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북극은 그동안 금단의 지역이었다. 퀸(Queen)의 명령을 받은 초월체들은 인간들은 물론, 같은 변이체들의 침입조차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제이드라는 예외의 경우도 존재하긴 했지만, 그것은 특수한 상황에서 기인한, 말 그대로의 예외의 상황일 뿐이었다. 그런 북극에 한 어린아이가 발을 들였다.
고작 10살~11살이나 됐을까 짐작되는, 귀엽게 생긴 인간 아이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물론 조금만 생각하면 평범한 인간 아이가 아니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평범한 인간 아이가 맨발로 북극을 걷고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그의 접근을 알아차린 초월체들이 하나둘씩,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를 향해 적개심을 드러냈다.
“어디서 왔지?”
그러자 인간 아이가 입을 열었다.
“북극의 주인을 만나러 왔다.”
초월체들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말하는 북극의 주인이란 다름 아닌 ‘퀸’이다. 그들의 여왕은 대뜸 찾아와, 정체도 밝히지 않은 초월체가 만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여왕님은 네 놈이 만나고 싶다고 해서,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자 인간 아이는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글쎄, 내게 그 정도 자격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네놈이 뭔데?”
“쯧, 하찮은 것들아, 퀸에게 바벨란트가 찾아왔다고 전해라.”
초월체들은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바벨란트. 들어본 적 없지만,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태도를 보면 평범한 초월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던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퀸에게 텔레파시를 보내기 시작했다.
퀸의 능력 중 하나인 ‘단단한 결속’을 통해 그들은 먼 곳에 떨어져 있어도 서로 소통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퀸은 간결하게 한 마디를 말했다.
- ···정중히 모셔라.
“따라··· 오십시오.”
그들에게 퀸의 말은 절대적이었기에, 그들의 태도 역시 자연스럽게 정중해졌다.
“거봐, 그럴 거면서··· 쯧.”
인간 아이- 바벨란트는 그들을 비웃었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내 그들과 함께 퀸이 머물고있는 최심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음 궁전이 모습을 드러낸 건 대략 30분 뒤쯤이었다. 바벨란트는 생각했다.
‘궁전이라기에 기대했는데, 별 볼 일 없군.’
말이 궁전이지, 사실 궁전이라기보단 거대한 얼음덩어리를 ‘집’ 형태로 개조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는 궁전의 주인의 미적 센스가 영 별로라고 생각했다.
‘내 성과 비교하면···’
‘남극’에 존재하는 그의 성을 떠올린 그는 고개를 저었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다.
그는 속으로 궁전의 주인을 내리면서, 궁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궁전 안도 그 외관과 마찬가지로 간결했다. 장식물은 없고 고작해야 의자 몇 개가 전부다.
그중 상석에 궁전의 주인이 앉아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새하얀 여자였다. 마치 백옥과 같은 그녀의 백발을 감상하듯 바라보던 바벨란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녀는 그 존재만으로 초라한 궁전을 화려하게 만들고 있었다.
‘과연···’
그는 속으로 그녀- 퀸을 인정하면서, 짐짓 푸념을 내뱉었다.
“영, 미관이 별로군.”
“바벨란트, 인간 같은 소리를 하는군. 미관이 중요한가?”
“흥,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인간의 왕들이 괜히 건축물에 집착한 게 아니다. 진정한 왕이라면 모름지기 화려한 궁전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마치 나처럼 말이다.”
은연중에 그의 궁전 자랑까지 잊지 않은 그는 의자에 앉았다.
그와 동시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얼음들이 깎여나가더니 꽃을 만들고, 조각상을 만든다.
텅 비어있던 궁전 내부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제법 그럴듯한, 일반적인 궁전의 형상으로. 바벨란트는 퀸을 바라본다. 마치 칭찬을 갈구하듯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무표정한 대꾸만 이어질 뿐이었다.
“쓸데없는 짓을.”
순간적으로 울컥했으나, 바벨란트는 애써 담담한 어조를 유지하며 말했다.
“···그 고귀한 생김새와 달리 그 성격은 고귀하지 못하구나.”
“······”
퀸은 말없이 그를 바라본다. 잠시 이어지는 침묵. 바벨란트는 슬그머니 그녀의 눈을 피하곤, 입을 열었다.
“의미 없는 기세 싸움은 관두지. 그래서 오늘 나를 부른 이유는?”
퀸은 가볍게 손을 든다.
거대한 눈에 길쭉한 팔다리가 달린 괴상한 초월체가 안으로 들어왔다. 바벨란트는 그 징그러운 생김새에 질색하며, 행여나 그 길쭉한 팔다리가 닿기라도 할까 봐 몸을 움츠러트렸다.
“옵저버다.”
정확한 초월체의 명칭은 하이 옵저버(High Obeserver)였다.
“옵저버?”
“전투 능력은 별거 없지만··· 탐색 능력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처음 만났을 때, 특수 변이체였던 옵저버를 키운 건 다름 아닌 퀸이었다. 그만큼 퀸에 대한 충성심 역시 다른 변이체들보다 뛰어났다. 그녀는 옵저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눈이 갈라지더니, 강렬한 빛이 새어 나온다. 마치 영사기처럼 허공에 영상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인간 남자가 나와, 초월체들과 전투를 벌이는 단순한 내용의 영상이었다.
