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나를 향해 눈을 흘기던 옐레나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중에는 네가 통찰안이라 부르는 ‘신의 눈’의 사용자들도 많았지. 가령 용족의 왕, 아틸라든가, 대현자 갈락시아라든가, 혹은 고대의 대현자, 레오니아 3세라든가 하는 인물들 말이야. 하지만 난 영령전에서 그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어.”
“그들이 통찰안의 망령이 됐다는 말씀이십니까?”
“글쎄, 그건 아무도 모르지. 사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나와 다르게 그들이 사신들의 제안을 ‘고결하게’ 거절했는지도 모르고. 뭐, 그럴 확률은 적겠지만… 어쨌거나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그 눈은 위험하다는 거야. 그 강대한 존재들조차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춰버릴 만큼.”
사실 난 통찰안의 안에 망령들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껏 내가 치른 통찰안의 시련에서 상대한 이들이 바로 그 망령들이었으니 말이다.
뭐, 망령‘들’이라고 말하기엔 둘밖에 없지만.
반년 전 치렀던 첫 번째 시련은 그녀가 말하기도 한 ‘네크로맨서 황제’ 레오니아 3세를 상대했고, 2개월 전에 치렀던 두 번째 시련은 ‘전설의 대마도사’ 연을 상대했다.
그들은- 워낙 자긍심이 대단해서 자신들의 업적을 떠벌려대기도 했지만- 하나같이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나도 운이 따라줘서 그들을 이길 수 있었지, 만약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패배했을 것이다. 패배한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상상하기는 싫었다.
‘그들이 첫 번째, 두 번째 시련의 상대였다는 건 세 번째, 네 번째 시련에는 더 괴물도 있다는 거겠지.’
다시 생각하면, 그런 괴물들조차 통찰안의 내부에 저항하지 못하고 갇혀 있다는 것이다. 어쩌다 갇혔는지는 몰라도 나 역시 언젠가는 같은 운명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짤막하게 고개를 숙였다.
“경고, 감사합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는 냅킨으로 입을 훑었다. 그러는 사이,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환각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볼게요.”
김하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재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어떻게 보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그녀는 다가올 후폭풍을 감당하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잘 먹었어. 나도 제자 놈이랑 도서관이나 가야겠네.”
옐레나 역시 개다리춤을 멈추고 멍하니 서 있던 연병수와 사라졌다. 나는 냅킨으로 입을 훑고는 슬그머니 미란을 바라봤다.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온다.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이 천천히 열린다.
“무슨…”
“혹시 기억합니까?”
아직도 그녀가 환각에 취해 이상한 모습으로 이상한 말을 하고 있던 모습이 뇌리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자존심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녀가 그런 자신의 행적을 기억해낸다면…
모르긴 몰라도 수치사할 것이 분명했다.
“아뇨, 무슨 기억이요…? 아무것도 기억 안 나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음식 먹은 이후부터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르는 게 약이다. 단순히 그녀뿐 아니라, 이 만찬장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부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
시간은 다시 흘러, 2023년의 마지막 날이 됐다. 12월 31일. 크리스마스 축제를 크게 했기에 딱히 축제를 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해돋이를 보기 위해 하늘 요새는 사모아 섬으로 이동했다.
나는 몰랐지만, 사모아는 세계에서 가장 해가 일찍 뜨는 나라라고 했다.
물론… 이미 사모아 섬은 지난 우기(雨期) 때 해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건 비단 사모아 섬뿐만 아니라 다른 섬들 역시 매한가지였다.
우리가 사모아로 이동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옛 사모아 섬이 있던 자리로 이동했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거기서 해돋이를 볼 수 있었다.
떠오르는 태양을 보다 보니 문득 과거 생각이 떠오른다. 마지막 봤던 해돋이가 언제더라. 10년 전쯤이었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함께 봤으니 아마 그쯤 됐을 것이다.
‘진서야, 꼭 대학에 붙을 거야.’
아직도 어머니- 이순옥 여사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그 뒤로 10년, 대학생을 앞둔 나이에서 30을 앞둔 나이가 됐다. 태양을 감상하던 나는 입에 담배를 물었다.
“오빠, 금연하겠다면서요.”
이제원과 손을 잡고 있던 진혜연이 대번에 태클을 걸어온다.
“내가 언제.”
사실 금연 결심이야 매년 했다. 전에는 건강을 위해서, 코인 투자에 실패한 이후에는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서. 물론 결심만 했다. 어느새 담배를 손에 쥐고 있는 나를 발견할 뿐이었다.
언제부턴가는 끊을 생각을 아예 접었다. 물론 지금은…
“몸에 나쁜 것도 아니잖아.”
오히려 몸에 좋은데 끊을 이유가 없다.
이 담배는 평범한 담배가 아니다. 일전에 내가 피던 드워프 수제 담배보다 좋은 전설 등급 담배로 필 때마다 정신을 맑게 해주고, 일정 확률로 능력치까지 상승시켜준다.
피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면 저도 피워도 돼요?”
“…못 들은 걸로 할게. 그러고 보니 너는 이제 고등학생인가?”
“원래대로라면 그렇죠. 열일곱이니까.”
그러고 보니 진혜연의 얼굴에서도 앳된 티가 사라지고, 몸매도 제법 성숙해졌다. 새삼스럽게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역시 성장기라 특히 변화가 도드라지는 모양이다.
“늙었네.”
“헐, 열일곱이 늙었다고 말하는 서른이 있다?”
