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일단 다들 진정하심이…”
내가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두 영령은 기어코 서로 격돌했다. 카론이 들고 있던 ‘폭식의 대검’과 아자르가 들고 있던 ‘폭풍 검’이 거칠게 부딪친다.
그 충격이 작지 않은 듯, 둘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러나 이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그들은 서로를 향해 도약하듯 달려들더니 또다시 검을 부딪쳤다.
이 모든 것이 고작 0.1초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일어난 일. 만약 내가 통찰안과 시간 가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들의 잔상밖에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그들은 빨랐다.
- 흐흐, 검성 나으리도 별거 아니군.
- 우쭐대지 마라, 방탕 기사여.
그리고 그 투지 역시 대단했다.
‘……’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자르가 이기지 않을까 예상했다. 카론을 저평가하는 건 아니었지만, 아자르는 상급의 영령인데다, 무려 ‘검성’이라는 칭호의 보유자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내 착각에 불과했다. 막상 전투가 시작되니, 둘 사이엔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누가 이긴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용호상박(龍虎相搏)이었던 것이다.
뭐, 사실 엄밀히 말해, 내 입장에선… 정말 누가 이긴들 상관이 없었다. 지금의 내 상황은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것도 모자라서, 서로 싸우기까지 하다니. 물론 그들의 전투는 현실에는 조금의 영향도 끼치지 못했지만…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영령 빙의를 처음 가졌을 때 우려했던 일이 ‘지금’ 벌어지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확실한 건…’
영령 빙의를 사용해 그들의 힘을 빌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는 것이다. 그들의 전투의 승자가 정해질 때쯤엔, 레비아탄은 기력을 모두 회복할 것이 틀림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이대로 녀석에게 시간을 줄 수는 없었다.
비록 영령 빙의를 사용하지 않아 만전의 상태라 할 순 없지만… 다행히 아직, 마인화가 종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체력’과 ‘마력’은 말 그대로 넘쳐흐르는 상태였다.
들어 올린 엘론을 그대로 수직으로 낙하한다. 극한의 발도술. 순간적으로 공간 그 자체가 일렁이더니, 레비아탄의 동체가 베여나갔다.
그러나 부족했다. 레비아탄은 거대했고, 녀석은 잠시 주춤했을 뿐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고작 한 번의 발도술로 녀석을 어떻게 해볼 생각은 없었다.
사실 지금의 내 발도술은 녀석의 몸에 갇힌 ‘존재’를 빼내기 위해서였다. 녀석의 상처 사이로거대한 화염의 손이 등장한다. 곧 화염의 손은 녀석의 상처를 헤집으며 벌리기 시작했다.
레비아탄이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튼다. 나는 곧 벌어진 상처 사이로 몸을 내민, 화염 거인을 볼 수 있었다. 레비아탄의 입에 삼켜졌던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다.
영락없이 소멸된 줄 알았던 그가, 사실은 레비아탄의 몸속에서 생존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생존은 나도 방금 알아차린 사실이었다.
물론 그의 상태는 어딜 보나, 정상이라 말하긴 힘들었다.
그나마 그의 손이 가장 정상이라 말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손가락 두어 개가 날아간 상태였으니 그의 몸 상태에 대해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감히 저주받은 괴물 주제에 내게 이런 수모를…
하지만 이프리트는 잔뜩 분노해있었다. 꽤 거리가 있음에도, 여기까지 그의 분노가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하기야, 그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를 향해 짤막하게 중얼거린다.
“어째, 마력이라도 빌려드릴까요?
- 설마… 나보고 직접 계약이라도 맺자는 거냐?
사실 직접 계약을 맺자는 의미는 아니었으나, 그가 곡해(曲解)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
“싫습니까?”
- ……
그는 침묵한다. 아마 마음속으로 줄타기를 하는 모양이다.
“아. 싫으면 안 맺어도 되고.”
- 내가 네놈 수작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면…
“아까 보니까, 어둠의 정령왕인가 뭔가 하는 친구도 있던데… 차라리 그 친구하고 계약을 맺는 건…”
- 맺겠다.
속으로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그가 화내면서 공격할 것까지 각오하며 어둠의 정령왕, 알폰소를 언급했던 것이었는데 그가 정말 넘어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 이유야 어찌 됐건 잘된 일이다. 이내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프리트의 말대로 직접 계약을 맺는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아마도… ‘스킬’이 없더라도 그의 소환이 가능해진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기프트 계약을 통해 기프트를 지불하면 그를 소환할 수 있긴 하지만, 그냥 소환할 수 있다면 아무쪼록 그게 더 좋은 것 아니겠는가?
‘라우라는 아마도 알폰소와 직접 계약을 맺었겠지.’
그녀가 신화 등급 스킬을 구매했거나 얻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으니, 아마 사실일 것이다.
- 하지만 내가 허락했다고 한들, 네놈 따위가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으냐?
“글쎄, 그렇게… 어려우려나?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자신감을 넘어, 오만하기까지 한 내 말에 이프리트는 고개를 찡그린다.
분명 그를 소환한다는 것은 ‘부담’이 가는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불의 정령왕이니까. 그 본체는 무려 한 세계를 지배했고, 지금도 지배하고 있는 강자니까.
일례로 라우라는 이프리트를 소환할 때마다 종종 온몸이 박살 나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마인화 상태.
- 흥, 후회하게 될 거다.
