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눈을 뜬다. 제일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푸른 하늘이었다. 잠시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던 내게, 마치 파노라마처럼 직전의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거인왕의 궁전, 라스팔마스 안에 들어온 나는 거인왕, 팔마스를 죽이고, 궁전 안에서 채굴자, 발라르와 전투를 벌였고 그 끝에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패배보다는 자멸(自滅)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만, 극한의 발도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과는 아마 같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발라르는 괴물이었으니까.
‘아니, 마지막에…’
누군가가 내게 자신을 소환하라는 말을 걸어왔고 나는 그 말대로 영령 소환을 사용했다. 그리고 ‘지혜의 신, 미미르’를 소환했다는 메시지를 본 것이 내 기억의 진짜 마지막이다.
지혜의 신, 미미르.
내게 낯설지 않은, 친숙한 이름이다. 지금 내가 착용하고 있는 장신구 세트가 바로 미미르의 이름이 붙은 장신구 세트였으니 말이다. 그 세트 효과인 미미르의 샘물을 애용하던 나였다.
‘미미르의 소환에 정말 성공한 걸까?’
영령 소환으로 영령이 아닌 신을 소환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기야 정령왕을 소환하는 스킬도 있는 마당에 신을 소환한다 한들 이상할 건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반신반의하던 바로 그때, 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느냐?”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기억을 잃기 전에 들었던 누군가의 목소리- 여성의 음성과 동일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고개를 돌린다.
흑발의 여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다. 참으로 부끄럽게도 그 이유는 아름다워서였다. 이 나이 먹고 무슨 주책인가 싶지만, 과장이 아니라 정말 아름답다.
내가 지금껏 봤던 여자들 중 가장 아름다운 이는 이제원이다. 하지만 눈앞의 미녀는 그녀와도 차원이 다른 아름다움을 가졌다. 그야말로 이 세상의 미(美)라고 할 수 없는 아름다움.
하지만 단순히 아름다움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존재감. 그야말로 앞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선 숨이 턱하고 막힐 지경이었다.
[통찰안(G)을 사용합니다.]
<???? ???>
- 통찰안의 등급이 낮아 정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표시되지 않지만, 동시에 나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미미르.”
그러자, 여자- 미미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내 이름을 불러주는구나.”
“그… 안녕하십니까.”
나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궁금한 게 많아 보이는 표정이구나. 이제 3분 48초 남았다.”
“예?”
“내가 역소환될 때까지 3분 48초 남았다는 뜻이다. 아, 이제 3분 46초다.”
머릿속이 어지럽지만, 빠르게 정리했다. 그녀가 사라지기 전에 정보를 알아내야 한다.
“어떻게… 어떻게 된 겁니까?”
“네가 생각하는 대로다. 네가 나를 소환했고, 나는 너를 지켜냈다.”
“발라르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계의 신격 말이냐?”
“…예.”
“이 세상은 동화 속에 기록된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거일 뿐이다. 이 ‘회차’의 그는 물리쳤지만 또다시 다음 ‘회차’를 반복하겠지.”
“……”
“그래도 시련을 통과했으니, 네게는 대단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은 거인족과 용족의 대전쟁을 끝냈을 뿐만 아니라, 숨겨진 흑막을 처치했습니다.]
[기여도에 따른 보상이 지급됩니다.]
[당신의 기여도 : 99.99%]
미국인들은 모두 요새 안에 있었으니 내가 기여도를 독식하는 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어떤 보상이 주어질까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곧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내 몸을 감쌌다.
[능력치 포인트 30을 획득했습니다.]
[행운의 신의 네 잎 클로버(G)를 획득했습니다.]
손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인 네 잎 클로버를 바라본다. 얼핏 보기엔 평범한 네 잎 클로버 같이 생겼으나, 그 속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행운의 신의 네 잎 클로버>
종류 : 악세서리(Accessory)
등급 : 신화(God)
설명 : 행운의 신이 직접 심은 네 잎 클로버.
옵션 : 보유 시 행운 +5.0, 사용 시 1회에 한해서 행운이 +100.0(사용 이후 행운의 신의 네 잎클로버는 소멸된다)
시스템이 말하길 행운을 올려주는 장비 아이템은 VVIP 상점에서도 많지 않다고 말했었다. 하물며 신화 등급 아이템은 판매할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런 희귀 아이템을 얻은 셈이다.
‘1회에 한해서 행운이 100 증가한다라…’
지금 내 행운 능력치는 150 언저리.
확실히 얻기 힘든 능력치답게 다른 능력치들에 비하면 상승폭이 낮은 편이다. 하지만 네 잎 클로버를 사용하면 단 1회에 한해서지만 250을 돌파하게 된다.
‘아니, 만약 능력치 포인트 30을 모조리 행운에 투자한다면…’
280.
지금 내 마력을 뛰어넘는 수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스킬 개조를 사용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했었는데, 280의 행운이라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가능성이 열렸다.
‘어떤 스킬을 개조하지?’
전설 등급? 신화 등급? 확실히 전설 등급에 쓰긴 아까운 감이 없잖아 있는데… 의식의 흐름을 이어나가던 내게 미미르의 목소리가 꽂힌다.
“이제 2분 남았다.”
