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하늘 요새, 네 개의 섬 중 농사꾼들의 땅, 파밍 랜드(Farming Land) 정중앙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층 빌딩이 있다. 웨이타오와 지하오란이 공동으로 지은 거주 시설 겸 전망대였다.
그룹원들은 일정량의 기프트를 지불하고 거주 시설이나 전망대를 이용하곤 했다. 메인 랜드(Main Land)와는 다른 한적한 분위기 때문인지 인기가 많아 언제나 만원이었다.
63층에 위치한 전망대 위에는 64층, 65층, 복합 펜트하우스가 있다. 바로 웨이타오와 지하오란을 위한 공간이지만 그들은 간부들에게만큼은 예외적으로 펜트하우스를 개방했다.
- 우리를 위해 일하느라 다들 노고(勞苦)가 많으십니다. 이곳에서 마음껏 즐기십시오.
라는 명목을 들면서.
물론 그 이면에 있는 검은 속을 모를 리 없지만, 그 의도야 어찌 됐건 간부들은 이곳을 종종 이용하곤 했다. 그것은 박승기와 김희승이 이곳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유였다.
“어르신, 이번에 재배한 스이나입니다.”
김희승은 박승기에게 정성스럽게 접시에 담긴 과일을 내밀었다.
“스이나? 무슨 일본 말 같구먼. 생긴 건 영락없는 바나나인데?”
“하지만 바나나보다 훨씬 맛이 좋습니다.”
박승기는 바나나 같이 생긴 과일을 손으로 집어, 한 입 먹는다. 그리고 곧···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맛있군.”
그동안 고급 과일이란 고급 과일은 다 먹어온 그였지만, 이런 맛은 처음이었다. 김희승이 그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물었다.
“혹시 다음번에 블랙마켓이 열리면 씨앗을 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거야 뭐··· 부탁은 해보겠네. 자네 목적이 이거였구먼?”
“하하, 아닙니다.”
“농사꾼들의 욕심이 대단하다더니, 옛말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
그들이 있는 65층에서는 파밍 랜드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화려하게 펼쳐진 황금의 물결. 추수 시기. 지상에서는 농사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트랙터들과 각종 농기계들, 그리고 그중에는 사람을 닮은 안드로이드 로봇들도 여럿 보인다.
“그야말로 기계 농업이군.”
“아나스타샤 씨에게 공급받은 아이들입니다.”
아나스타샤는 막대한 기프트 지원에 힘입어 온갖 연구를 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는 데 성공했다. 외계의 기술로 만들어진 저 안드로이드 로봇들은 그 일환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여자는 실험 데이터를 쌓을 좋은 기회다, 하면서 투입시킨 거겠지, 쯧. 별로 마음에 들진 않지만···”
아나스타샤를 따라 하는 박승기의 말투에, 김희승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그 효과는 상당합니다. 아시다시피 어르신들이 연령대가 제법 있으시지 않습니까.”
지금 농사꾼들의 주축은 이진서가 강원도에서 구출한 플레이어들이다. 그들의 연령대는 60대, 70대가 주일 정도로 그 연령대가 높았다. 하지만 박승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다들 정정하지 않나?”
플레이어로 각성하면서, 그들은 정정해졌다. 하기야, 능력치도 능력치인데다, 몸에 좋은 거란 좋은 건 입에 달고 사니 건강해지지 않는 게 이상하다. 김희승은 조금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다들 많이 좋아지시긴 했지만, 필연적인 노화(老化)는 막을 수 없는 모양입니다.”
박승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수명 그 자체가 늘어나는 건 아니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겠지.”
그런 의미에선 그도 씁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황혼기였으니 말이다. 박승기는 단숨에 곡주를 들이켰다. 그의 눈치를 보던 김희승이 입을 열었다.
“리더의 소식은 아직도 없습니까?”
“오늘로 보름째인가?”
“예.”
김희승은 고개를 끄덕인다. 근래, 하늘 요새의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전부 리더ㅡ 이진서의 부재 때문이다. 노틸러스 0호를 동원했음에도 그의 작은 흔적 하나 찾지 못했다.
사실 이진서는 이미 죽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이진서가 죽은 것이라면 다음 리더 자리에 누가 앉을 것인가.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그룹원들은 궁금해했고, 간부들에게 그 답을 바랐다.
“곧 돌아올 걸세.”
“연락이라도 온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어디 있는지는 대충 알고 있거든.”
“어··· 리더는 지금 어디 계시는 겁니까?”
“글쎄··· 동화 세계?”
노틸러스 0호로 탐색에 실패한 후, 간부들이 희망 회로를 굴린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간부들 중 몇몇은 이진서가 카드깡을 할 때 옆에 있었고, 그가 습득한 스킬 중에 동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르는 김희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화 세계요? 제가 아는 그 동화 맞습니까?”
“그래, 리더가 습득한 신화 등급 스킬의 이름이기도 하지.”
“허, 신화 등급 스킬이요? 그러면 리더는 지금 어느 동화에 들어가 계신 겁니까?”
박승기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아마 트리비아(Trivia)에서 밝혀내지 않을까? 아마 지금 열심히 조사 중일 거네.”
