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예런 일리아티는 백악관에서 나사(NASA)로 거처를 옮겼다. 상징적 의미만 있는 백악관보다 우주선들이 있는 나사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단지 내부는 경비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단순히 그것뿐 아니라 내부는 전부 안전 가옥으로 개조됐고, 최정예 플레이어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침입자를 경계해서다.
물론··· 그걸로 제이드를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단숨에 유리창에 몸을 날린다. 라이언의 돌격. 전설 등급 차징 스킬에 건물의 유리창이 깨진다.
아니, 단순히 유리창만 깨진 것이 아니라, 그 여파로 인해 벽 전체가 무너져내렸다. 건물 내부에 착지한 그는 고개를 든다.
“제이드다!”
“녀석을 죽여!”
그런 그를 맞이하는 건 기관총을 들고 서 있는 수십 명의 플레이어들과, 센트리건들이었다. 총구가 불을 뿜었고, 초 단위로 수백, 수천 발의 탄환이 그에게 일제히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긴장한 낯빛 하나 없이 검을 휘둘러 탄환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튕겨 나간 탄환에 맞은 플레이어들이 목숨을 잃거나, 센트리건들이 파괴되는 일도 번번이 일어났다.
그 모습에 그를 상대하던 플레이어들은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모름지기, 전투라는 건 이길 가능성이 단 1%라도 있을 때 성립되는 것이니까.
“뭐, 저런 괴물이··· 지원이 필요합니다!”
뒤에서 지원을 요청하는 사이, 제이드는 그들을 돌파하고 안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더 많은 플레이어들이 나타났지만 그를 저지하지는 못했다. 그에게 길을 열어주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친 대리어스 단체, FD 회원들이었다.
“친구, 나는 너를 지지한다고.”
“함께 대리어스의 복수를 하는 거야!”
위기에 처하기는커녕 그를 돕는 이들까지 생기자, 그를 가로막는 플레이어들이 한층 더 전의를 상실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건물 전체가 그의 손아귀로 넘어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런 일리아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깨달았다. 그가 숨었다는 걸.
‘나사를 포기했다?’
그때,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홀로그램이 생겨났다. 홀로그램은 예런 일리아티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제이드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검을 휘둘렀지만 애꿎은 벽만 무너트렸을 뿐이다.
그의 홀로그램이 입을 열었다.
- 대단해, 이진서의 작품인가?
“예런! 어디에 있지?”
- 글쎄, 제이드, 네가 너무 무서워서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난 네 아버지의 친구인데 정말 죽이기야 하겠어?
“빌어먹을 놈.”
아버지를 죽여놓고 뻔뻔하게 친구 운운하는 그의 모습에 제이드는 빠득 이를 갈았지만··· 그의 홀로그램은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나를 흥분시킬 생각이다.’
여기서 흥분하면 그의 계략에 말려드는 것이란 생각에, 그는 억지로 거칠어진 호흡을 가라앉혔다.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은 그는 생각에 잠겼다. 예런 일리아티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분명 우주선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그라면···
‘이곳에 있을 텐데.’
그때, 그의 홀로그램이 익살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 사실 나는 바깥에 있다, 제이드.
동네 산책 나온 듯한 가벼운 말투.
“웃기지 마라.”
- 안에서 애꿎은 민간인들하고 드잡이질하지 말고 바깥을 봐.
제이드는 그의 말에 속는 셈 치고 창가에 다가가 지상을 내려다봤다. 거짓말처럼 예런 일리아티가 서 있었다. 그에게 손을 흔들기까지. 찰나의 순간, 제이드는 생각에 잠겼다.
‘진짜? 아니면 단순한 환상?’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예런 일리아티가 그의 앞에 순순히 모습을 드러낼 리가 없다. 체스에서 킹을 전진 배치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수십 초 전이었다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겠지만 이성을 되찾은 그는 일련의 사고 과정을 거치기로 했다.
‘환상이나 환각일 가능성도 있겠군. 하지만 모험적인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예런 일리아티는 도박수를 던지는 모험을 즐겨 했다.
회사 일에서나, 아니면 사소한 대인관계에서도 말이다. 즉, 만약 그가 도박수를 던진 거라면. 제이드가 생각하기에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탐색 계열 스킬을 배우지 않은 그에게, 근거리라면 모를까 이 거리에서 환상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그리고 그 결론은···
‘가짜든 아니든 일단 확인하고 본다.’
탄력 있게 도약한 그의 몸이 지상에 착지한다.
그 사이 지뢰를 매설해놓기라도 했는지, 지면에서 일제히 강렬한 폭발이 일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약간의 타격만 입었을 뿐이다. 짐승처럼 순식간에 예런 일리아티를 향해 돌진한다.
그의 아버지의 원수를 죽이기 위해.
제이드의 주먹이 휘둘러졌다. 총알 같이 튀어 나간 그의 주먹은 단숨에 그의 머리에 명중했다. 퍽! 공기를 찢는 듯한 타격음과 함께 그의 머리가 박살 나 버린다.
머리를 잃고 바닥에 인형처럼 주저앉은 예런 일리아티- 정확히 말하면 한때 예런 일리아티였던 시체를 바라보며 그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환상이 아니다. 환각도 아니다.