아차, 잠시 그녀의 존재를 잊었다. 나는 잠시 ‘계획’을 미뤄두고,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아까 발라르를 이계의 신격이라 하셨는데, 이계의 신격이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이계에서 넘어온 신격들을 의미한다. 나조차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건너온 존재들. 그 힘은 제각각이지만 그중에는 특출나게 강한 이들도 존재하지.”
나는 그 특출나게 강한 이들에 발라르가 속하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쓰러트릴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합니까?”
“미안하지만… 지금의 너는 물론, 나 역시도 불가능하다. 여기서 말하는 ‘나’는 발할라에 있는 내 본체를 의미하는 것이야. 지금의 그는…”
짤막하게 말을 끊은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강해졌다. 처음부터도 강했지만, 이제는 진짜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지구의 입찰에 참여했던 신격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바로 그다.”
그녀는 지구의 입찰 내용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뭐? 입찰에 참여한 신격을 살해해? 들으면 들을수록, 이 발라르라는 놈은 미쳤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암울해진다.
지구로 돌아가면, 최후에는 이런 놈과 싸워야 할 테니 말이다. 과연 승산이 있을까? 여기서 몇 배는 더 강해진다 한들, 승산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면 전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녀는 내게 꽃을 건넨다. 내가 받아들자, 그녀가 건넨 꽃은 수십 송이의 꽃다발로 변했다. 진한 꽃 냄새를 맡자 한결 기분이 좋아지고, 몸이 가벼워진다.
“어떻게 할까요?”
꽃다발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물어본 것이었으나, 그녀의 대답은 중의적이었다.
“그건, 네가 스스로 해답을 찾아 나가야겠지.”
아마 방금 전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대신한 것이 틀림없었다.
“다시 만날 수 있습니까?”
“일반적인 방법으로 나를 소환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거다. 하지만… 미래에는 다를 수도 있지. 이제… 30초 남았다.”
30초 남았다고 말하니 마음이 점점 급해진다. 시간 가속을 보유한 내게는 사실상 60초, 1분이지만 1분이라는 시간이 결코 많은 시간은 아니니 말이다.
고민 끝에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이 세계를 구원할 방법이 있습니까?”
“구원이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그러나 그건 내 소관이 아니다. 어쩌면… 카르마의 힘을 잘 빌리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
그녀가 말하는 카르마가 기프트를 뜻하는 것임을 나는 알아차렸다. 곧 그녀는 ‘언젠가 다시 보자’라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여운이 남아, 잠시 나는 그녀가 흩어 사라진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또다시 메시지가 떠오른다.
[이 세계는 곧 초기화될 예정입니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세상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이 세계는 미미르의 말처럼, 그리고 시스템의 말처럼 초기화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막을 생각이다.
눈을 감았다 뜨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이 세계를 사고 싶다.”
행성이 아닌, 기록된 세상, 그 자체를 구매하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
“그러니까 원래 결말은 뭐야?”
진혜연의 물음에, 정민혁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팔마스의 회고록에 쓰여 있는 대로라면 결국 정체불명의 역병이 퍼지면서 거인족은 멸망하고 말아. 오로지 지하에 숨어 역병을 피할 수 있었던 소형 거인 일족만 살아남았고, 고대의 거인들이 멸종하고 소형 거인들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지.”
“……”
“더 궁금해? 더 이야기를 풀어놓자면 거인족이 멸망한 이후, 숨어 살던 소수 종족들- 인간, 드워프, 엘프 등등이 땅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고,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나 그 소수 종족들은 부흥기를 맞이하게 돼. 이들은 라그나로크와 같은 일을 방지하기 위해 용족과 거인족을 감시할 감시자를 세우게 되는데… 그 첫 감시자가 바로 옐… 혜연, 혜연아?”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쳐다보고 있던 진혜연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정민혁은 뚱한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대답하기 시작했다.
“아, 방금 오빠한테 연락 왔어.”
“뭐라고?”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런 이유라면 얼마든지 무시해도 된다.
“지금 온다는데?”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군.”
정민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무려 한 달 만의 이진서의 귀환. 어딘지도 모를 이세계 이야기를 떠들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허겁지겁 간부들을 호출하기 시작했다.
“리더가 돌아온다고?”
이진서의 생존은 확인했으나, 생환을 확신할 수는 없다는 여론에 침체돼있던 하늘 요새 전체가 모처럼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차원문이 열렸다.
멀뚱멀뚱 서 있던 미국인들이 차원문 너머로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그 숫자는 한둘도 아니고, 무려 9,000에 이르렀다.
미리 미국인들이 이진서와 같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기에 그리 놀라지 않고 정민혁은 간부들을 시켜 그들을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형님은?”
“아직 안 보여.”
그는 조금 초조한 얼굴로 미국인들을 바라봤다. 어째서 이진서가 보이지 않는 걸까? 혹시 그 혼자 이곳으로 넘어오지 못한 건 아닐까? 하지만 그런 그의 걱정을 불식(拂拭)시키듯.
이진서는 마지막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형님!”
정민혁이 그를 부르자, 그는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정민혁이 그에게 달려드는 것을 시작으로, 진혜연, 김하나를 비롯한 간부들, 라우라 역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진정한 리더의 귀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