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그제야 ‘변이체 연합’의 간부들은 잠시 망각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인간들을 적대한다는 것은, 이진서만 상대하는 것이 아닌, 그가 이끄는 인간들 전부를 상대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그리고 그가 이끄는 인간들 중에는 그와 마찬가지의 ‘괴물’들 역시 섞여 있다는 것을…
“다들 겁쟁이인가? 저 정도야 희생을 감수한다면… 충분히 처치할 수 있다.”
다른 간부들을 선동하는 인드라의 말에 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저런 인간이 얼마나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
“퀸, 너는 인간이 두려운가?”
“아니, 두렵지 않다. 그저 현실적인 가능성을 말하는 거다. 이제 곧 저들은 요새 안으로 들어간다, 인드라여. 인간의 역사를 공부했다니, 수성보다 공성이 불리하다는 건 잘 알고 있겠군.”
영상 너머로 수송기들은 하나둘씩, 하늘 요새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저런 요새 따위는…”
인드라는 말을 흐렸다. 그도 공성 측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저 요새는… 그가 본 인간들의 역사 속에 나오는 ‘평범한’ 요새가 아니다.
하늘 요새. 하늘에 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비행 능력을 가지지 않은 초월체는 공성 능력을 상실한다. 즉, 그가 보유한 전력의 절반 이상이 공성에는 쓸모없어진다는 것이다.
고작 절반도 안 되는 전력으로 공성을 한다? 안에는 저런 괴물이 득실거리는데? 그 피해가 얼마나 될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차라리 유인책을 사용하면 어떨까?”
잠자코 듣고 있던 사일런스 라미아가 의견을 제시했다.
“수성이 유리한 건 어디까지나 요새 안이잖아? 요새 밖으로 유인한 뒤, 죽여 버리면 그만이야.”
“인간들을 너무 바보 취급하는 거 아닌가? 저들은 바보가 아니다. 저들도 우리를 의심하고, 평화 조약을 깰 생각을 하고 있을 거고, 언제든 우리의 뒤통수를 치려하고 있겠지.”
바벨란트가 말했고, 퀸은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드라의 말이 이어졌다.
“그걸 알면서도 너는 우리가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가?”
“기회는 다시 올 것이다. 초조해하지 말아라, 인드라.”
“참으로 안일한 소리구나. 이따위 어리석은 소꿉장난은 그만두겠다. 어차피 너희는 약소국의 영주들이 아닌가. 기회를 노리는 건,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
인드라는 쾅! 앞에 있는 테이블을 친다. 얼음 파편들이 하늘에 흩날리며 우수수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퀸의 싸늘한 경고가 이어졌다.
북풍한설(北風寒雪)처럼 차가운 냉기가 대전 안에 감돈다. 당장에라도 맞붙을 것 같은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
“허튼짓 하지 마라.”
“오늘부로 나는 변이체 연합에서 탈퇴하겠다. 생각이 있는 자들은 나를 따라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로 향했다. 퀸은 그를 제지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상황을 지켜봤다. 망설이는 낯빛을 하던 간부들이 하나둘씩 그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남은 숫자는 일곱, 그를 따라간 숫자도 일곱. 즉, 변이체 연합의 절반이 사라진 것이다. 아니, 인드라가 이끄는 세력을 생각하면 실질적인 전력은 훨씬 더 많이 빠졌다고 봐야 한다.
“어쩔 거야, 퀸?”
“당신이라면 이런 상황에도 방도가 있겠죠?”
바벨란트와 사일런스 라미아의 물음에, 퀸은 어깨를 으쓱인다.
“방도라… 먼저 인간들에게 전해야겠지. 우리들 중 일부가 변이체 연합을 탈퇴했다고. 불가침 지역도 새롭게 갱신해야 할 것이다.”
“배신하겠다는 거야?”
바벨란트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배신? 배신은 저들이 먼저 한 것 아닌가. 그리고…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선, 저들과 우리가 별개의 존재임을 미리 말해둘 필요성이 있다. 단지, 그뿐이다.”
“……”
간부들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이곳에 남은 이상, 그들은 퀸의 뜻에 따르겠다고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
“우와아아!”
우리가 수송기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를 기다리던 그룹원들이 환호를 질렀다. 강순철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본래의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와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들을 지나쳐 도시에 들어선다. 강순철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못 보던 얼굴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아, 며칠 전에 미국인들이 합류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우리 그룹에 미국인들이 합류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미국인들이요? 하지만 그들은 예런 일리아티가…”
“아까 못한 얘기들이 많습니다. 들어가면 이야기 나누시죠.”
이야기를 하려면 동화 세계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짧지 않은 내용이지만 시간이야 많으니, 천천히 풀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주상 복합 센터 빌딩에 들어서자마자…
장영하가 허겁지겁 나를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그가 갑작스럽게 나를 찾을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마 ‘변이체 연합’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내 추측은 맞았다.
“변이체 연합에서 변이체 일부가 탈퇴했다고 하네. 아니, 일부보다는 상당수라는 표현이 어울리겠지만 말일세.”
“혹시 그들이 탈퇴한 목적이…”
“우리 하늘 요새를 공격할 목적이라고 하네. 아마 이 기회를 놓치기 싫었던 모양이지. 물론 자세한 내용은 ‘저쪽’도 잘 모른다고 했지만… 탈퇴한 변이체의 명단은 넘겨받았네.”
