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단순한 블러핑일 가능성이 높네. 솔직히 초월체들이 마치 인간처럼 힘을 합쳐 단체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나도 직접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진 도저히 믿기 힘드니 말일세. 하지만···”
장영하는 뒷말을 흐렸지만, 나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만에 하나, 진실일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이겠죠.”
“그래, 맞아.”
나는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그저 단순한 초월체의 경고일 뿐이라면 무시했을 것이다. 초월체 한 마리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레비아탄 급의 괴물이 아닌 이상엔 하늘 요새에 별 위협이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니, 설령 레비아탄 급의 괴물이라 하더라도 단일로는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옳다. ···하지만 초월체 여러 마리가 모여 만든 단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초월체는 경고를 하는 한편, 스스로가 ‘변이체 연합’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체에 소속돼있다고 밝혔다. 굳이 말을 한 걸 보면 그 목적은 아마 내게 경고의 위력을 더하기 위함일 것이다.
자신의 경고를 듣지 않을 시엔 연합 전체가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는··· 장영하의 말처럼 단순한 블러핑일 수도 있지만 진실일 경우에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만약 변이체 연합이 초월체 수천, 수만 마리가 소속된 거대 단체라면? 게다가 그중에 레비아탄 같은 녀석이 섞여 있지 말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물론 자네는 강하고, 하늘 요새 역시 외부의 침입을 막아내기에 탁월한 요새지만 다수의 초월체라면 충분히 변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네.”
아니, 변수 정도가 아니라 판 전체를 뒤집어엎고도 남을 수준이다.
“되고도 남죠. 아무리 저라 하더라도 수천을 상대하는 건 무리입니다.”
물론 지금의 나는 마인화(改)를 얻으며 한층 더 강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한 번에 상대할 수 있는 절대적인 숫자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이번에 얻은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시계’가 변수라면 변수가 될 수 있겠지만, 몇 번 사용해보지 않았기에 아직은 그 활용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우리는 지금 레비아탄과의 전투를 목전에 앞두고 있다. 아나스타샤가 말한, 강순철을 구할 골든타임까지는 대략 23일? 아니, 22일 정도를 남겨뒀을 뿐이다.
‘경고를 무시하기엔 부담이 크다.’
만약 레비아탄을 상대하러 갔을 때, 변이체 연합이 하늘 요새로 대규모 공습을 펼친다면, 이쪽으로서는 여간 곤란해지는 게 아니다.
변이체 연합을 상대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레비아탄과의 전투 이후로 미루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방법은 하나뿐이겠군.”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변이체 연합이 어떤 단체인지 알아볼 방법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바로 직접 부딪치는 것. 변이체 연합 안에 직접 들어가서 파악하는 것.
‘하지만 그 적임자는···’
슬며시 장영하의 눈을 바라본다. 그의 몸은 초월체다. 당연히, 변이체 연합에 사절로 가는 데 그 이상의 적임자가 있을 리 없다. 그는 내 의도를 짐작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영감님.”
아무리 그가 강력한 초월체라 하지만, 위험 부담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니, 더더욱 그랬다.
“아니야, 오히려 기쁘네. 나는 자네가 ‘저 변이체 노인네가 저쪽하고 붙어먹으면 어떨까’, 내심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까 걱정했거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한편으로는 뜨끔한 마음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면 뭐라고 전할까?”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전해주십쇼.”
“알겠네, 혹시라도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복수해주게.”
“예, 꼭 그러겠습니다.”
짤막하게 작별 인사를 마친 장영하는 망설임 없이 ‘용’으로 변신한 후, 날개를 펼쳤다. 곧 머리를 흩날리게 만들 정도의 강렬한 바람과 함께 그가 하늘로 비상(飛上)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변이체 연합’이라는 새로운 변수의 등장. 어쩌면 모든 것이 채굴자, 발라르의 계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설령 내 추측이 맞는다 한들, 장단에 어울려 줄 수밖에 없다. 아직은··· 적어도 아직은, 채굴자에 한없이 못 미칠 테니 말이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이 세상이 코인 채굴기로 변해 버린 지 벌써 반년째. 비극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됐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세계에 ‘완벽히’ 적응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풍요로운 생활’ 때문임은 두말해봐야 입 아픈 사실이다. 실제로 사람들의 생활은 오히려 과거보다 향상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5성급 호텔에 버금가는 주거 시설과, 고급 레스토랑의 요리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고품질의 요리가 매 끼니 제공된다.
매달 지급되는 기프트로, 원하는 물건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구매할 수 있다. 어쩌다 한 번씩 있는 노동도 딱히 강제성을 띠진 않았다.
뛰어난 AI 인공지능과, 작업용 안드로이드 로봇의 탄생 등으로 과거와 달리 그룹원들의 노동력이 그렇게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을 자원하는 이들은 합당한 대가- 기프트를 추가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일을 안 해도 놀고먹을 수 있는 지상 낙원(樂園)인 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가 유지될 수 있는 건 전부 다 이진서 때문이었다. 이진서가 없으면 언제 붕괴돼도 이상하지 않은 구조인 것이다. 그 사실을 사람들도 모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이진서가 동화 세계로 자리를 비웠을 때, 큰 혼란으로 이어졌던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물론 그가 돌아오며 혼란은 순식간에 불식(拂拭)됐지만 사람들은 마음 한편으로 불안해했다.
