게 말이 되나요?”
“…아가씨, 애초에 운석도 자유자재로 떨어트릴 수 있는 이들입니다. 저들이 입은 슈트에 투명화 기능이 달려있다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는 말입니다.”
이 세계에서는 완벽한 ‘투명화’ 기술이 개발됐다. 그러나 개발된 것과, 그것을 소형화하여 실용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다. 투명화 기능이 달린 파워 슈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켜보던 벨메일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티나. 이건 내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다. 황승준 사령관에 대한 모욕을 관둬라. 사령관, 사과드리오.”
“아이고, 아닙니다.”
티나는 탐탁잖았지만 황승준에게 순순히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요, 제 말에 오해가 있었나 봐요.”
사과를 받고자 한 말은 아니었던 그는 멋쩍게 웃었다. 둘 사이의 해프닝이 어느 정도 마무리 지어지자, 벨메일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운석을 떨어트렸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을 결코 좋게 볼 수 없다고 생각하오.”
“그들이 종말을 떨어트렸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십니까?”
김다정의 물음에 사람들이 술렁거린다. 종말, 세상을 멸망시킨 끔찍한 운석. 만약 그들이 종말을 떨어트린 것이라면, 그들은 필연적으로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운석의 크기와 종류는 다르지만, 무조건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물음에 대답을 한 건 발라르였다. 노벨 과학상을 수상한, 천재 과학자 민현기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분명 종말은 비상식적이었지. 나를 포함해 한때 국립 과학 천문부에서 일했던 과학자들은 모두 다 알고 있을 거요.”
과학자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 중 몇몇은 국립 과학 천문부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었고, 때문에 그의 말대로 종말이 ‘비상식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 종말은 지구에 부딪힐 만한 궤도가 아니었소. 하지만 마치 ‘누군가’가 개입된 것처럼 갑자기 궤도를 틀었지. 만약 그 누군가가 저 남자라면, 저들이라면 설명이 가능하겠군.”
“그렇다면 저들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글쎄… 그걸 알아보고 저들에 대한 대응을 결정하려고 오늘 회의를 개최한 것이겠지.”
“역시 우리를 노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굳이 우리 주변에 나타났다는 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같은 인간이 돼서, 우리를 왜…”
“어쩌면 종교적인, 그런 이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박상환 목사의 말에 사람들은 이해를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구원교 또라이들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은 충분한데…”
회의장 안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종교’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정신 나가게 만들 수 있는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한때 그들은 감염자뿐만 아니라 사이비 종교 역시 상대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내 생각은… 우리는 그들을 받아들이면 안 될 것 같소.”
“제 생각 역시 동일합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지. 해서 나는 그들을 이 낙원에 받아들일지 말지를- 물론 어디까지나 그들이 원한다는 가정하에- 투표로 결정하려고 하오.”
“투표 말입니까?”
벨메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 낙원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다. 발라르 역시 깊게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투표할 시간이 다가왔다.
“1번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2번은 그들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
사람들은 테이블 위의 홀로그램 스크린에 떠오른 투표란에 투표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 사이로 벨메일의 말이 늘어졌다.
“나는 여러분의 선택을 믿겠소.”
***
나는 그룹원들과 함께 도시 곳곳을 샅샅이 훑었다. 도시에선 좀비들이 쉴 새 없이 튀어나왔지만… 좀비들은 그리 강력한 적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상대하면 상대할수록 그들에 대한 ‘경험’ 역시 늘어나니, 상대하기가 더욱더 수월해졌다. 도시 내에 좀비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쌓여가던 그때, 나는 발견할 수 있었다.
“생존자?”
맨홀 뚜껑을 열고 바깥으로 나온, 누더기를 걸친 동양인 사내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기야, 뭐, 생존자가 있다 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었다.
‘낙원’으로 추정되는 곳이 이곳에서 멀지 않기도 했고.
“저는 시궁창 연합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한국어였다. 뭐, 광고판을 보고 한국어를 사용할 거라 짐작하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들으니 조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끔뻑끔뻑거리며 우리를 바라보더니 이내 떨떠름한 웃음을 지으며 물어왔다.
“당신들은 낙원 소속입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디 소속…?”
그의 얼굴이 불안감으로 물든다. 통찰안을 사용한 나는, 그에게 말했다.
“글쎄요, 일단은 당신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통찰안의 3단계 시련을 아직 통과하지 못한 나는 남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지만, 통찰안을 사용하면 그 자체로 위압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는 새파래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좀비가 아닌 인간. 그에게 이 세계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따, 따라오십시오. 우리 시궁창 연합은 안쪽에 있습니다.”
“이 많은 인원이 저기로 들어가라는 겁니까?”
강순철의 황당한 듯한 물음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음,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소리도 있지 않습니까? 제가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예, 리더,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그럼 우리는 여기서 대기한다!”
그룹원들은 익숙한 듯 바리케이드들을 설치하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경악한 표정을 짓던 남자는 정신을 차린 듯 나를 맨홀 안쪽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맨홀 아래는 어두웠고 썩은 내로 가득했다. 오물과, 도시에서 흔히 맡았던 시체 썩은 내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곳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시궁창 연합의 생존자 수는 얼마나 됩니까?”
“대략 백 명 정도 됩니다.”
“이 도시에 있는 생존자 숫자는 그게 전부입니까?”
“아닙니다. 낙원에는 우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생존자들이 있고… 도시에도 우리와 같은 생존자들이 숨어 살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곧 우리는 수로 문 앞에 도착했다. 나는 문 건너편에 있는 여자를 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누더기를 걸친 그녀는 나를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쳐다봤다.
“누구야?”
“손님이다.”
그의 말에, 그녀는 한동안 나를 쏘아보다가 문을 열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사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미로와 같은 지하수로 속을 헤치고 마침내 도착한 곳은 지하철역이었다. 철로 위의 차량들. 그 속에서 느껴지는 생명들. 손짓하는 사내를 따라 그들에게 다가간다.
그때, 남자가 내게 총을 겨눴다. 그리고 조용하게 말했다.
“손 들어.”
나는 쓴웃음을 흘리며 그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손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