“꼬리 자르기일지도 모르겠군요.”
“이유야 어쨌건, 일단 막아내야 하지 않겠나.”
“대비를 해야겠군요.”
“힘든 싸움이 될 거야. 어쩌면 레비아탄과의 전투보다도 훨씬… 인드라라는 인도의 지배자가 그 명단에 껴있더군.”
그 인도의 지배자인 만큼, 평범한 초월체와는 궤를 달리할 것이다. 어쩌면 레비아탄보다 강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뭐,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 레비아탄보다 강력한 초월체라니. 어쨌거나… 염두에 둬서 나쁠 것은 없으리라.
“일단… 민혁이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겠습니다.”
“나도 나름의 준비를 할 예정이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정민혁을 만나 이야기를 전했고, 그로부터 정확히 삼십 분 후, 하늘 요새는 비상 상황에 돌입했다.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강순철은 그룹원들을 이끌기 위해 이동했다.
그에게 미안함을 표하자, 강순철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지금은 비상 상황 아닙니까.”
말은 안했지만, 내심 감동을 받았다.
“나중에 꼭 성대하게 연회를 열도록 하겠습니다.”
“연회는 됐고, 리더는 그저 지금처럼 우리를 지켜주십쇼.”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아우리엘의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아직 하늘 요새에 들어오지 못한 수송선들을 엄호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변이체라면 틀림없이 외부에 있는 이들부터 먼저 노릴 테니 말이다.
‘레비아탄을 노릴지도 모르겠군.’
나는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레비아탄을 떠올렸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바리케이드를 설치해두긴 했지만, 초월체 수백이라면 얼마 버티지도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레비아탄이 그들의 손에 넘어가게 둘 순 없었다.
***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밀실 한가운데에서 한 남자가 쇠사슬에 칭칭 묶여있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예런 일리아티, 정확히 말하면 지구에 남은 그의 ‘분신’이었다.
그의 앞에는 흑인 남자가 서 있다. 그를 바라보던 예런 일리아티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제이드, 이런다고 해서 얻어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얻어질 것이라…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한데. 복수의 성공 아닌가. 아마 대리어스, 내 아버지도 천상에서 기뻐하고 계실 거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제이드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그가 붙잡고 있는 ‘인질’들 때문이다.
“너는… 오천 명의 미국인들이 죽어도 괜찮다는 거냐? 오천 명의 미국인들을 먼저 생각해라.”
“미안하지만, 예런, 그건 그들의 선택이었잖아? 그리고… 이번엔 내가 물어보지. 오천 명을 살리겠다고, 일만 명을 죽게 만들 생각인가?”
“……”
“당신은 그저… 화성 개척이라는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오천 명을 이용한 것일 뿐이다. 더러운 위선자 같으니.”
“이유야 어쨌건, 저대로 놔둔다면 오천 명의 미국인들은 죽는단 말이다.”
“돌아올 연료도 있다면서?”
“그건…”
“분명 지난 통신에서 화성에 있는 당신의 분신은 이야기했었지. 지구로 돌아올 만한 분량의 연료는 남아있다면서 말이야. 그렇다면… 오천 명을 이끌고, 지구로 다시 돌아오면 될 노릇이다. 네 왕국보다 이진서의 쉘터가 훨씬 살기 좋을 테니, 오히려 당신에게도, 그들에게도 잘된 일 아닌가?”
“지구에 미래는 없다고 말했을 텐데. …제이드, 벌써 3주째다. 이대로 아무런 물자도 전송하지 않는다면… ‘나’는 플랜 C를 실행에 옮길 거다.”
“플랜 C?”
“Cut Back.”
“인원 감축?”
“오천 명이나 되는 인원은 지나치게 많지. 입을 줄이지 않는다면, 척박한 화성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거다.”
“뭐라도 있나 했더니 결국엔 또 협박질인가. 부끄럽지도 않은가, 당신은? 이제 보니 당신은 기업인이 아니라, 할렘가의 싸구려 삼류 양아치에 더 어울리는군.”
“마음대로 생각해라.”
“식량과 필요한 물자들을 보내주지. 하지만 이번에는 분명히 메시지를 보내라. 이게 마지막이라고. 앞으로는 보낼 생각이 없으니,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지구로 돌아오라고 말이야.”
잠시 망설였지만, 어차피 예런 일리아티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물자를 확보하는 것이, ‘그’의 과업이었으니 말이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바깥으로 나온 제이드는 입에 담배를 물며 생각했다.
“정말…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지난 한 달간, 그가 한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예런 일리아티를 돕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가 오천 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붙잡고 있다곤 해도…
이래서는 그의 의도대로 움직인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기뻐하시기는커녕 꾸짖기만 하시겠군.”
이래서는 볼 면목이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대리어스가 만약 자신의 상황이었더라면, 그는 분명 예런 일리아티를 도왔으리라는 것을. 그는 무엇보다 미국인들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했던 이였으니 말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이내 결론을 내렸다.
‘어떻게든 오천 명을 구해야 한다.’
화성에서 죽게 둘 생각은 없었다. 지구로 다시 데려와야 한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과업이 되리라.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위로 초월체들 수십이 모습을 드러낸 건 다음 순간이었다.
“……!”
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지만, 이내 능숙하게 검을 꺼냈다. 초월체들의 포화가 일제히 그에게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