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트랜스폼’ 기능을 사용하자, 노틸러스 1호가 거대한 로봇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흡사 어린 시절, 봤던 파워 레인저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런 장면이었다.
잠시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 조종석에 앉아주시길 바랍니다.
노틸러스의 말을 듣고, 천천히 조종석에 다가가 앉았다. 앉자마자 철컥,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온몸에 고정 장치가 채워졌다. 그와 동시에, 마력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슬며시 고개를 돌려보니, 조종석과 연결된 마력 흡수 철사들이 힘차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살짝 오른손을 드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거대한 로봇이 오른손을 들었다.
이번엔 왼쪽 다리를 들어봤다. 그러자 거대한 로봇 역시 왼쪽 다리를 들었다. 내가 금세 적응할 수 있었을 정도로, 로봇의 조작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사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 높은 지력 덕분이었다. 로봇의 조작 방법에 대해 대략적으로 깨달은 나는 모니터를 바라봤다. 여전히 레비아탄의 새끼들이 들러붙어 있다.
나는 온몸을 털기 시작했다. 로봇 역시 온몸을 털기 시작한다.
탈탈탈, 레비아탄의 새끼들이 버티지 못하고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진다. 녀석들은 어떻게든 붙어있으려는 듯 끈질겼으나,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녀석들도 별다른 방도가 없는 듯 보였다.
- 레비아탄, 접근 중···!
노틸러스의 경고에 고개를 든다. 레비아탄이 정면에서 이쪽을 향해 돌진했다.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블링크를 사용할 수 있는 나와 다르게, 이 로봇은 블링크를 사용하지 못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버틴다. 이 로봇은 인간의 형태다. 즉, 인간의 기술 역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간의 기술 중에는 몇 배의 힘을 받아낼 수 있는 기술이 존재했다.
아니, 단순히 받아낼 뿐만 아니라 다시 돌려줄 수 있는 기술. 통찰안의 세계에서 터득했던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의 묘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생각을 마친, 내 몸이 움직였고, 로봇은 내 기대에 부응하며 움직였다. 드디어 레비아탄이 내 몸에 맞닿는다. 마치 정말 몸이 뒤로 밀려나듯, 충격이 전해진다.
끼이익, 로봇의 몸이 뒤로 밀려나며 지면에 거대한 구덩이가 팼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지면에 박혀있던 단단한 암석들이 한순간에 우수수 부서져 내린다. 그 정도로 레비아탄의 충돌이란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텨낸다.
지금 체내에 끓어 넘치는 마력이 충격을 완화하는 것을 도왔다.
몸은 더 이상 밀려나지 않았다. 노틸러스 1호의 덩치보다 못해도 수 배는 더 큰 레비아탄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소를 들었다는 천하장사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다.
압도적인 거력(巨力)에 전율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힘을 준다. 로봇 역시 힘을 준다. 레비아탄의 몸이 부들거리기 시작한다. 어떻게든 버티려고 용을 쓴다.
하지만 녀석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다. 나는 강력히 직감했다. 녀석의 힘 역시 많이 빠졌다는 것을 말이다. 하기야, 지금까지 녀석이 보여준 모습들을 생각하면···
언제 지친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번쩍. 녀석의 거구가 들린다. 얼마나 무게가 무거우면 로봇의 어깨가 주저앉을 정도였다. 그러나 버텨낸다.
그리고··· 강력하게 바닥에 패대기쳤다. 쾅! 지면의 지형이 통째로 변화할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나는, 재차 녀석을 다시 들어 올렸다. 고작 이번 한 번으로 그칠 생각은 없었다. 녀석은 더 이상 여럭이 없는지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다시 번쩍 들리고 말았다.
그 순간, 나는 볼 수 있었다. 레비아탄의 얼굴에 어린 선명한 공포를. 지금까지 베일에만 쌓여있던 녀석이지만, 약해져서 그런지 통찰안으로 녀석의 일부를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바닥에 그대로 녀석을 다시금 패대기친다. 쿵, 이번엔 아예 지진이라도 난 건지 진동이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지상에는 아마 거대한 해일이라도 몰려왔을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명확했다. 그로기 상태가 된 녀석을 완벽하게 마무리 짓는 것. 마치 내 생각에 부응하려는 것처럼 로봇이 최후의 병기를 꺼낸다.
병기의 정체는 검이었다. 물론 평범한 검이 아니었다.
나는 동화 세계 속에서 두 자루의 엘론을 손에 넣었다. 그중 한 자루는 플레이어 상점에서 구매한 엘론이고, 나머지 한 자루는 거인의 왕이 사용하던 것을 빼앗은 것이었다.
지금 로봇의 손에 들린 검은 바로 후자. 하지만 단순한 엘론이 아니다. 과학의 힘으로 개조했다. 그 결과, 신비와 과학이 합쳐진 엄청난 무기가 탄생했다.
당연히 기존의 엘론보다도 그 성능이 훨씬 향상됐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성능에 비례하듯 무게와 크기 역시 올라갔지만, 이 거대한 로봇이 들기에는 더없이 적합했다. 로봇이 들고 있는 엘론이 레비아탄의 머리통으로 향하려 하는 바로 그 순간···
Q가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레비아탄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어머니의 전언입니다.”
“어머니라면···”
Q가 어머니라 부를 만한 존재는 내가 알기론 하나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샤인가? 어째서 레비아탄을 죽여선 안 된다는 거지?”
“어머니는··· 레비아탄이 이 세계의 비밀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비밀이라··· 어떤···?”
