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내게 안겨드는 그룹원들과 진하게 포옹을 나눈 나는, 그로부터 5분이 지난 후에야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뭐, 정확히 말하면 진짜 자유의 몸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헤븐 콜(Heaven Call)을 통해 연락을 나누긴 했지만, 아무래도 여건이 여건이었기에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들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를 털어놔야겠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들과 함께 주상 복합 센터로 향했다. 대략 한 달 만에 보는 주상 복합 센터는 꽤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아니, 저 정도면 거의 새로 지어진 수준이다.
누구의 미적 센스가 들어갔는지 어렴풋이 짐작되는, 화려한 사방신 장식이 달려있는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간 나는 내부 역시 외부와 마찬가지로 싹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웨이타오 주석인가요?”
내 물음에 이서란이 마치 고자질하듯 대답한다.
“예, 리더가 기거하는 곳이 허름해서 되겠냐고 하시면서 싹 갈아엎으셨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영악한 노인네가 아무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 리는 없다. 무슨 꿍꿍이를 품고 행한 일이 틀림없다. 하지만 의도야 어쨌건 그 결과 자체는 나쁘지 않다.
내 입장에선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다. 어차피 개축(改築)하려고 생각 중이었으니 말이다.
‘기프트 좀 많이 썼겠는데?’
단순히 외양만 바뀐 게 아니다. 새로운 주상 복합 센터엔 다양한 기능이 달려 있었다. 하늘 머리 소녀의 홀로그램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는 예를 갖추고는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 마스터(Master)를 뵙습니다. 저는 이 빌딩의 AI, 스카이입니다.
“만나서 반가워.”
- 최상층으로 안내할까요?
그렇게 말하는 소녀- 스카이는 마치 진짜 인간을 보는 것 같다. 예전에 봤던 인공지능들(쟈비스, 콩)보다도 한층 더 인간을 닮아 있었다. 그룹원들도 그런 스카이에 놀란 듯 술렁거렸다.
“진짜 인간 같네?”
“신기하네요.”
“드디어 최후의 날이 도래하는 건가…”
박승기가 탄식을 흘리며 말하자, 방금 전까지 없다가 어디선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 아나스타샤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최후의 날은 무슨, 남의 발명품 스카이넷 취급하지 말라고.”
“그러고 보니 이름도 똑같잖나?”
아마 저 인공지능엔 아나스타샤의 기술력이 가미된 듯하다. 하기야, 그녀의 기술력은 현대의 그것을 아득히 초월해 있다. 그녀가 가진 신화 등급 스킬, 위스퍼드(Whispered) 때문이다.
이 위스퍼드라는 스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나도 직접 겪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현자’라 불리는 미래의 과학자들이 그녀에게 실시간으로 말을 걸어온다고 한다.
의미 없는 말도 많지만, 그 말 중에는 현대의 그것을 초월하는 지식들이 담긴 말도 많다고. 물론 그들의 말을 해석하고, 구현시키는 건 전부 아나스타샤의 능력이지만…
어쨌거나 그녀가 저런 인공지능을 뚝-딱 만들어낸다 한들 이상할 것은 없는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엉거주춤 내 앞에 선다. 그 행동거지와 마찬가지로 표정 역시 어색하기 그지없다. 정말 어색해서 그럴 리는 없고,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표정.
얼핏 보기엔 어색하면서도, 역설적이게 자연스러운 표정이지만, 매사에 완전무결하려는 했던 그녀의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이 표정은 틀림없이 계산된 표정이 틀림없다.
“어색하게 왜 그럽니까?”
뭘 숨기고 있는 걸까?
“그게…”
굳이 그녀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없는 나였기에, 곧바로 통찰안을 사용했다.
[아나스타샤]
- 능력치
[근력 65.000] [민첩 67.500]
[체력 67.500] [지력 130.000]
[마력 110.000] [행운 77.000]
- 보유 스킬
<위스퍼드(G)>
<금속 생성(L)>
<소환 : 마리오네트(L)>
<기계왕의 맹약(L)>
<기계화(L)>
<기계 강화(U)>
<위장자의 가면(U)>
- 보유 기프트 : 5,453,236
전형적인 메카닉(Mechanic)의 표본이라 말할 수 있는 높은 지력과, 기계 관련 스킬들. 아직 마땅한 스킬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스킬 슬롯이 전부 다 차 있지는 않은 모습이다.
물론 내가 통찰안을 사용한 건 능력치나 스킬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녀의 마음이 목소리처럼 내 귀에 들려온다. 순간적으로 내 귀를 의심했다.
잠시 후,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 그렇게 됐어요. 정말 의도한 건 아닌데.”
“사실입니까?”
“네, 정말 의도한 건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없는 동안, 나를 수색할 겸 노틸러스 0호를 저 깊은 심해 속으로 내려보낸 모양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잠수함은 레비아탄과 마주쳤고…
‘집어삼켜졌다.’
잠수함은 거대했지만, 레비아탄은 그걸 단숨에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했다. 결국 노틸러스 0호는 레비아탄의 배 속에 집어 처넣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고 했다.
“정말 의도한 게 아닙니까?”
“……”
내가 이렇게 아나스타샤에게 집요하게 물어보는 이유가 있었다.