만약 이진서가 돌아오지 못했다면? 어디까지나 만약이지만 초월체들의 무시무시함을 잘 알고 있는 그룹원들로서는 꽤 가능성 높은 만약이었다.
실제로 최근, 이진서는 피투성이가 된 채 돌아오기도 했다.
“사람이란 게 참으로 간사한 동물이에요. 지금의 시스템이 잘못됐다는 걸 다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 먼저 지적하는 사람이 없죠. 그 이유가 뭔 줄 알아요? 지금의 시스템을 고칠까 봐 그런 거예요. 시스템을 고지면 지금 같은 부귀영화(富貴榮華)는 영영 누리지 못하거든. 근데 웃긴 일이야. 정작 ‘형님’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데.”
짧게 말을 끊은 정민혁은 다음 대사를 이어나갔다.
“물론··· 얌전히 침묵만 지키는 사람들은 그나마 양반이죠. 심지어 사람들을 ‘선동’하면서, 어떻게든 알량한 자신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그들을 부추기는 ‘쓰레기’들보다는 훨씬 나으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박영자 씨?”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 하는, 아니, 하시는 건지.”
정민혁의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건 5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아줌마. 바로 시흥에서 연병수와 함께 구출됐던, 박승기의 사촌 동생이자, 재력가의 아내였던 박영자였다.
처음 쉘터에 들어와서 플레이어들에게 핍박받은 날, 그녀는 그녀의 신세를 ‘명확하게’ 깨달았다.
저들처럼 플레이어로 각성하지 못하거나, 연병수처럼 엄청난 재능이라도 가지지 않은 이상 그녀는 이들에게 그저 한낱 기생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때문에 그녀의 고약한 성격도 역시 정도 잠잠해졌다. 허나,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차별이 금지되고, 생활이 안정되자 점차 다시 예전의 성격을 되찾기 시작했다.
박승기의 사촌 동생과 연병수와 잘 아는 사이라는 걸 과시하며, 사람들을 모았다. 물론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내막을 아는 사람들이었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애석하게도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비전투원이라 그녀에게 속아 넘어갔다.
게다가 그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과 매주 ‘종교’라는 명목으로 집회를 가지면서 그들에게 자신의 주장, 논리를 설파하곤 했다.
그들 역시 지금의 생활에 만족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함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마치 가려움을 긁어주는 듯한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즈, 증거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그녀는 여기서 그녀가 잘못을 시인한다면 끔찍한 일을 당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박영자 씨, 애초에 당신이 정말 무고했다면 증거 있냐는 말이 아니라, 안 했다는 말이 먼저 나왔겠죠.”
“그건 내, 내가 너무 당황해서···”
“그렇게 말 더듬는 것만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고··· 증거가 없었다면 애초에 이 자리에 부르지도 않았을 겁니다. AI? 그걸 단순히 사람들 말동무나 하라고 설치해놓은 줄 아십니까?”
정민혁은 슬슬 피로감을 느꼈다. 만약 그녀가 박승기의 사촌 동생이 아니었다면 그가 상대하고 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간단히 구원교의 교화소로 보내버리면 그만이니 말이다.
물론 구원교의 교화소에 간다면 정상적으로 나오긴 힘들 것이다. 그녀는 플레이어도 아닌, 일반인이니 말이다. 그래, 만약 그녀가 박승기의 사촌 동생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박승기가 그녀를 교화소에 보내버려도 된다고 말하긴 했지만 정민혁은 박승기조차 알지 못하는 그의 진의(眞意)를 알고 있었다. 팔은 괜히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닌 것이다.
하기야, 그가 생각해도 그렇다. 아무리 쓰레기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 하나 남은 혈족. 부귀영화까진 아니어도 적어도 무병장수(無病長壽)하길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이미 증거는 다 있어요. 지금이라도 인정하고, 모든 잘못을 시인한다면··· 적어도 목숨은 보장해드리겠습니다.”
“모, 목숨만?”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 역시 보장해드리죠. 다만 ‘당분간’ 사람들은 만나지 못하게 될 겁니다. 물론 박영자 씨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만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건···”
박영자는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그녀에게 딱히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면서 내심 그의 눈치를 보는 게, 자신이 어디로 가게 될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물론 그런다고 한들 정민혁이 알려줄 리 없었지만 말이다.
‘다른 행성으로 가게 된다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정민혁은 내심 그녀의 표정이 궁금해졌지만, 굳이 입을 열진 않았다. 그녀가 빠져나간 후, 그는 기다리고 있던 다음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다음 사람이란 다름 아닌 이진서.
“저 아줌마, 오랜만에 보네. 무슨 일 있었어?”
“별일 아닙니다.”
정민혁은 고개를 저었지만, 이진서는 그의 눈을 찬찬히 살피다가 피식 웃었다.
“역시 사람은 안 바뀌나 보네.”
그가 그의 생각을 읽었다는 걸 깨달은 정민혁은 그제야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죠?”
“뭐, 저번에 중국 애나 러시아 애처럼 직접 무력을 쓴 것도 아니고 떠들기만 한 거니까··· 뭐, 그렇게 심한 형벌을 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원래 선동가가 더 무서운 법입니다, 형님.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너한테는 말해두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말이다. ‘변이체 연합’에 관한 이야기다.”
이진서가 입을 열었고, 정민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변이체 연합?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