“아직 확실하진 않습니다. 제가 전해 들은 말은 단편적이기 때문입니다. 레비아탄을 죽이지 못하게, 막아라. 어머니가 제게 내린 명령입니다.”
“그 말은··· 저놈을 생포하라는 뜻인가?”
그게 쉬울 리 없다. 애초에 녀석을 이 심해 위로 끌어올리는 것도,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Q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비밀일지도 모른다고 재차 강조했습니다.”
나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이 기회를 놓쳤다가, 만일 녀석의 생포에 실패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녀석이 도망치는 날에는 애꿎은 기프트만 날려버린 셈이 된다.
그 손실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게다가 강순철을 구한다는 목적도,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녀석을 죽이기엔 아나스타샤의 말이 걸렸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비밀···’
하기야,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녀석은 단순한 초월체가 아니니까. 여태껏 만난 초월체 중에 가장 독특한 존재. 심지어 녀석은 새끼를 낳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변이체가 새끼를 낳는다? 금시초문이다.
“녀석을 묶을 수 있는 방법이 있나?”
- 아쉽게도 노틸러스 1호는 포박 병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설마 녀석을 포박해야 할 상황에 직면할 거라고는, 나도, 김민수도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 물음은 노틸러스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곧, 허공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영겁과 굴레의 쇠사슬(G) - 6,000,000기프트]
<영겁과 굴레의 쇠사슬>
종류 : 사슬(Chain)
등급 : 신화(God)
옵션 : 용도에 따라 크기가 변화할 수 있다. 포박한 대상의 능력치 –99%, 포박에서 벗어났을 경우 또 다른 복제 쇠사슬이 생성(복제된 쇠사슬의 능력은 원본의 50%)
600만 기프트, 비싸다. 타나토스의 쇠사슬의 거의 수백 배에 달하는 가격, 저렴한 신화 등급 무구라면 네다섯 개 이상 구매할 수 있는 금액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망설임 없이 질렀다.
스킬 재사용 대기시간 하나 되돌리는데, 1억 기프트를 소모했는데 저 녀석을 묶는데 고작 600만 기프트밖에 필요하지 않다면 훨씬 남는 장사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스르르. 하늘에서 내려오는 쇠사슬.
얼핏 보기엔 사람이나 간신히 묶을 만큼 자그마하지만, 곧 레비아탄을 묶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해질 것이다. 시스템의 추천이 잘못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쇠사슬을 쥔 나는 블링크(Blink)를 사용해 바깥으로 나왔다. 내 몸에 붙어있다가 떨어져 나간 새끼들이 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물론 녀석들이 나를 따라올 수 있을 리 없었다.
순식간에 레비아탄의 앞까지 도달한 나는 쇠사슬을 던진다. 하지만 그 순간, 나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축 늘어져 있던 녀석의 몸이 갑자기 달려든 것이다.
‘이런···’
너무 안일했던 건가. 녀석의 몸에 맞은 노틸러스 1호가 그대로 붕괴됐다. 내가 조종석에 탑승해 있었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었겠지만 내가 없으니, 버티지 못한 것이다.
로봇이 파괴된 장면을 바라보던 나는 인상을 찡그리고는 바닥에 있는 엘론을 쥐었다. 나조차 들어 올리기 힘들 정도로 그 무게는 육중했다. 그러나 나는 ‘영령 빙의’를 사용했다.
[영령 빙의(L)를 사용합니다.]
내가 빙의할 대상은 정해져 있었다. 간츠. 간츠에 빙의해 거인화를 사용해 부족한 근력을 충당할 생각이었다. 그래, 어디까지나 원래대로라면 말이다.
그러나 떠오른 메시지를 본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랑기사, 카론’을 불러옵니다.]
[상급의 영령, ‘검성, 아자르’를 불러옵니다.]
두 명을 불러들였다는 메시지는 처음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거인족 영웅, 간츠가 아닌 방랑기사, 카론과 검성, 아자르. 두 영령이 부름에 응했다.
- 설마 여기서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 종말(終末)이자 폭식(暴食)의 마지막 파편인가. 드디어 복수할 기회다.
나는 깨달았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 역시 깨달았다.
- 검성, 나를 위해 양보해라.
- 흥, 폭식의 수하에게 양보하라고?
- 내가 언제부터 폭식의 수하였지? 이 대검은 그저···
아, 그러고 보니 카론이 들고 있는 대검의 이름이 ‘폭식의 대검’이었지.
그가 말하는 것을 보면 그의 살아생전 ‘과거’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자르는··· 자세한 스토리는 알지 못하지만 레비아탄을 향해 강력한 적개심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를 선택하지.’
- 녀석을 여기서 끝내야 한다. 저놈의 말에 홀리지 말고, 나에게 빙의해라.
- 아니, 너는 저놈을 생포할 생각이 아닌가? 검성은 너를 이용해 저놈에게, 폭식에게 복수할 생각이다.
“···저는 카론님의 말처럼 레비아탄을 죽일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자 아자르가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 안일하구나! 내 세상 역시 안일했다. 그리고 그 자그마한 안일의 대가는 너무나 잔인한 것이었지. 만약 내가 미네르바를 베지 않았다면 그 세상은 그때 멸망했을 터. 싹은 제거할 때, 확실하게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으나, 나는 이미 레비아탄을 살려두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하지만 구구절절하게 자신의 과거를 말하며 설명하는 그에게 쉽게 거절의 말을 말하기는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