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파밍 랜드(Farming Land), 드넓게 펼쳐져 있는 농경지에서는 황금의 물결이 일고 있다. 수확 시기가 머지않은 듯, 고개를 숙인 벼에는 오동통하게 쌀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벼 사이로 메뚜기들이 펄쩍펄쩍 뛰어다닌다. 아니, 단순히 메뚜기들뿐만이 아니라, 작은 날갯짓 소리와 함께 날아다니는 잠자리들의 모습도 쉽게 엿볼 수 있었다.
그때였다. 하늘에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길쭉한 새 한 마리가 잠자리를 낚아챘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맑은 하늘엔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다. 정확한 명칭은 모르지만, 종류는 다양했다.
개 중에는 지구의 생물이 아닌 생물들도 존재했다.
이 세상이 코인 채굴기로 변하며, 인간은 변이체로 변이되고, 나머지 생명체들은 소멸됐다. 저 곤충과 새들은 블랙마켓에서 구매한 우주 생물들이었다.
듣기로는 농사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농작물의 품질을 올려준다나, 뭐라나. 물론 ‘벌레’라는 점 때문에 여성 그룹원들의 경우에는 질색하기도 했지만···
바라보던 나는 시선을 돌려 나를 향해 다가오는, 밀짚모자를 눌러쓴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쓰고 있던 밀짚모자를 벗고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리더.”
그의 정체는 한때 농사꾼들의 리더이자, 지금은 파밍 랜드 전체를 총괄하는 총책임자가 된 김희승이었다. 나 역시 짤막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화답하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희승 씨. 이게 얼마 만이죠?”
“저번 물자 수송 때 뵌 이후로 정확히 삼 개월 만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하기야, 굳이 내가 관여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돌아가고 있으니, 찾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딱히 농사나 작물에 관련된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자주 찾아봬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리더 바쁘신 거 뻔히 아는데. 그래도 자주 뵙고 싶은 마음에 괜히 아쉬운 소리 좀 해봤습니다.”
“흐, 조만간 업무 때문이 아니라 술 한잔하러 찾아뵙겠습니다.”
어차피 조만간 들를 일이 있었다. 지난번에 약속했던 대로, 미란과 전망대에 데이트···가 아니라 함께 놀러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때 겸사겸사해서 그를 만나면 될 것이다.
‘미란이 싫어하려나?’
뭐, 아무렴 상관없었다. 사귀는 사이인 것도 아니고, 뭐 어때?
“언제든 환영입니다. 일단 들어가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전망대로 들어갔다. 웨이타오 전망대. 웨이타오 전 주석과 지하오란이 합작해 세웠다는 이 전망대는 그룹원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바로 전망대 밑이 호텔이었기 때문이다. 무려 일천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만원이라고 했다. 이용하려면 한 달에서 두 달 남짓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었지.
물론 우리가 가는 곳은 일반 호텔이 아니었다. 띠링, 종소리와 함께 64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나는 망설임 없이 64층으로 발을 내디뎠다. 먼저, 나를 맞은 건 해태상이었다.
평범한 해태상은 아니었는지,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해태상을 감상했습니다. 30분 동안 모든 능력치가 0.5 상승합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왜 해태일까 생각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머물고 있는 건물에서도 해태상을 봤던 걸 떠올려보면 그냥 단순히 웨이타오의 취향 때문인 듯했다.
‘이 양반도 참 해태를 좋아한단 말이지.’
김희승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온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건축물을 연상케 만드는 화려한 욕조와, 가구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다. 그리고 창문 앞에 펼쳐져 있는 전경···
64층과 65층은 오로지 웨이타오가 인정한 이들만 대여할 수 있다는 펜트하우스였다. 이야기는 많이 전해 들었지만, 정작 대여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혜연이 했던 ‘파라다이스 속 파라다이스’라는 표현이 확실히 이해가 가는 순간이다.
‘앞으로 가끔은 빌려야겠어.’
펜트하우스 내부에는 이미 선객이 존재했다. 거구의 흑인 남자는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두 분 이야기 나누시지요.”
김희승이 먼저 자리를 뜬다.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드.”
그의 정체는 제이드였다. 그는 나를 반갑게 맞았다.
“진서.”
“많이 기다렸나?”
“아냐, 나도 조금 전에 도착했어.”
간단하게 서로의 안부를 물은 우리는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화성 상황은 좀 어때?”
화성으로 이동한 예런 일리아티와 약 5,000명가량의 미국인들은 화성을 테라포밍하는 데 성공했고, ‘미합중국 화성 연방’을 건립했다. 세 달 전, 제이드로부터 전해 들었던 내용이었다.
“뭐, 여전히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수정구를 꺼냈다. 수정구에 불이 켜지고, 곧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영상 안에 담긴 풍경은 화성의 풍경이었다.
울퉁불퉁한 표면 위에 지구의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건축물은 그럴싸하지만, 촬영된 사람들의 표정은 어둡다. 영상으로 봐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몸은 수척했다.
마치 제대로 먹지 못한 사람처럼···
“저번에 보낸 물자는?”
제이드는 나를 찾아와 물자 지원을 요청했고, 나는 어디까지나 ‘인도적 차원’에서 물자 지원에 동의했다.
내가 예런 일리아티와 악연이 있는 건 맞지만, 그와 함께 이동한 미국인들에게까지 악연이 있는 건 아니니 말이다. 게다가··· 이쪽의 물자가 남아돌아서 버리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고.
