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수십 만의 언데드 군단이 워싱턴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기이한 존재들의 등장에 미군이 움직였지만, 언데드들은 포격 정도는 가볍게 돌파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육체가 단단했다.
물론 단순히 단단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들 중엔 마법을 사용하는 언데드나, 혹은 비행하는 언데드도 있었고, 그들은 미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가장 큰 위협은 귀신같이 전장 곳곳에 출현하는 흑마법사.
그가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어김없이 주요 시설들이 파괴되고 있었다. 이에 흑마법사를 암살하기 위해 정예 요원들을 투입했지만, 그들 모두 농락당하다 살해당했을 뿐이다.
이는 병사들로 하여금 트라우마를 생기게 만들었다. 그들은 언데드의 물결에 겁에 질렸고, 전투를 거부하는 일도 벌어졌다. 변이체보다 더 인간을 닮은 그들은 끔찍한 상대였다.
하물며 이 모든 것은 전부,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이진서의 소행일 것이다.’
예런 일리아티는 확신했다. 이 모든 일은 이진서의 소행일 거라고.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증거 없이 핵미사일을 날린다는 건 자살이나 다름없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최대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어쨌거나 이진서가 이곳에 온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만은 막았다고 스스로 정신 승리를 하면서 말이다.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각하.”
“말해봐.”
“한국의 이진서에게 도움을 청하면 됩니다. 그는 카르텔의 침입에도 도움을 준 전적이 있습니다. 대가를 약속한다면 틀림없이 저희를 도와줄 것입니다.”
국무장관의 말에 예런 일리아티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우리를 돕지 않을 거야.”
상황을 더 악화시켰으면 악화시켰지, 그가 자신들을 도울 리 없다. 그 뒤로도 몇 가지 방안이 나왔지만, 썩 좋은 방안은 없었다. 중국처럼 자국에 핵을 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천만다행으로, 흑마법사는 모습을 감췄다. 그제야 워싱턴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체불명의 괴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백악관에 침입했다.
가드들이 그를 막았지만, 그는 차원이 다른 무력으로 그들을 돌파했다.
“막아라. 대통령 각하를 시해하려 하는 놈이다!”
연구소에서 연구를 하던 예런 일리아티는 방공호로 도망쳐야만 했다. 미국의 플레이어들을 다수 투입한 끝에 간신히 그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지만, 죽이진 못했다.
그 말인즉슨,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제이드군.”
드론의 카메라에 찍힌 영상을 통해 그의 정체를 확인한 예런 일리아티는 혀를 내찼다. 드래고니안 1호가 추락했고, 그 안에 타 있던 승무원들이 틀림없이 전멸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제이드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복수를- 그는 대리어스를 죽인 흉수가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기 위해 돌아왔다. 무슨 싸구려 삼류 SF 영화 내용도 아니고.
그는 일을 서두르기로 했다.
‘어차피 이진서가 알게 된 이상, 그를 막는 건 불가능하다.’
그가 직접 개입하기 전에, 미국이 함락당하기 전에, 계획을 수행해야 한다. 드래고니안 5호가 곧 완성 직전이었다. 족히 1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우주선.
미국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들의 절반가량은 실을 수 있는 수용량이었다. 남은 이들은 드래고니안 4호에 태울 생각이었다. 드래고니안 5호보단 안정성이 떨어지지만, 다른 방도가 없다.
“아쉽게 됐어.”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드래고니안 6호, 7호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 이젠 정말 떠날 때였다. 예런 일리아티는 조용히 무전기를 들었다.
“뉴클리어 사일로를 준비시키게.”
지상에 마지막 선물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
옐레나와 제이드가 혼란을 일으킨 탓에, 라소미는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니, 애초에 예런 일리아티가 보낸 미국의 플레이어들도 더는 그녀를 쫓으려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제는 강력한 플레이어가 된 라소미를 추살한다는 것 자체도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일 뿐더러···
애초에 그녀를 살인멸구하려 했던 이유가 이진서 때문이었는데, 그가 알게 된 지금 더 이상 라소미는 중요한 요인이 아니라는 예런 일리아티의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무사히 미국 외곽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정처 없이 사막을 걷고, 또 걷던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온 수송기를 볼 수 있었다. 엄청난 바람을 일으키며 지상에 착륙한 수송기의 해치가 열렸다.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바라봤지만···
누군가가 내리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발걸음을 옮겼다. 수송기 내부는 텅 비어있었다. 무인 수송기. 존재한다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내부에 탑승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보고 타라는 거야?”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자, 허공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는 수송기 B67의 메인 AI인 콩입니다. 신원을 확인했습니다. 하늘 요새로의 이동을 시작하겠습니다.
수송기가 이륙했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지상을 보며,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니 한순간에 감정이 파도처럼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비행이 가능한 변이체들이, 수송기의 존재를 확인하고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 초월체 ‘데미안’의 공격에 의해 경미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현재 선체 내구 96%, 비행 성능 97%.
“그래, 내 인생이 언제 쉬운 적이 있었겠어. 콩, 내가 올라가서 요격할 수 있을까?”