그러나 그 실체는···
‘어떻게···’
바벨란트는 입을 벌렸다.
인간은 강해도 너무 강했다.
초월체 수백 마리를 혼자 상대함에도 불구하고, 압도하고 학살하고 있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점점 강해지더니, 영상의 후반부쯤 가서는 아예 서너 마리를 일수(一手)에 죽이기까지 했다.
결국 수백 마리의 초월체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숫자로 따지면 살아간 초월체들이 더 많지만,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임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수백 마리의 초월체가··· 고작 인간 한 명에게···’
“뭐, 뭐냐?”
“지금으로부터 하루 전에 북태평양에서 관측된 영상이다.”
“북태평양이라면···”
이곳에서 멀지 않다. 바벨란트는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같은 동족을 씹어 먹으면서 지배자 자리에 오른 그지만, 영상 속의 인간 남자를 이길 자신은 없었다.
굳이 붙어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만약 남자가 궁전에 쳐들어오겠다고 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 정도로 인간 남자의 무력은 압도적이었다.
퀸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오늘 바벨란트, 너를 부른 건··· 이 남자에게 함께 대응할 ‘동맹’을 결성하기 위해서다.”
“동맹···이라고? 고작 인간 한 명에게 대응하기 위해?”
인간의 무력을 직접 두 눈으로 본 그였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기는 도저히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를 않았다.
“그래, 나는 이미 그 남자와 몇 번이고 전투를 벌였었지.”
사실 몇 번이라고 해봐야 실제로 마주친 건 세 번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그녀가 아직 중급 변이체일 때, 그리고 상급 변이체일 때, 마지막으로 특수 변이체 시절에.
심지어 특수 변이체 시절엔 직접적인 전투도 없었고, 도망친 게 전부다.
초월체가 된 이후에 복수할 생각이었지만··· 오히려 정신 차리고, 아예 한국에 기웃거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전부 남자- 이진서의 존재를 두려워해서다.
“그리고 일찍이 깨달았다. 이 세계는 우리를 위한 세계가 아니라는 걸.”
초월체들은 플레이어들을 한낱 먹잇감 정도로 치부했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이진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더욱더 확고해졌다.
초월체는 강했지만, 그는 더 강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그녀도 강해졌지만, 여전히 그를 상대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북극에 웅크리기로 했다. 그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살기로 했다.”
북극에서 조용히 세력을 모았다.
일찍이 초월체로 각성한 그녀가 세력을 모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세력을 모은다면 언젠가 그가 쳐들어온다 하더라도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은 그녀의 편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녀는 깨달았다. 시간 역시 그녀의 편이 아닌, 그의 편이라는 것을 말이다.
“내게는 참으로 불합리한 것이었다. 어째서··· 나에겐 그와 같은 힘이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 미약한 감정이 드러난다. 질투, 시기, 두려움···
“흥, 고작 인간 하나에게 겁을 집어먹은 꼴이라니···”
바벨란트는 코웃음 쳤지만, 그의 속내는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불합리하고··· 위험하다.’
퀸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바벨란트, 나는··· 그를 해코지할 생각이 없다. 나는 그저··· 내 동족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계의 다른 지배자들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바벨란트는 부정하지 않았다. 세상에 죽고 싶은 지성체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는 대신, 그는 다른 말을 꺼냈다.
“글쎄, 태평양의 지배자는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는··· 우리와 다르다. 규격 외의 존재.”
퀸 역시 드넓은 태평양의 지배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가장 거대한 자. 폭식(暴食)의 재림.
같은 초월체임에도 차원이 다른 존재감을 자랑하는 그. 그녀 역시 그와 몇 번 조우했었다. 태평양이라는 바다는 결국 북극과도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자존심은 상하지 않았다. 레비아탄(Leviatan)은 차원이 다른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의 협조를 얻는다면 좋겠지만, 그는 우리조차 한낱 먹이로 삼을 존재.”
“그건 나도 잘 안다고.”
바벨란트 역시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동맹에 참여하기로 한 지배자는 내가 전부인가?”
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이미 세 명의 지배자가 이곳을 왔다 갔다. 그리고··· 곧 한 명의 지배자가 추가로 올 것이다.”
자신이 네 번째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은 바벨란트는 툴툴거렸지만, 이내 의문을 드러냈다.
“마지막 지배자는 누구지?”
퀸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인드라, 인도의 지배자다.”
“···거물이 오시는군.”
인도의 인구는 많았다. 즉, 인도에 존재하는 초월체의 숫자는 다른 곳보다 월등히 많았다. 인드라는 그런 인도의 지배자였다. 족히 십만도 넘는 초월체의 ‘정점’에 오른 자.
엄밀히 말하면, 그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그런 거물이었다. 바벨란트는 그런 그가 다섯 번째라는데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 그 동맹이라는 게 결성되면 어떻게 할 거지?”
“먼저 그의 의사를 물어볼 거다. 두 세력끼리 맞붙는다면, 서로 간에 적지 않은 피해가 생길 터. 그 역시 망설일 수밖에 없겠지.”
“······”
바벨란트는 진심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여전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체면이 말이 아니군.’
인간과의 교섭 같은 게 이뤄질 리 없다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