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스마트폰으로 날짜를 확인했다. 2024년 1월 17일, 월요일. 2023년 1월 17일에 이 세상이 코인 채굴기로 변했으니, 오늘이 정확히 일 년째 되는 날인 셈이다.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허공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스테이킹(Staking) 이자가 지급됐습니다.]
일 년이 지나, 스테이킹 이자가 지급됐다는 시스템 메시지였다. 보유 기프트량을 확인한다.
[보유 기프트 : 8,654,445,798.8(933,172,996.8)
스테이킹되어 있던 6억 4천 5백만 개의 기프트가 약 9억 3천 3백만 개로 불어났다. 즉, 이번 스테이킹 연이자(45%)를 받아 대략 3억 개 정도 불어난 셈이다.
3억 기프트. 분명 적지 않은 양이지만 내가 지금 보유하고 있는 기프트가 86억 기프트를 넘어 거의 87억 기프트에 육박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 많은 양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어차피 2년 락업이라 빼지도 못하고.’
락업 기간 동안은 어차피 스테이킹한 기프트를 빼지 못한다. 이제 일 년이 흘렀으니, 남은 락업 기간은 일 년인 셈.
물론 그렇다고 내게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 저 기프트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일 년 후에 9억 3천 3백만 개의 기프트는 13억 5천만 개의 기프트로 불어날 테니 말이다.
‘차라리 그럴 바엔 한 10년 정도 박아두면···’
이자는 복리 적용된다. 45%씩 10년이면··· 계산상으로 41배. 360억 기프트로 불어나는 셈이다. 이후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20년이면 아예 행성 수백 개를 사버리는 것도 가능하겠네.’
20년이면 단순 계산상으로는 1조 기프트가 훌쩍 넘어간다. X-347과 같은 행성을 수백 단위로 구매할 수 있는 금액이다. 그 행성들에서 전부 기프트 채굴을 한다고 가정한다면···
못해도 한 시간당 수억에서 수십억 기프트가 들어오는 셈이다.
‘건물주가 되는 셈인가?’
[불가능합니다. 해당 상품에서 지급할 수 있는 기프트는 엄연한 그 한계가 존재합니다. 다만··· 다른 종류의 상품들은 구매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율은 다르겠지만.]
‘다른 이율의 상품들이라··· 내가 구매할 수 있나?’
[플레이어 시스템과 직접 계약을 맺은 분들께 제공되는 상품입니다.]
한마디로, 직접 계약을 맺은 나 역시 이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또한 직접 계약을 맺은 분들은 단순히 스테이킹뿐만 아니라 투자 역시 가능합니다.]
‘그건 알아.’
정민혁의 블랙마켓 스킬을 통해 만난 우주 상인들이 내게 투자를 권했기에,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우주 역시 지구의 투자 상품처럼 온갖 투자 상품이 있었다.
특정 화폐 가치에 대한 투자 상품, 미공개 행성의 잠재력에 대한 투자 상품··· 심지어는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투자 상품이 존재하는 등 그 종류는 무척이나 다양했다.
심지어 단순 투자뿐만 아니라 레버리지 투자 역시 가능했다. 레버리지 투자, 다른 이름으론 마진 투자라 불리기도 하는 투자.
‘돈 겁나 날려 먹었었는데···’
적은 금액으로 큰 금액을 투자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몹시 매력적이었기에, 나 역시 마진에 조금 손을 댔었다. 뭐, 그 결과는··· 전부 청산이었지만 말이다. 이후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지금도 할 생각은 없지만.’
내 상황이 그때처럼 절박한 것도 아니고, 굳이 리스크를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레버리지 투자는 패가망신의 지름길입니다. 레버리지 투자로 인해 파산당해, 빚까지 진 초월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빚을 지면 어떻게 되는데?’
[노동을 통해 빚을 갚으면 합니다.]
‘참··· 이야기는 쉽게 하네? 어떤 노동?’
[플레이어, 이진서는 이미 봤을 겁니다. 신, 혹은 그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들의 부름에 응하는 존재들을.]
메시지는 계속 이어진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가진 힘만큼이나, 프라이드 역시 대단한 그들이 고작 일개 플레이어들의 부름에 순순히 응한다는 것이.]
생각해보니 그렇다. 스킬로 소환된다지만, 그들은 틀림없는 ‘진짜’들이었다.
‘이프리트나 뭐, 그런 존재들을 말하는 거야?’
[맞습니다.]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프리트, 그 고고하기 짝이 없는 불의 정령왕이 사실은 나와 같은 빚쟁이 신세였다니···
시스템이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지만,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것 역시 사실이었다.
[물론 소환되는 대부분의 경우는 그들의 분신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본체 역시 때때로 플레이어들의 부름을 받아 소환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너희 회사도 참 악질이네. 어떤 회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들의 영혼을 영령전이라는 곳에 가둬서 희망 고문을 하며 부려 먹질 않나, 빚을 진 초월자들과 노예 계약을 맺어 그들의 분신들까지 만들어 부려 먹질 않나···
그야말로 악질 그 자체다. 한편으로는 플레이어 시스템을 만들어낸 회사의 스케일을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스케일이 장난이 아니다.
초월자들을 무슨 노동자 착취하듯이 부려 먹는 저 회사는 대체 어떤 회사란 말인가. 아니, 내가 생각하는 그 회사가 맞긴 한 걸까?
[저희 회사는 언제나 극한의 효율만을 추구할 뿐입니다.]
