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단 거 먹으면서 열 좀 식혀요.”
김하나가 아공간 창고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꺼냈다.
‘과일 샐러드인가…’
접시 안에 가지런히 담긴, 드레싱 소스에 범벅된 과일들. 그녀가 만든 샐러드는 먹어본 적 있지만 이런 과일 샐러드는 처음. 내가 동화 세계 안에 있는 동안 개발한 레시피인 모양이다.
<천상의 과일 샐러드(L)>
무려 전설 등급 요리인 만큼 그 맛은 보장돼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이미 냄새부터 기존의 과일 샐러드와는 그 격이 다르다. 나는 포크에 과일 한 조각을 집어 입 안에 넣었다.
달콤한 드레싱 소스의 맛과 과즙이 입안에 퍼진다.
[일시적으로 체력, 마력 회복 속도가 100% 빨라집니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맛있네.’
그냥 단순히 달콤한 맛이 아니다. 속으로 탄성을 지를 정도의, 그야말로 이름처럼 천상의 맛이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나는 그룹원들을 바라보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동화 세계’를 사용하게 된 배경을 얘기하는 것이 제일 먼저일 것이다.
“예런 일리아티는 함정을 파고 저를 기다렸습니다. 무려 미국인 일만 명이라는 사상 초유의 인질을 내걸고서.”
설마 자국민들을 그렇게 인질로 내걸 거라고는 나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동화 세계를 사용하셨던 거군요?”
안경을 고쳐 쓰는 서문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내가 동화 세계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일만 명은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 테니 말이다.
“오빠, 그럼 예런 일리아티는 어떻게 된 거야?”
이번엔 복잡한 얼굴을 한 라소미가 물어왔다. 그녀 입장에선 그럴 법도 하다. 그녀와 예런 일리아티는 제법- 그녀가 생각하기엔 꽤- 친분이 있었던 사이였으니 말이다.
“그건 모르겠네.”
분명 그는 스스로의 몸을 제물로 바쳐 새크리파이스 스킬을 사용했다. 그때 본 그는 틀림없이 죽었다. 하지만… 나는 어디선가 그가 살아있을 것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그는 화성에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채굴자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끔찍한 재앙으로 이어지겠지.’
우주선을 쏘아 올린 것만으로 지구 전체에 운석을 떨어트리는 재앙을 내렸다. 만약 지구를 탈출해서 화성까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재앙을 내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짧은 생각을 마친 나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동화 세계- 라그나로크 안에서 있었던 내용들을 대략적으로 간추려서 이야기했지만, 워낙 양이 방대해 족히 삼십 분은 걸렸다.
입을 벌린 채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들은 과거의 채굴자- 발라르를 만나, 전투를 벌였다는 지점에서는 탄식을 터뜨렸다.
“형님이 그러면 채굴자를 이기셨다는 겁니까?”
정민혁은 조금 달뜬 얼굴로 물었다.
지혜의 신, 미미르를 소환함으로써 어찌어찌 물리치긴 했지만, 이긴 것이라고 말하긴 힘들다. 애초에 미미르를 소환한 것부터 내 자의가 아닌 타의에 가까웠던 일이니 말이다.
그러나 어찌 됐건 물리친 것 자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운이 좋았다.”
“아무리 운이 좋아도 우리대로 따지면 신을 쓰러트리신 거 아닙니까? 역시 형님이십니다. 어쩌면 지금 싸워도…”
비행기 태워주는 건 기분 좋지만, 진실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서라, 내가 상대한 건 과거의 채굴자일 뿐이니까.”
그 말대로, 내가 상대한 것은 플레이어 시스템과 계약을 맺지 않았던 시점의 채굴자에 불과하다. 지금의 채굴자는 미미르와 같은 신격 여럿을 ‘살해’할 정도의 존재로 각성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그와 나의 격차는 그 정도로 많이 벌어져 있었다. 설령 지금의 몇 배로 강해진다 한들 과연 그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렇군요…”
들떴던 정민혁이 한결 가라앉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박승기가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그놈을 쓰러트려야 하는 거 아닌가?”
“나중 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일단은…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살아남는 걸 최우선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오빠, 그 세계는 어떻게 된 거예요?”
“그 세계? 아…”
진혜연의 물음에 나는 짤막하게 몇 시간 전의 일들을 회상(回想)하기 시작했다.
***
이 세계를 아예 매입해버리고 싶다는 내 물음에, 시스템은 침묵할 뿐이었다. 저 침묵은 긍정일까, 부정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침묵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내 물음을 못 알아들은 건 아닐 테고.”
[아닙니다, 정확히 알아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답장을 계속 보류하는 이유가 뭐지?”
[플레이어, 이진서의 답변이 의외였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는 기록된 세계일 뿐입니다. 설령 이 세계를 보존한다 한들, 현실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건 아니야.”
내가 이 세계를 구매하려는 데에는 ‘고통받는 세계’를 구원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도 있지만, 이 세계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도 있다. 지구에서는 얻기 힘든 칭호들.
내가 이곳에 머물며 얻은 칭호 숫자만 열 개가 넘고, 앞으로도 더 많은 칭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칭호는 비단 나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룹원들 역시 가능하다.
시스템은 아예 한술 더 떴다.