이전에 나는 이미 그녀에게 레비아탄의 존재에 대해 언급했었다. 내게 전해 들은 사실을 잊을 리 없는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잠수함을 내려보낸다는 결정을 했다는 데 의아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시 부인한다. 이번에도 영락없는 진실이다. 아니, 정정한다. 이번에는 위장된 진실이다. 그녀의 스킬 중 하나인 위장자의 가면이 발동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슬쩍 스킬 설명을 읽어주니 거짓을 모호한 진실로 바꿔주는 효과가 있단다.
분명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면 속아 넘어갔겠지만, 내가 이렇게 주의 깊게 살피고 있는 이상 근본적으로 유일 등급 스킬로 통찰안을 속아 넘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나스타샤, 나를 속이지 마세요.”
내 날카로운 눈길에 결국 그녀가 진실을 털어놨다.
“정말 의도한 건 아니에요. 다만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던 건,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이번엔 스킬이 발동했다는 메시지를 받지 않았으니, 이건 진실이다.
“설령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아나스타샤, 당신 때문에 강순철 씨를 비롯한 노틸러스 0호의 승무원들이 집어 삼켜진 것 아닙니까?”
노틸러스 0호만 잃은 것이라면 그럴 수 있다며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노틸러스 0호에는 승무원들이 탑승해 있었다. 초창기부터 함께 했던 그룹원들, 그리고 강순철…
이 자리에 그가 보이지 않는 것에 조금 의아했었는데, 그런 이유 때문이라니.
나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내가 이 거대한 그룹을 만들고 안전한 요새를 세웠던 게 무슨 이유 때문이란 말인가. 내가 돌아오자마자 이런 소식이나 전해 들어야 하다니…
심지어 그녀는 내게 스킬을 사용하면서까지 진실을 은폐하려고까지 했다. 좋게 생각해보려 해도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생각보다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서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가, 강순철은 아직 안 죽었어요.”
싸늘해진 내 표정을 살피던 아나스타샤가 필사적으로 변명을 내뱉는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건 사실이에요, 오빠.”
우리 둘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진혜연이 슬그머니 껴들었다.
“강순철 아저씨는 아직 안 죽었어요. 정확히 말하면, 아직 레비아탄의 몸속에서 살아 있어요.”
“그게 말이 되는…”
“오빠처럼 헤븐 콜을 통해 대화를 나눴는걸요. 물론…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곧 죽겠지만요.”
아나스타샤가 풀이 죽은 얼굴로 덧붙였다.
“이론상 아주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일단… 먼저 올라가서 이야기 나눠요. 아직 골든타임(Golden Time)은 제법 많이 남았으니까요.”
나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솔직히 눈 가리고 아웅인 것 같긴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나스타샤도 의도한 것은 아니라 하니까.
“골든타임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 상황을 유지한다면, 한 달 이상은 버틸 수 있을 거예요. 그 이후는 미지수지만…”
“아나스타샤, 당신은 그를 구할 방법을 찾으세요. 그게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면죄부입니다.”
만약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나는 그녀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내 경고가 들어 먹혔는지 아나스타샤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후다닥 사라졌다.
지켜보던 라우라가 한마디 사족을 붙였다.
“쌤통이다, 저년, 얼굴 파리해진 거 보소.”
평소에 아나스타샤에 놀림을 당하던 그녀로서는 지금 그녀의 모습이 몹시나 통쾌했던 모양이다.
“……”
아까처럼 기분이 나지는 않지만, 나는 그룹원들과 함께 스카이의 안내를 받아 최상층으로 올라왔다. 1층이 화려하다 생각했는데 내가 거주하게 될 최상층과 비교하면 약과였다.
‘무슨 금으로 도배를 해놨냐?’
내 취향과는 동떨어지긴 했지만, 무슨 왕의 궁전처럼 층 전체에서 금빛이 번쩍이는 모습을 보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층 한가운데에는 원탁이 있었다. 나는 원탁의 가운데 앉았다.
그룹원들 역시 주변에 둘러앉기 시작했다. 정민혁과 박승기는 각각 내 양옆에 있는 의자에 김하나, 진혜연은 소파에… 그들이 모두 앉자, 나는 그들을 훑어본다.
지금 이 시간에도 강순철은 레비아탄의 배 속에서 고통받고 있을 텐데, 내가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를 할 만한 여유가 있을까, 하는 일말의 죄책감마저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남은 시간이 한 달이라고 하기도 했고, 어차피 스킬들이 재사용 대기시간인 지금, 레비아탄에게 무작정 싸우자고 달려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섣불리 싸웠다가 오히려 강순철에게 피해를 입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들을 말없이 훑던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왜 먼저 말하지 않은 겁니까?”
헤븐 콜(Heaven Call)을 통해 그들과 수십 통의 메시지를 교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이런 사실에 대해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한 말이었다.
“자네를 걱정시키기 싫었네. 자네 사정을 뻔히 아는데…”
박승기가 입을 열었고, 진혜연도 한마디 거들었다.
“오빠 걱정시키기 싫어서요. 그리고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방법을 찾고 있었는걸요.”
“그래도, 그렇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머리로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어차피 동화 세계 속에서 들었다 한들, 당장 그를 구하러 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는 걸.
감정 조절을 하려 했는데, 제대로 되지 않는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아니다, 미안해.”
정민혁이 사뭇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형님. 다음에 이런 일이 있으면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냐, 내가 잘못이지.”
동화 세계 속에 한 달이나 갇혀 있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도 일언반구도 없이. 단순히 아나스타샤나 그룹원들의 잘못으로 치부하기엔 내 잘못 역시 작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