“예런 일리아티가 철저하게 물자로 통제하고 있다더군.”
인상을 찡그리며 말하는 그에게 나는 쓴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구호 목적으로 보낸 물자를 사람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쓰고 있다? 이런 건 어디 독재 국가- 가령, 북한에서나 들어봤던 이야기 아닌가?
“사람들이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둬?”
“화성에서 예런 일리아티는 우리 지구와 통신이 가능한 유일한 인간이다. 그리고··· 애초에 화성 이주 계획을 세운 것도 그이니, 사람들이 그에게 의지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해.”
“마음에 안 드는데? 그냥 물자 보내지 말까?”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제이드를 이곳, 웨이타오 전망대에서 만난 건 아니다. 굳이 이곳에서 만난 건 다름 아닌, 화성으로 보낼 물자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듣자 듣자 하니, 괘씸하기 짝이 없다. 누굴 호구로 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을 굶게 놔둘 수도 없지.”
“쯧,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일단은··· 보내는 걸로 하지.”
“항상 신세만 지고, 미안하다. 방법만 찾는다면···”
그의 눈에 살기가 감돈다. 나는 그가 아직, 복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제이드가 화성으로 이동하는 날, 예런 일리아티의 독재도 그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나스타샤가 우주 전함을 제조한다고 했었지.’
아니, 굳이 우주 전함이 아니라도 그녀에게 전폭적으로 기프트를 투자한다면 우주 왕복선을 만드는 것쯤은 손쉬운 일이리라.
물론 당장 급한 건 아니니, 조금 나중으로 미뤄도 되겠지만 말이다.
***
지구와 수천 광년 떨어진, 행성, Z-975.
행성 면적의 약 70% 이상이 늪지대로 이루어진 행성. 거주민의 대부분은 늪지 생물이며, 그중에서도 피라미드의 최상층에 오른 생물은 리자드다.
리자드. 인간과 도마뱀이 섞인, 반인반수의 생물. 리자드의 종류는 다양하다. 우주 전체로 확장하면 그 개체의 종류는 수백 가지를 넘을 정도다.
하지만 이곳 Z-975에 거주하는 리자드는 그런 종류 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수 있는 ‘그론 리자드’들이었다. 개체 하나하나가 다른 종류의 왕들과 맞먹는다는 전설의 종족.
늪지대에서 그들의 전투력은 전 우주를 통틀어서도 상위권 안에 들 정도였다. ‘컴퍼니’ 역시 그들을 인정하기에 나름 대등한 조건으로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Z-975는 지금 유례없는 침략을 당했다. 이전에도 침입자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우주 전체를 떠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우주 상인 등··· 행성을 방문했던 방문자들 중에선 나쁜 마음을 품는 이들도 존재했다.
물론 그들은 크론 리저드들에 의해서 죄다 늪지대에 파묻히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 침입자는 달랐다. 숫자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단 한 명. 인간의 외양을 한 단 한 명의 남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남자는 강했다.
크론 리저드 수천 마리가 일제히 달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늪지대에 흔적도 없이 파묻힌 건 남자가 아닌 크론 리저드들이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개체들조차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남자는 굳이 그들을 쫓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벌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붙잡고, 죽일 수 있는 벌레. 그리고 그 벌레는 앞으로 그를 위해 기프트를 벌어들일 노동자이기도 했다.
남자는 늪을 걸으며, 중얼거린다.
“나와라. 도마뱀이여.”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늪 위로 불쑥 거대한 도마뱀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 크기는 드래곤과 비교해도 더 거대할 정도다. 도마뱀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본다.
- 발라르, 네놈이 감히···
발라르라 불린 남자가 입을 열었다.
“크론, 두 가지 선택권을 주지. 나를 위해 일하거나, 아니면 죽거나.”
크론이라 불린 도마뱀은 그를 비웃었다.
- 웃기지 마라, 풋내기. 나는 네놈이 이 차원으로 넘어오기 훨씬 전부터, 이 행성이 탄생했을 때부터 존재했던 존재다. 나는 네놈이 상대했던 풋내기 신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녀의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크론 리저드라는 종족명이 붙여진 데는 그들이 모두 같은 리저드 ‘크론’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 행성이 생겨날 때부터 존재했던 존재를 단순한 리저드라 부를 수 있을까?
크론이라 불린 그녀는 리저드의 여왕이자, 살아있는 리저드의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만약 그녀가 다른 행성에서 태어났다면 진즉 신이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
아니, 그녀의 힘은 신의 그것을 초월했다. 늪지대에서 강해지는 리저드의 특성상, 행성 면적의 70% 이상이 늪지대로 이루어진 이곳은 그녀의 홈그라운드였으니 말이다.
“어디 한번 확인해보도록 하지.”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린 남자- 발라르는 그의 품 안에서 총을 꺼냈다.
- 그깟 인간의 무기 따위가 내 몸에 상처를 입힐 수 있을 성싶으냐?
하지만 그녀는 곧 생각을 수정해야만 했다. 평범한 총이 아니다. 총의 탄환에 담긴 힘은 그의 신력이었다. 하기야, 그 발라르가 사용하는데 평범한 총일 리가 없다.
탄환은 손쉽게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물론 초월적인 회복력을 가진 그녀는 상처를 순식간에 회복해버렸지만 말이다.
- 네놈은 늪지대에서 싸운 걸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늪지대가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행성 그 자체다. 행성에 있는 늪지대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은 그녀에게 부여된 권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