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공동의 적이라 할 수 있는 인간들의 수가 급감하자, 변이체들은 초월체들을 주축으로 서로 세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세력끼리 손을 잡고 전쟁을 벌이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그 결과, 지구는 수백 개로 찢어졌다. 북태평양이라 한들 예외는 아니었다. 바다 위, 두 초월체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초월체들의 뒤에는 그들이 이끄는 변이체들이 서 있었다.
그 숫자는 물경 수백에 이를 정도였다. 숨 막히는 대치 속에, 먼저 입을 연 건 검붉은 짐승의 외형을 한 초월체였다.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놀랍게도 인간의 언어였다.
“물러나라, 차베즈. 더 이상의 침입은 전쟁으로 간주하겠다.”
그러자 차베즈라 불린, 인간의 외형을 한 초월체도 입을 열었다.
“흥,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겠지. 메라, 오늘, 결판을 내자.”
차베즈와 메라.
이들은 이 북태평양의 해역을 두고, 종종 대치를 해왔다. 하지만 오늘과 같은 대규모 대치는 처음이었다. 흉흉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던 그들 중 먼저 달려든 것은 메라였다.
수면 위를 달려 차베즈의 앞에 도달한 메라는 앞발을 휘둘렀고, 차베즈는 뒤로 몸을 날리는 것으로 공격을 피해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변이체들이 멀뚱멀뚱 둘을 쳐다본다.
차베즈가 뒤를 돌아보며 그들에게 소리쳤다.
“전쟁이다!”
메라 역시 뒤를 돌아보며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흘렸다.
그제야 두 세력의 변이체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곧, 그들은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전투는 두 초월체 중 하나가 죽거나, 패배를 인정해야 끝날 것이었다.
그런 바다 위에 한 대의 수송기가 도착했다. 한 무리의 인간들이 창문을 통해 그런 그들을 내려다봤다. 변이체들은 아직 수송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 전투에 열중이었다.
“변이체들이 서로 전투를 벌이고 있다.”
강순철의 말에 정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에겐 오히려 잘된 일인 거 같네요.”
“어떻게 할까?”
“시간이 없습니다. 골든타임을 놓치기 전에… 쓸어버립시다.”
정민혁은 그룹원들을 돌아본다. 하나같이 중무장한 그들을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입을 열었다.
“입구 개방.”
전함의 메인 AI가 대답했다.
- 입구를 개방하겠습니다.
곧 수송기의 문이 열린다. 내려다보던 그룹원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었다. 강순철의 신호와 함께 그룹원들이 닥치는 대로 스킬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수백 개의 스킬.
그제야 수송기의 존재를 확인한 변이체들이 고개를 들었지만, 너무 늦었다. 말 그대로 변이체들이 압도적인 화력 앞에 쓸려나가기 시작했다.
이 시점의 그룹원들은 대부분 전설 등급 장비에, 전설 등급 스킬을 하나 정도는 착용하고 있는 상태다. 뿐만 아니라 온갖 버프 스킬과, 요리로 인한 능력치 강화까지.
이제는 그룹원 하나하나가 강화된 최상급 변이체 정도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물며 그들 중에선 초월체조차 단신으로 상대 가능한 ‘괴물’들도 있었다.
거대한 불의 거인은 그 등장부터 비범하게 주변의 변이체들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심지어 그들 중엔 특수 변이체도 제법 섞여 있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차베즈와 메라는 깨달았다. 그들이 서로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우리가 서로 이렇게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다.”
“…동의한다.”
곧 그들은 힘을 합쳐 불의 거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무의미한 돌격이었을 뿐이다. 초월체가 제아무리 강인하다지만 불의 거인의 정체는 무려 정령왕이었다.
그것도 가장 난폭하고, 힘이 세기로 유명하다는 불의 정령왕.
그들의 공격은 그저, 계란으로 바위 치기에 불과했다. 결국 그들은 쏟아지는 공격에 의해 기프트로 환원(還元)되고 말았다. 주변이 정리되자, 곧 수송기 여러 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아래엔 거대한 잠수함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노틸러스 0호였다.
“천천히 내려놔요.”
- 확인했어요.
곧 수송기와 함께 노틸러스 0호가 내려왔고, 바다에서 첫 진수식을 마칠 수 있었다. 한편, 주위에는 더 많은 변이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보통 소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 초월체는 없었고, 그들은 무사히 쓸어버릴 수 있었다.
“저희 중에도 한 명쯤 가는 게 맞을 거 같은데, 누가 탈까요?”
정민혁의 말에 간부들은 서로 눈치를 본다. 이내, 강순철이 손을 들었다. 곧 그는 노틸러스 0호에 탑승했고, 꼬르르 바다로 가라앉았다. 그룹원들은 다시 수송기에 올랐다.
“이 주변을 배회(徘徊)하며 엄호하도록 하겠습니다.”
노틸러스 0호가 이진서를 찾을 때까지, 무사히 지상으로 운반할 때까지 호위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
한나절이 흘렀다. 용과 거인, 두 종족 간의 전투는 쉬지 않고 이어졌다. 낮이나 밤이나, 마치 지진과 같은 진동이 울려 퍼졌다. 그 시간 동안 나도 마냥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외부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동굴 전체를 쉘터화시켰다. 당연하게도 하늘 요새의 방어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동굴이 무너져 압사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일을 마친 나는 바깥으로 나왔다. 미국인 리더들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나는 그들에게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외면하고 미리 만들어둔 통로를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거대한 거인의 시체였다. 그 옆에는, 거인이 걸쳤던 갑옷의 파편이 조각조각 떨어져 있었다.