‘만약 나도 빚을 졌는데 못 갚을 상황이 된다면···’
[괜찮습니다. 최근 올라온 평가 보고서에 의하면, 플레이어, 이진서의 가치가 크게 상승했습니다. 설령 빚을 갚지 못한다 하더라도 ‘협조’만 잘해준다면 충분히 상환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리겠지만 말입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칭찬이라 여길 수 있는 말이었지만 별로 기쁘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따가 상품 목록이나 보여줘.’
[확인했습니다.]
‘이따가’라고 말한 이유는 누군가의 존재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에 다가갔다. 빌딩 벽들이 태양 빛에 반사돼 내 눈을 간지럽힌다. 지상으로 시선을 돌리자···
날개 달린 여자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룹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몰린다. 그녀가 단순히 이제원에 필적할 정도로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자의 정체가 인간이 다름 아닌, 초월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룹원들은 그녀를 그리 경계하진 않았다. 그녀가 이 하늘 요새로 들어오는 것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퀸(Queen).’
한때 나와 악연(惡緣)이 있기도 했던 변이체 연합의 수장이었다. 그녀가 이곳에 온 배경을 설명하자면··· 인도의 변이체들을 소탕한 이후, 그녀는 우리의 산하로 들어오길 바랐다.
사실 말이 산하지, 살려달라고 간청한 셈이었다.
- 형님, 변이체가 산하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 그래, 한번 재고(再考)해보게.
정민혁과 박승기를 비롯한 간부들이 날 말렸지만, 나는 강행하여 변이체 연합을 산하 세력으로 받아들였다. 딱히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내 변덕에 불과했다.
‘뭐, 영감님이 많은 영향을 준 건 사실이지만···’
장영하의 사례가 알게 모르게 당시의 선택에 영향을 끼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네 달이 흐른 지금, 난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인간과 변이체는 충분히 공존 가능했고, 우리는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생각하는 사이, 그녀가 내 건물 앞까지 도달했다. 나는 코트를 걸치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진혜연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면 영락없는 사람이나 다름없을 정도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간 후 퀸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왔습니까?”
무표정한 그녀의 입에서 미성이 흘러나왔다.
“예.”
“올라가서 이야기 나누시죠. 혜연이 너도 올 거면 오고.”
진혜연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변이체 연합은 처음의 규모에 비하면 그 규모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인드라와 함께 적잖은 숫자의 간부들 탈퇴한 이후에도 몇몇이 더 탈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퀸은 깨달았다. 지금의 규모로 이진서를 적대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깝다는 것을. 애초에 적대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녀는 그 역(易)의 경우도 염두에 뒀다.
만약 이진서가 적대한다면 그들로서는 막아낼 방법이 전무하다. 어떻게든,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던 그녀는 이진서에게 종속 제의를 건넸고 그는 그 제의를 자비로이 받아들였다.
그 결과 변이체 연합은 존속할 수 있게 됐다. 이후에는··· 교류의 문이 열렸다.
변이체 연합의 변이체들은 원한다면 인간의 물품들을 구할 수 있었고, 그 대가로 노동력을 제공했다. 변이체들의 특수 기술들은 인간들에게도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지원자에 한해서, 인간이 되는 길도 열렸다. 이미 적잖은 변이체들이 인간이 되는 길을 택했고, 그들은 인간들의 세상에서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군신(君臣)의 예를 갖추기 위함을 명목으로, 매주 하늘 요새를 방문했다. 원 목적은 인간들을 감시하는 것이었지만··· 최근에는 그 목적이 변질되고 있었다.
‘인간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그렇게 느끼게 만든 것이 저 귀엽게 생긴 인간 소녀 때문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도움을 받아 원하는 대로 마음껏 인간의 문물을 누릴 수 있었던 그녀였다.
그리고 네 달이 흐른 지금, 그녀는 그 문물에 제법 익숙해졌다. 하늘 요새를 찾을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것은 단순한 반사 반응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얼마나 체류하려 합니까?”
이진서의 물음에, 생각에 잠겨있던 퀸은 얼른 입을 열었다.
“이틀입니다.”
“알겠습니다. 간부진들에게 그렇게 전해놓을게요. 이곳에 머무는 동안, 무엇이든 즐겨도 좋습니다.”
그녀는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입꼬리가 실룩거리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언니, 웃는 거예요?”
“아니.”
그녀는 입꼬리를 얼른 원상태로 만들었지만, 진혜연은 다 안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제야 퀸도 멋쩍게 웃었다. 미워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퀸은 그렇게 인간의 문물을 좋아하면서 인간이 될 생각은 없는 겁니까?”
이진서는 잠시 생각했다. 인간이 된다는 표현보다는 인간으로 돌아온다는 표현이 정확한 것 아닐까 하고 말이다.
“저는 변이체 연합의 리더예요.”
그녀는 완곡한 거절의 의사를 드러냈으나, 마음 한편으로는 상상하고 있었다. 인간이 된 그녀의 모습을 말이다.
‘그리 나쁘지는 않을지도···’
이진서는 엷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이 아니라 언젠가를 말하는 겁니다.”
“언젠가는···”
다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언젠가··· 변이체 연합도 사라질 것이다. 점점 인간이 되는 길을 선택하는 변이체들도 많아지고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그들 중엔 초월체도 있었다.
그때가 된다면, 그녀 역시 미련 없이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선택이 무조건 인간이 된다는 선택지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