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우주선 안에서 예런 일리아티는 새크리파이스 스킬을 사용해, 내 몸을 잠시나마 묶어놓는 데 성공했었다. 그와 내 능력치 차이를 생각한다면 그 효과는 대단하다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채굴자를 상대하기 위해, 새크리파이스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찾아본 결과 새크리파이스는 양날의 검이었다. 사용자의 피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새크리파이스>
종류 : 액티브(Active)
등급 : 전설(Legendary)
설명 : 스스로의 피를 제물로 바쳐 대상을 봉인한다. 사용자가 바치는 제물의 등급이 높을수록, 사용자의 마력이 높을수록 효과는 배가된다.(재사용 대기시간 : 7일)
생각해보면 예런 일리아티는 아예 그의 몸을 제물로 바쳤었다. 가장 확실한 제물이지만, 내가 그처럼 몸을 제물로 바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대신 나는 발상의 전환을 했다.
‘영령이 새크리파이스를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영령 소환을 통해 현계(顯界)에 소환된 영령은 지속 시간 동안만큼은 ‘자유도’를 가진다. 가령, 옐레나 같은 경우는 연병수를 가르치다가 새로운 마법을 개발하고 사용하기도 했었다.
즉, 그 말은 영령이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소리. 물론 그것은 영령들이 플레이어들처럼 기프트를 지불해 스킬을 익힐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한마디로 직접 배워야 한다.
하지만 새크리파이스는 그 기원을 알지 못하는 고대의 주술. 이 주술을 배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연히 알지 못한다. 때문에 이 과정에서 나는 그룹원들의 도움을 빌렸다.
새크리파이스와 연관된 서적을 찾아, 그 내용을 정리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 부탁대로 순순히 새크리파이스에 대한 내용을 찾아 정리하여 보내줬다.
아이러니하게도 새크리파이스는, 레오니아 3세가 개발한 주술이었다. 물론 방법을 알았다곤 하지만 간츠가 새크리파이스를 익히는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 나보고 이런 주술을 배우라고? 이건 거인족으로서 수치다.
그는 배우는 걸 탐탁지 않아 했지만, 나는 간신히 그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설득하는 데 성공이야 했지만 새크리파이스는 무려 전설 등급 스킬이다. 그가 배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기프트를 아낌없이 뿌리면서, 그를 전적으로 서포트(Support)했다. 바로 지금 이 한순간을 위해서 말이다. 붉은색 결계에 칭칭 둘러싸인 채굴자- 발라르를 바라본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그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가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눈치다. 그는 결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은 튕겨 나간다.
내 입가가 호선을 그린다. 새크리파이스가 충분히 그에게도 효과적이라는 방증이었으므로. 하지만 그의 공격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 나는 이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성운의 가호.’
먼저 성운의 가호를 사용해, 스킬의 재사용 대기시간을 초기화한다. 그리고 영령 빙의를 사용해, 간츠에 빙의했다. 거인화를 사용하자 내 몸이 대전에 걸맞게 커진다.
엘론 두 자루를 들고, 발라르를 바라보면서 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천천히 발도 자세를 취한다.
‘극한의 발도술.’
검성, 아자르가 사용하던 극한의 발도술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나는 거인화 상태에서 사용한 적이 이미 있었고, 그때의 위력은 그야말로 공간 그 자체를 찢어버릴 정도로 대단했었다.
물론 그런 극한의 발도술을 사용한다는 건 말 그대로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극한의 발도술은 무려 현재 체력과 마력의 90%를 소모해 강력한 공격을 날리는 기술. 때문에 나는 극한의 발도술을 사용할 때마다 반드시 미미르의 샘물을 복용하곤 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미미르의 샘물을 복용한 상태. 마인화를 사용해 마력은 무제한이지만, 체력은 무제한이 아니다. 이번 공격에 실패한다면 나는 필연적으로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발라르는 그런 것을 생각할 정도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가 결계에서 풀려난다면 위기를 맞이하는 것은 매한가지. 즉, 지금 이곳이 승부처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명경지수(明鏡止水)의 상태에 돌입한다.
이 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나와 발라르 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발도 자세를 취한다. 몸을 숙이고, 두 자루의 엘론을 교차한다. 그리고 다리에 힘을 싣는다.
다음 순간, 내 몸이 폭발적으로 튀어 나갔다. 순식간에 그의 앞에 도달한 내 엘론들은 정확히 그의 몸에 명중한다. 펑!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나조차 순간적으로 뒤로 자빠질 정도였다.
가까스로 몸을 지탱한 나는 통찰안을 사용해 발라르를 바라본다.
폭연 사이로 그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는 온몸에서 검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마치 피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꿈틀거린다. 하지만 그것만 제외하고는, 그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가 나를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게 다인가?”
‘아직 끝이 아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다시 발도 자세를 취한다. 이론상, 극한의 발도술은 여러 번 사용할 수 있다. 다만 현재 체력의 90%를 소모하기 때문에 그것이 쉽지 않을 뿐.