담뱃불을 끄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진혜연의 머리를 헝클어트린 나는 몸을 돌렸다.
“난 먼저 간다.”
“마저 해돋이 안 봐요? 오빠는 어디 가는데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슬며시 팔목에 찬 시계를 들었다. 내가 보유한 행성으로 이동하는 포탈 시계였다.
“일해야지.”
“저도 따라갈래요.”
“안 돼, 나중에 와.”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굳이 떼를 쓰진 않았다.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포탈을 열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포탈 내부로 발을 내디뎠다. 또 다른 태양이 나를 맞이한다.
X-347, 내가 구매한 동화 세계의 행성. 물론 엄밀히 말하면 구매한 것이 아니라 지구와 유사한 행성을 구매 후에 환경에 맞춰 개조한 것이지만 말이다.
- 현재 등급/잠재력 : E/E
- 소유주 : 이진서
- 플레이어 숫자 : 764
- 기프트 매장량 : 954,642,454
- 기프트 채굴량 : 1,442,586/h
X-347 행성은 꽤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플레이어 시스템과 직접 계약을 맺은 이후, 기프트 계약을 통해 나는 X-347의 거주민들과 간접 계약- 플레이어 계약을 맺었다.
플레이어로 각성한 그들은 X-347에 매장된 기프트를 채굴할 수 있게 됐다. 나름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5:5의 비율로 기프트를 분배하게 됐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행성에서 채굴되는 기프트의 절반- 140만의 절반인 70만 기프트가 시간마다 내 손아귀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물론 X-347에 매장된 기프트는 한정돼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E급 행성에 매장된 기프트는 고작 10억 정도라 했다.
행성을 구매할 때 들었던 비용을 떠올리면 명백한 손해인 셈. 그러나 나는 생각보다 간단하게 이 방법을 해결했다. 나는 X-347 행성을 걷기 시작했다.
용과 거인들이 전쟁을 벌이던 숲에는 광활한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파밍 랜드의 농사꾼들이 투입해 일군 밭이다.
밭에서는 엄청난 양의 작물이 생산되고 있고, 이 작물들은 전부 이 세계의 거주민들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애초에 우리 그룹은 파밍 랜드에서 생산되는 작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생각하던 나는 아우리엘의 날개를 펼쳤다. 지금부터 내가 갈 곳은, 걸어서 가기에는 멀었기 때문이다. 하늘을 활공하며 지상을 내려다보자, 고대의 거인들과 인간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구의 인간들이 아닌 이 세계에 숨어 살던 인간들이다. 그들은 나를 바라보고는, 느닷없이 절을 하기 시작했다. 뭐, 저들은 나를 ‘신’ 같은 존재라 생각하기에 새삼스럽진 않았다.
그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 나는 계속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가 도착한 곳은 바다. 정확히 말하면 바다에 세워져 있는 해상 기지였다.
해상 기지 위에 심어져 있는 나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스피커에 대고 입을 열었다.
“들어갑니다.”
그러자, 스피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들어와요.
입구가 열리고, 나는 내부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후 ‘종’ 마크가 그려져 있는 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빠른 속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띵.
종소리와 함께 마침내 도착한 곳은 이 해상 기지의 지하, 일명 ‘레비아탄 연구실’이었다. 원래는 지구에 있었지만, X-347로 옮겼다.
그 이유라 한다면 역시 레비아탄의 이동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왔어요?”
연구실 안에선 생체 안드로이드 로봇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보아하니 직전까지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쓱 한번 훑던 나는 짤막하게 인사 후,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슬그머니 창문을 통해 바라본다. 거대한 생물체가 온몸에 쇠사슬이 묶인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레비아탄이다.
“뭐, 어떻냐고 묻는다면 항상… 똑같아요. 녀석은 탈출하고 싶어 하고, 우리는 그런 녀석에게서 기프트를 뜯어내고 있죠.”
나는 레비아탄을 통해 부족한 행성의 기프트 매장량을 늘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했고, 그 추측은 맞았다.
레비아탄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X-347의 기프트 매장량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이유에 대해 의아해하던 내게 아나스타샤는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 녀석이 낳은 새끼들이 자연적으로 죽는다 해도 그 기프트는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보존돼요. 한마디로 행성의 매장량이 늘어나는 셈이죠.
그녀는 몇 가지 기구와 약물을 통해 레비아탄을 ‘착취’하는 방법을 만들어냈다.
그 방법을 들은 라우라는 비인도적이라면서 질색했지만- 한때 카르텔이었던 그녀가 할 말인가 싶긴 했다- 나는 허락했다. 어느 정도의 희생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 X-347의 매장량은 매일 채굴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늘어나고 있었다. 오늘로 90일째다.
“그나저나 새해부터 무슨 일이에요?”
“뭐, 잘 있나 확인할 겸 겸사겸사 왔습니다. 뭐 필요한 건 없습니까?”
“아, 연구해보고 싶은 게 생겼어요.”
“무슨…?”
“우주선.”
“우주선 말입니까?”
“제 스킬을 통해 우주 전함에 대한 힌트를 얻어냈거든요.”
“우주 전함이라… 듣기만 해도 기프트가 꽤 많이 깨지겠네요.”
노틸러스들을 만드는 데 들었던 비용보다 더 많이 들었으면 들었지, 덜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많이 깨지진 않아요. 부품 문제는 고철 나무를 통해서 어느 정도 충당이 되고 있기도 하고.”
아까 해상 기지 위에 심겨 있던 나무가 고철 나무인 듯했다.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