즉 진짜 예런 일리아티다.
죽였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하지만 그는 그토록 염원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없었다. 이런 결과는 그가 예상하지 못한, 허무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플레이어(Player)를 살해했습니다.]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가 증명해줬다. 그는 웃는지, 우는지 모를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때였다. 예런 일리아티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마법진을 그린 것은.
감정의 격류로 제이드의 대처는 늦었고, 그는 그대로 마법진 안에 갇히고 말았다. 주먹을 휘둘렀지만 붉은 결계에 가로막혔다. 그는 바닥에 웅크리고는 라이언의 돌격을 사용했다.
그러나 결계는 흔들리기만 할 뿐, 깨지지 않았다.
제이드는 낭패 어린 표정으로 재차 시도했지만, 같은 결과만 얻었을 뿐이다.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플레이어들은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속셈이지.’
그때였다. 그들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왔다. 놀랍게도 그의 정체는···
‘예런?’
예런 일리아티였다.
제이드는 시체를 바라봤다. 예런 일리아티의 시체가 맞다. 그렇다면 저기 있는 예런 일리아티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환상? 환각? 그게 아니면··· 그가 그 답을 알려주었다.
“복제화. 스스로의 몸을 복제하는, 신화 등급 스킬. 제이드, 네가 죽인 건 내 복제다.”
제이드는 인상을 구겼다. 설마 그런 스킬이 존재할 거라고는, 그리고 예런 일리아티가 사용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가 본 시스템 메시지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그의 의문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예런 일리아티가 입을 열었다.
“물론 복제라곤 해도 엄연한 내 몸의 1/4이니, 네가 나를 죽인 것 역시 사실이다. 즉, 나는··· 내 1/4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참으로 재밌어. 인간을 정확하게 1/4로 나눌 수 있고, 떼어갈 수 있다니 말이야. 아무래도 저 위에 존재하는 놈은 엄청나게 대단한 모양이야.”
그렇게 말한 그는 방금 전, 제이드가 지었던 표정과 비슷한 표정- 웃는지 우는지 모를 해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이드, 너를 해치지는 않을 거다. 그건 대리어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다만 이곳에 널 붙잡아두겠다.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내 계획이 실행될 때까지.”
예런 일리아티는 몸을 돌렸다. 제이드는 결계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바락바락 소리쳤다.
“예런!! 너는 반드시 내가 죽일 거다!”
“해볼 수 있으면 해보시든가. 하지만 무언가를 포기하기 전까지는 아주 어려울 거야, 제이드.”
짤막하게 말한 예런 일리아티는 몸을 돌린다. 곧 제이드의 주위에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틈이라곤 작은 햇빛 정도 들어올 수 있는 천장의 작은 틈이 전부였다.
***
‘어째서 예런 일리아티는 대리어스 대통령을 죽이고, 라소미까지 죽이려 한 걸까?’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곧 결론을 도출했다.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서. 그렇다면 그 무언가는 무엇일까?’
- 예런은 자신의 계획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야. 계획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지.
라소미의 말을 떠올려보면,
‘즉, 그의 계획인 화성 이주와 관련된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과감하게 그들을 죽이려 했다.’
가정을 해본다. 대리어스를 죽인 건 그가 무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고, 라소미를 죽이려 했던 건 나 때문일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무언가’를 알게 되는 걸 두려워했기 때문에.
‘예를 들어, 우주로 나가면 안 된다든가.’
나는 하늘을 바라봤다. 지난번 운석, 수많은 사람들이 원인을 분석했지만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시스템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만약 그 원인이 예런 일리아티 때문이라면, 그가 쏘아 올린 우주선 때문이라면? 그리고 그가 그 인과 관계를 알고 있다면?
‘말이 되지.’
그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충분히 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런 일리아티를 막아야 한다. 그를 여기서 막지 않는다면, 지난번과 같은 재앙이 또다시 이 세계에 닥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예런 일리아티를 막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직접 나서면 그를 막을 수야 있겠지만, 그가 쏘아 올릴 핵폭탄들은 전부 막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즉, 핵을 맞느냐, 아니면 예런 일리아티를 막느냐의 문제라 할 수 있었다. 혼자 결정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간부들과 상의 후에, 결정해야 한다. 나는 간부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 추론을 이야기했다.
“지난번 운석보다, 차라리 핵을 맞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고경표의 말에, 이제원이 웬일로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 쉘터는 공중에 있어서, 피해도 덜할 거고요. 물론 날아올 핵미사일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또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래서 리더는 어떻게 하고 싶다는 건가?”
박승기의 물음에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저도 차라리 핵을 맞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 운석은 지금의 저라 하더라도, 막아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그러면 그렇게 하면 되지 않은가?”
“그 결정을 쉽게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제 추론이 사실이라는 보장도, 운석이 날아온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만약 운석보다 더한 무언가가 일어난다면···”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라면? 우리가 막아낼 수 있을까? 물론 어지간하면 막아낼 수야 있겠지만, 피해가 커져서는 의미가 없다.
내 말에, 간부들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