그는 갈락시아의 도서관에 있을 독서 모임 트리비아의 구성원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이진서가 빨려들어간 세계를 찾고, 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동화책 삼매경일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김희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찌 됐건 빨리 돌아오셨으면 좋겠네요.”
“꼭 돌아올 거네. 돌아와야만 하고.”
아직은 이진서가 살아있다고 믿는 이들이 많기에 혼란이 야기되지 않았지만, 만약 대다수가 이진서가 죽었다고 믿는다면 이 하늘 요새엔 큰 혼란이 야기될 것이 틀림없었다.
러시아인들이 합류한 지 이제 고작 한 달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과 잦은 마찰이 일어나고 있었다. 중국인들 역시 러시아인들보단 덜해도 마찰이 일어나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들을 한데 아우르는 이진서의 존재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었다.
김희승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갈락시아의 도서관은 방대하다. 그런 도서관 안에서 동화(Tale)라는 장르의 책을 모두 찾는 것은 당연하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물량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듯 이제원이 트리비아(Trivia)의 회원들을 동원하기 시작하자 금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A조는 총 192편의 동화를 찾았습니다.”
“B조는 120편이요.”
“C조는 100편.”
책상에 가득 늘어진 책들을 보며 이제원은 한숨을 쉬었다. 이 중에서 이진서가 들어간 동화가 있을까? 설령 찾는다 하더라도, 책의 내용을 활용할 방법이 있을까?
하지만 이내, 그녀는 소리치듯 말했다.
“다들 후딱 책 내용 정리할게요.”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
트리비아 회원들이 그녀의 말에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제원은 슬그머니 뒤를 돌았다.
김선우 목사와 신도들이 서 있었다. 신도들의 눈에 어린 ‘광기’에 그녀는 조금 꺼림칙함을 느꼈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선 더운밥 찬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들이 합류하자 한층 더 작업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근데 병수야,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안경을 끼고 책에 열중하고 있던 연병수가 고개를 들어 김하나를 바라봤다.
“말씀하세요, 누나.”
“진서 씨가 들어간 동화가 무슨 동화인지 안다고 해도 우리가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녀의 물음은 타당했다. 이진서가 어디 동화에 들어갔다는 걸 안다고 하더라도, 연락도 되지 않는 현 상황에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지만 연병수는 고개를 저었다.
“형과 연락할 방법을 찾았어요.”
“진짜? 어떻게?”
“헤븐 콜(Heaven Call). 비록 매개체로 상당한 양의 제물ㅡ 기프트를 소모해야 하긴 하지만, 이 고대 마법을 사용하면 설령 그 상대가 영혼 상태라 하더라도 의사소통을 주고받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요.”
이미 검산까지 끝마쳤다. 그 끝에 내린 결론은 가능이었다.
“그러면 왜 당장 연락을···”
“보통 기프트를 많이 소모해야 하는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미리 자료 조사를 해놓고, 연락을 해보려고 하는 거예요.”
김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서 씨는 살아있는 거지?”
“그건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 살아있을 거라 확신해요.”
하늘 요새의 소유권은 이진서에게 있다. 만약 그가 정말로 죽었다면 그 소유권이 다른 이들에게 넘어갔어야 한다. 이것은 생존론자들이 밀고 있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 역시 이진서가 살아있을 거라 확신했다. 옐레나와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는 그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연병수는 다시 책을 빠른 속도로 속독하기 시작했다.
[라그나로크ㅡ 고대의 거인들과 용족의 전투는 결국 거인들의 승리로 끝났다. 거인들은 마도기(魔道機)를 개발했고, 용족들은 마도기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물론 고대의 거인의 피해도 상당했기에, 그로부터 수천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 고대의 거인들은 모두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책을 모두 읽은 그는 전쟁 카테고리로 책을 분류했다. 그리고 다른 책을 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가 방금 읽은 동화 속으로 이진서가 빠졌을 거라곤 말이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내가 벌써 이곳에 온 지도 한 달여가 흘렀다. 그동안 전쟁은 거의 마무리 지어졌다. 용족이 이길 거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거인족이 승기를 잡은 상태였다.
의외···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거인족이 사용하는 마도기라는 것을 보고 나서다. 권총이라기엔 지나치게 길게 뻗은 슬릿. 방아쇠. 방아쇠를 당길 경우 발사되는 붉은 광선.
거인들이 사용하는 마도기라는 것은 영락없는 총의 형상을 닮아있다. 그것도 구형 총이 아닌, 최첨단 광선 총 말이다. 마도기의 크기는 거인에 걸맞게 거대했다.
그 위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용들의 방어막은 광선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결국 마도기 등장 단 일주일 만에 용들은 하늘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당연히 하늘을 빼앗겼으니 전투의 향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지는 뻔한 일이었다.
그건 비단 이곳, 검은 대지뿐 아니라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나저나 저 거인들은 어떻게 광선총을 입수하게 된 걸까?’
고대의 거인들이 사용하던 무기들을 보면 그들의 과학 기술 수준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거인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광선총으로 무장하게 된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알아보지는 않았다. 용족이나 거인족 둘 중의 하나가 승리하게 되면 나는 이 세계를 빠져나가게 될 테니까.
그러나 아니었다. 분명 거인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