[물론 기프트의 힘을 빌리면 기록을 보존이 아닌, 아예 현실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과거의 기록을 아예 현실로 만들어버리겠단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지 의심이 솟았지만, 생각해보면 기실 시스템은 한 번도 허언을 한 적이 없다. 즉, 저 말 역시 사실일 확률이 높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충분한’ 양의 기프트가 있을 때를 전제로 하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다만… 그 과정에 들어가는 금액이 만만치 않은데 지불하시겠습니까?]
나는 슬쩍 보유 기프트량을 확인한다.
이 세계에서 펑펑 사용한다고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7억 남짓한 기프트가 남았다. 하지만 척 보기에도 고작 7억 정도로 구매할 수 없을 것임은 명확해 보였다.
만약 가능했다면 시스템이 저렇게 말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모자란 기프트를 채울 방법은 하나뿐이다. 외상. 즉, 대출을 받을 생각이었다. 생각을 마친 나는 입을 열었다.
“얼마까지 대출이 가능하지?”
[현재 플레이어, 이진서의 외상 기능 한도는… 50억 기프트입니다.]
50억 기프트. 생각보다 많은 액수에 놀랐다. 하기야, 그동안 VVIP 상점에서 사들인 것을 생각하면 50억 기프트가 넘는다 한들 이상할 것은 없었다.
“적진 않네. 50억 기프트로도 불가능한가?”
[기록된 세계를 보존하는 데는 10억 기프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현실로 구현하는 데는 50억 기프트가 필요합니다.]
50억 기프트면 딱 내가 빌릴 수 있는 금액이다.
“현실에 구현해줘.”
50억 기프트가 뭉텅이로 빠져나간다.
10% 할인이라도 받았다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10% 할인을 받지 못했다. 스테이킹된 기프트를 포함 13억 얼마던 잔고가 마이너스 36억 얼마로 변했다.
그동안 외상을 여러 번 받아왔지만, 이렇게까지 받아본 적은 처음이다.
‘어마어마한 빚쟁이구먼.’
물론 나는 낙담하지는 않았다.
이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프트야 초월체를 사냥하면 얼마든지 채울 수 있으니 말이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이 세계를 현실로 만드는 것은 분명한 이득이 될 터였다.
[적합한 행성을 탐색 중입니다…]
[X-347 행성이 선택됐습니다.]
[행성의 환경을 개조 중입니다…]
[행성의 환경 개조가 완료됐습니다.]
‘그러고 보니…’
현실로 구현하는 방법이란 건 다름 아닌, 행성을 구매해 개조하는 것이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행성을 구매한 셈이 돼버렸다.
플레이어 시스템과 직접 계약 조건 중 첫 번째 조건을 만족한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인 100억 기프트만 만족하면 더 이상 채굴자와의 계약에 목을 매달 필요가 없다.
그 보복이 두렵긴 하지만.
물론 지금 당장 –37억 빚쟁이인 내게 100억 기프트를 모으는 건, 조금 나중의 일일 테지만 말이다.
생각을 마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종말의 그날처럼 붉게 물들어있던 하늘은 어느새 푸른 하늘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정보창이 떠올랐다.
- 현재 등급/잠재력 : F/E
- 소유주 : 이진서
- 기프트 매장량 : ???
- 기프트 채굴량 : 행성의 등급이 낮아 아직 기프트 채굴이 불가합니다.
다시 말하면 조건만 만족하면 기프트 채굴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기프트 채굴이라…’
솔직히 생각해본 적 없다. 아무리 기프트가 좋다 한들, 이 세계를 지구처럼 만들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스템은 이런 내 의심을 불식(拂拭)시켰다.
[기프트를 채굴하는 방법은 채굴자마다 다릅니다. 행성의 생명체들과 공존하는 방식도 얼마든 가능합니다.]
“한마디로 발라르가 지랄 맞았다, 이 말이군.”
그런 발라르에게 걸렸으니 지구가 이 모양으로 작살이 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시스템도 침묵했다. 침묵은 긍정이었다. 세계를 천천히 둘러보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요새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문이 열리고, 미국인들이 요새 밖으로 우르르 빠져나온다.
그중에는 솔레나 역시 섞여 있었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눈물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의 눈물이었다.
“이제야 생각이 났어. 우리를 굴레에서 해방시켜줘서, 다시 삶을 줘서 고마워.”
그녀는 감사를 표했다. 아마 그동안의 기억들을 떠올린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어쩔 거지?”
“다시 용족을 부흥시켜야겠지?”
짤막하게 말한 그녀는 순식간에 거대한 적룡으로 변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통찰안을 통해 거인들이 급하게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 역시 깨달았다.
그녀처럼 눈물 흘리는 거인들을 생각하니, 끔찍한 재앙이 다름없다. 과장 조금 보태서 눈물 때문에 강이 생길지도 모르는 노릇. 나는 황급히 시스템을 향해 말했다.
“지구로 건너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행성과 연결된 소형 포탈을 만들기 위해선 1억 기프트가 필요합니다, 지불하시겠습니까?]
만약 기프트가 없었다면 꼼짝없이 이 세계에 갇힐 뻔한 셈이다. 대단한 상술이라 생각하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뜨니 내 팔목엔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
“이게 그 시계예요?”
놀라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그녀. 나는 슬그머니 팔목을 든다. 영롱한 무지갯빛을 내는 시계. 평범한 시계가 아닌, 포탈 기능을 가진 시계다.
“건너갈 수 있는 인원엔 딱히 제한이 없는 듯하고, 날 잡아서 언제 한번 다 같이 건너갑시다.”
그룹원들은 호기심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