“그 말은…”
- 맺지, 직접 계약. 영광으로 알거라. 네놈은 무려 5,000년 만에 직접 계약을 맺는 존재니까.
“5,000년? 그게 사실입니까?”
다시 생각해보면, 그 정도로 그가 지금 진노(眞怒)해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 하지만 기뻐하지 마라, 나와 계약을 맺는 순간부터 네놈의 운명은… 불길 위를 걸어가는 것이나 다름없게 변할 테니 말이다.
“그런 건 애초에 두렵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이미 신을 소환한 적이 있다. 비록 동화 세계에서지만, 나는 실제로 그녀를 소환했다. 그녀는 과거의 채굴자를 압도할 정도의 강대한 신이었다.
신도 소환하는 마당에, 정령왕을 소환 못 할까. 내 이런 생각이 전해진 듯, 이프리트는 또다시 인상을 찡그렸지만, 그것은 길지 않았다. 다음 순간,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통찰안이 자연스럽게 정보를 수집한다.
<계약진 – 염화지옥(炎火地獄)>
계약진을 향해 내 마력이 점차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확실히 이프리트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듯 그 마력 소모량은 대단했다. 하지만 마력 소모량이야 어쨌건, 아무 상관 없었다.
지금 내 마력은 ‘무한’이었으니 말이다. 쭉쭉, 마치 내 한계를 시험하겠다는 듯 힘차게 내 마력을 빨아들이던 계약진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다 먹었다, 이거냐?’
만약 내가 마인화를 사용한 상태가 아니라면, 틀림없이 마력이 바닥났을 것이 틀림없었다.
다음 순간, 내 손등에 타오르는 듯한 느낌과 함께 붉은색의, ‘창을 들고 있는 거인’ 문신이 새겨졌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만약 플레이어 시스템으로 표현하자면,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소환(G)을 습득했습니다.]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을 거라고 말이다.
- 계약자라고 해서 상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 건방지게 굴지 말아라. 나를 진노케 하면, 네놈은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릴 것이다.
‘아니, 그건 댁이나…’
뭐, 아무쪼록 계약은 완료된 모양이었다. 더 이상 레비아탄에게 소화당해 피폐한 거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내 마력이 쭉쭉 빨려 들어갔다.
‘저런 걸 보고 거대 모기라고 하는 건가?’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하던 내게 이프리트가 날카롭게 물어왔다.
- 거대 모기? 그게 뭐지?
‘칭찬입니다, 칭찬.’
대충 얼버무린 나는 이프리트의 모습을 보며 새삼스럽게 혀를 내둘렀다. 라우라가 소환했을 때와, 일전에 내가 소환했을 때와는 ‘격’이 달랐다. 비유나 과장이 아니라, 정말 사실이었다.
단순히 두루뭉술한 거인의 생김새가 아니다. 반인반조. 붉은 갑주를 걸친 거대한 거인의 몸에는 깃털이 가득했다. 피닉스와 이프리트가 합쳐지면 저런 모양새일까 생각이 들었다.
혹시 원래는 서로 한 몸이었던 건 아닐까?
- 그럴 만도 하지, 저건 분신이 아니다. 정령계에 있는 진짜 ‘본체’란 말이다. 원래대로라면 본체를 소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잠시 네 마력을 빌려 나타난 거다.
내게 다가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온몸이 새하얀 영령의 말에 나는 무심코 그녀의 이름을 내뱉었다.
“옐레나님?”
얼굴이 있는 건 아니지만,
- 그래, 오랜만? 인가? 그쪽 시간으로는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다행히 그녀는 카론과 아자르처럼 싸움을 하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히죽거렸다.
- 거대한 마력이 모이면, 반드시 기적이 벌어지는 법이지. 가령, 마력 폭풍 속에 빨려 들어가 단체로 과거로 이동한다든가 하는…
“잠깐 사이에 머리가 어떻게 되신…”
- …뭐라고?
이프리트를 대하다 보니, 애꿎은 옐레나에게도 무심코 실수를 저질렀다. 내 입이 방정이지.
“건 아닌 것 같고…”
- 뭐, 사실은 저 바보들 싸움을 구경하러 나왔는데… 우연치 않게 좋은 구경을 하게 됐구나.
나는 카론과 아자르를 바라봤다. 그들 역시 전투를 멈춘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검을 맞대기 시작했다. 무심코 주변을 둘러본 나는 깨달았다.
몰려든 영령이 그들뿐만이 아니라는 걸.
마도사, 벨루가, 거인족 영웅, 간츠… 지금껏 내가 빙의했던 영령들은 물론, 빙의한 적 없었던 영령들까지 몽땅 몰려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시선을 받은 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손을 흔들거나, 미소를 짓는 긍정적인 반응부터 고개를 돌려버리거나, 왠지 모르지만 욕설을 날리는 등의 부정적인 반응까지.
- 저기서 쓸 만한 놈들의 얼굴을 미리 익혀둬라. 언젠가는 도움이 될 테니까.
“예, 감사합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프리트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바다. 온통 물이 가득한, 불에 있어서는 한없이 상극(相剋)인 지역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 상관 없다는 걸 증명하듯, 바다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갈라진다기보다는 ‘증발한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바다를 두 쪽으로 갈라버린 이프리트는 손을 들었다. 붉은 태양이 밝게 빛나더니, 그의 손에 창이 생성됐다. 화염의 창.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 창은 위험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