한 번 사용하면 체력이 10% 남고, 두 번 사용하면 1% 남고… 결국엔 0%로 수렴하게 되니 말이다. 나는 중국에서 킹 타일런트를 상대하며 극한의 발도술을 두 번 사용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때 거의 ‘죽을 뻔’했었다. 만약 미미르의 샘물을 사용하지 못했더라면 정말 죽었을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미미르의 샘물도 재사용 대기시간 상태였다.
‘그래도 해야 한다.’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눈앞의 발라르를 쓰러트린다는 일념으로. 내 몸이 또다시 폭발적으로 뻗어나갔다. 엘론들이 정확히 그의 몸을 베고 지나간다. 쾅-! 쾅-! 연이은 폭발.
그 여파로 인해 대전 내부는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기둥이 무너져 내리고, 천장은 온데간데없이 날아가 버렸다. 몸이 휘청거린다. 이젠 작은 충격 하나에도 버티지 못할 만큼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나는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발라르를 바라본다.
“……”
검은 피의 빈도가 한층 더 늘어났을 뿐, 그는 여전히 멀쩡한 상태 그대로였다. 괴물 같은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안했다.
내 입장에선 해볼 수 있는 건 모두 해본 것이었으므로.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진서, 너를 행성의 관리자급으로 간주한다.”
쨍그랑. 결계가 와장창 무너진다. 새크리파이스의 지속 시간이 다한 것이다.
“더럽게 감사하군.”
정신이 점차 혼미해진다. 나를 향해 발라르가 걸어온다. 그리고 천천히 손가락을 들었다. 검은 피가 살아있는 것처럼 세상을 향해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바로 그때였다.
- 얘, 나를 소환하렴.
내 귓가에 여성의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말하는 것은 명확했다. 자신을 소환하라. 영령 소환을 사용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마인화를 사용한 상태라, 마력은 넘쳐나기에 영령 소환을 사용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마지막 기력을 끌어모아 입을 열었다.
[영령 소환(G)을 사용합니다.]
[축적된 행운이 다시 없을 기적을 불러옵니다.]
[신격의 영령 ‘지혜의 신, 미미르’를 소환합니다.]
“신격의…”
그러나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기절해버렸기 때문이다.
***
온통 잔해만으로 가득한 대전 안에 꽃이 피어난다. 각양각색의 수백, 수천 송이의 꽃.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발라르는 시선을 돌려 꽃의 중심에 선 여자를 바라본다.
드레스를 걸친 미녀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발라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발라르는 그 외양이 아닌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내부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존재감.
느껴지는 신성(神性). 눈앞의 여자가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는 방증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때, 여자가 입을 열었다.
“이계의 신격아, 여기까지 하지?”
물론 그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허공에 떠오른 푸른색의 방패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는 어느새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짓을…”
콰르릉. 뇌전이 그를 향해 떨어진다. 발라르의 신형이 흐릿해진다. 하지만 뇌전은 빨랐고, 그의 몸을 정확히 때렸다. 또다시 그가 피를 토해낸다. 여자가 빙그레 웃었다.
“네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닌 것 같네.”
“흥, 이까짓…”
그러나 곧 발라르는 인정해야만 했다. 지금 몸 상태로 저 여자를 상대한다는 건 그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이 뭐지?”
“어머, 무서워라. 왜? 저주라도 걸게?”
“너는 꼭 내가 죽인다.”
“내 이름은… 미미르. 다른 신들은 나를 지혜의 여신이라 부르고 있지.”
“기억해두겠다.”
강렬한 검은색 번개와 함께 그의 몸이 사라져버린다. 남겨진 여자- 미미르는 물끄러미 이진서를 바라본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착용하고 있는 반지와 목걸이, 귀걸이들을 말이다.
지금 그가 착용하고 있는 장신구는 다름 아닌 그녀의 장신구. 그것이 매개체가 돼 그녀가 이 자리에 소환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단 나오긴 했는데… 루나 아우리엘이 화내려나?”
그들 역시 그에게 소환되기를 고대(苦待)해왔으므로. 잠시 걱정스런 표정을 짓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다들 이해해주겠지? 어차피 죽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이진서는 생명의 불빛이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극한의 발도술 두 번을 사용한 여파. 그나마 다행인 건 극한 상태가 발동하며 최악의 상황은 막았다는 것이지만…
애초에 그것만으론 불충분했다. 그가 지금 사용한 거인화가 풀릴 때쯤이면, 그 반동이 또다시 전해져 그는 필연적으로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것이 정해진 운명.
그러나 미미르는 충분히 운명을 뒤바꿀 힘을 가졌다.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린다.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평범한 비가 아니다. 미미르의 샘물을 개방한 것이다.
고통스러워하던 그의 표정이 안정을 되찾는다.
그러나 비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비록 기록된 세상이지만… 이 기록된 세상에 살아가는 이들은 진짜.”
신격인 만큼, 미미르는 이 세상의 원리 구조를 단숨에 꿰뚫어 봤다. 이 세상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본래대로라면 이계의 신격- 발라르에 의해 멸망 당할 세상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막을 생각이었다. 쏴아아,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마치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