통찰안을 사용해, 시체를 바라본다.
<고대의 거인, 얄리얄리>
상태 : 사망
온몸에 타들어 간 듯한 자국이 남아있는 걸 보면, 아마 용과의 전투 중 사망한 모양이었다. 그의 시체를 뒤로 걷기 시작했다. 바깥세상은 나무도, 풀도 하나같이 거대했다.
나는 나무 옆에 조용히 몸을 기댄 채, 중얼거렸다.
‘영령 소환.’
누굴 소환할까 고민하다가, 옐레나를 택했다. 그녀라면 이 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소환되지 않았다.
[해당 영령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는 처음 보는 메시지만 떠오를 뿐이었다. 영령이 존재하지 않는다?
‘…혹시 과거라서?’
이 세계는 고대 시대라 했었다. 옐레나가 태어나기 이전의 세계라 그런 것일까? 나는 다른 영령들을 소환해봤지만,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벨루가도, 카론도, 아자르도.
모두 다 같은 메시지- 영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만 떠오를 뿐이었다. 그때였다.
[영령 소환(G)을 사용합니다.]
[상급의 영령 ‘방패 용사, 간츠’를 소환합니다.]
내 앞에 호탕하게 생긴 거구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내가 봤던 거인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작지만 내 몸의 족히 두세 배 이상에 달하는 크기의 남자였다.
또한 그는 그의 거대한 몸집 이상의 방패를 옆에 들고 있었다.
“이 세계는…”
“……”
“재밌군.”
그는 엷게 미소를 흘리며,
“설마 이 세계로 다시 돌아오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야.”
그의 정체는 방패 용사, 간츠였다. 운석을 막아낼 때 그로 빙의한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소환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에게 고개 숙이곤, 지금 내 상황에 대해 대충 설명했다.
“전쟁을 끝내라는 말인가.”
“어떻게 하면 끝낼 수 있을까요?”
그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내 시대에 꽤 강했던 존재인 건 맞는데 말이야. 이 시대에는 진짜 ‘괴물’들이 득실거린다고.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간츠는 그 옐레나와 검성 아자르와 맞먹는 상급의 영령이다.
-물론 상급의 영령이라 하더라도 그중에서 차이는 존재한다고 말했었지만.
그만큼 그의 자존심 역시 고고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그가 스스로를 낮추며, 저런 말을 했다. 통찰안은 그의 말이 겸손이 아닌, 진실이라고 판단했다.
‘역시 두 세력 중 하나와 힘을 합쳐야 하는 건가?’
거인족의 편을 들거나, 용족의 편을 들거나, 어느 한 세력을 서포팅(Supporting)해서 전쟁을 끝낸다. 내가 생각했던 ‘방안’ 중 하나였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군.”
그때였다. 하늘에서 거대한 불덩이가 날아왔다. 내가 움직이기에 앞서, 간츠가 방패로 불덩어리를 막아냈다. 그의 방패에 닿자마자 불덩어리는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췄다.
신묘한 방패술이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붉은색의 용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적룡, 솔레나>
이 세계에 도착한 후 처음 봤던 적룡왕은 아니었다. 느껴지는 힘 역시, 그와 비교하면 상당히 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시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고민했다.
‘어떻게 한다…’
대화를 시도해볼까? 아니면, 반격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찰나, 용이 우리를 향해 재차 불덩이를 날렸다. 대화할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나도 이번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간츠가 불덩이를 막아냈고, 나는 날개를 펼쳐 도약했다.
블링크(Blink)를 사용해, 순식간의 적룡의 앞에 도달한 나는 검을 휘둘렀다. 보호막에 가로막혔지만, 내 검은 보호막을 그대로 두 쪽으로 가르고, 용의 어깻죽지를 베어버렸다.
크아아아.
비명소리와 함께 용이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아래서 방패를 들고 기다리고 있던 간츠가 방패를 휘두르는 것으로 그대로 용은 기절해버렸다. 나는 지상을 둘러봤다.
‘끝없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 세계는 광활했다. 내심 이 세계가 한정된 공간이 아닐까 예상했었는데, 그런 내 예상을 깨버리는 순간이었다. 더 있다간 눈에 띌 거 같아, 지상에 내려왔다.
간츠가 상처 입은 용의 목덜미를 잡아 올렸다.
“어떻게 할까? 용 고기가 그렇게 맛이 좋다는데…”
정말 베어 물 것처럼 쩝쩝 입맛을 다시는 그에게,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저 적룡을 죽였다간, 용족과 적대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선택지인지, 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가만히 두시죠.”
그는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적룡, 솔레나를 타나토스의 쇠사슬로 칭칭 감았다. 워낙 크기가 커서 무려 열 개나 사용해야 했다. 다행히 타나토스의 쇠사슬의 효과가 유효한지, 용의 능력치가 낮아졌다.
‘이제 어떻게 한다.’
이렇게 가만히 두면, 거인이나, 용이나, 둘 중 하나의 눈에 띄고 말 것이다. 가만히 용을 바라보던 나는 디그를 사용했다. 쿵, 미약한 땅의 진동과 함께 거대한 구덩이가 팼다.
그리고 간츠의 힘을 빌려, 용을 구덩이에 밀어 넣었다. 땅을 파서 숨길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