- 허가합니다. 플라즈마 보호막을 사용하겠습니다.
초록색 장벽이 생겼고, 그녀는 총을 들고 요격하기 시작했다. 지형적 이점을 토대로, 몇몇 변이체들을 떨어트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변이체들의 숫자는 갈수록 불어났다.
초기에는 열 마리 남짓했던 숫자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수백 마리로 불어난 것이다.
- 현재 선체 내구 73%, 비행 성능 67%
- 비상 시스템 가동.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송기의 속도마저 점점 느려졌다. 그녀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바다 한복판이다. 이런 곳에서 떨어진다면 영락없이 사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닷속에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를 보며,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크다. 현대에서 가장 거대한 생물은 고래. 하지만 저 그림자의 크기는 그 고래의 수십 배에 달하는 크기였다.
자신이 끔찍한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틀림없었다.
‘저건 뭐야?’
마침내, 수면 위에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흉측한 거대한 괴물. 그러한 육중한 무게에도 불구하고 마치 날치처럼 민첩하게 도약한 그것은 그녀가 타고 있던 수송기를 노렸다.
수송기의 속도는 빨랐지만, 단순히 빠른 것만으로 범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고··· 거대한 굉음과 함께 수송기의 절반이 뜯겨져 나갔다. 몰아치는 강풍. 그녀는 가까스로 버텨냈다.
- 현재 선체 내구 12%, 비행 성능 10%
- 비상 시스템 가동.
그러나 상황은 최악이었다. 이번의 공격으로, 수송기는 거의 파괴되다시피 했으니까. 라소미는 지상을 바라봤다.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때였다. 직전까지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소미는 자신이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닐까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중얼거렸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아니, 나쁘다고 해야 하나?”
“오빠?”
사내- 이진서는 어깨를 으쓱였다.
“오랜만이야. 하지만, 인사를 하기에는 시간이 없을 것 같고.”
그는 라소미의 몸을 붙잡았다. 그리고 단숨에 수송기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와 그녀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대략 1km 바깥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블링크(Blink)를 사용한 것이다.
이진서는 뒤를 돌아봤다. 마치 화라도 난 것처럼 녀석이 다시 바다에 깊숙이 잠수한 후, 튀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맑던 하늘에 먹구름이 끼었고,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쾅! 낙뢰가 쳤지만 그가 사용한 앱솔루트 배리어에 가로막혔다. 또다시 녀석이 튀어 올랐다. 이진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아공간 창고에서 핵미사일들을 소환해, 투하했다.
“나는 너 먼저 건든 적 없다?”
중얼거리면서, 이진서는 블링크로 현장을 벗어났다.
한발 늦게, 강렬한 폭발이 녀석의 몸속은 물론 바다 전체에 일어났다. 그는 뒤를 바라본다. 지진이 일어나고, 엄청난 물보라가 일어난다. 그러나 기프트 획득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 말은 아직 녀석이 아직 살아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부상 정도는 입었겠지. 핵폭발이 몸속에서 일어났으니···’
‘아니, 확신할 수 없을뿐더러··· 일단 라소미를 하늘 요새에 데려가는 게 급선무다.’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이진서는 라소미를 바라본다. 그녀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가자, 소미야.”
라소미는 꿈인지, 생시인지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응, 오빠.”
***
수송기의 AI는 라소미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내게 알렸고, 나는 급하게 ‘질주’에 올랐다. 그러나 레비아탄이 나타나는 순간, 깨달았다. 질주를 타고 갔다간 너무 늦는다는 걸.
결국,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캐논 슈터 기능, 그거 사람한테도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말 그대로, 텔레포트 마법을 활용해 대상을 날려버리는 마법. 나는 그런 캐논 슈터 기능을 사용해 근처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도박이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어디 남미의 오지 같은 곳으로 떨어진다면, 시간만 더 끌리는 일이니 말이다.
- 맞아요. 그런데 그거 정말 좌표가 랜덤이에요. 차라리 다른 방법을 알아보는 게···
때문에, 아나스타샤 역시 나를 만류했다. 그러나 나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정확히 말하면 통찰안이 판단을 내렸다. 유일한 길은 이것뿐이라는 강력한 확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성운의 가호를 이미 사용했기에, 옐레나를 소환할 수도 없었다. 내 표정을 본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행운을 빌어요.
그녀의 말을 마지막으로 내 몸은 그대로 튕겨 나갔다. 수천 킬로미터 바깥으로, 다행히 라소미의 근처로 떨어졌고, 시간 가속을 사용한 나는 그녀의 앞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아슬아슬했지만, 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엔··· 그녀를 구출했고, 녀석의 위협에서 벗어나 하늘 요새까지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라소미를 바라본다. 안도감과 한편으로는 기특함이 치밀어 올랐다.
결국 그녀가 미국에서 살아온 것은, 그녀의 자력이었으니 말이다.
“혜연아.”
왠지 모르게 조금 긴장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던 진혜연에게 말을 걸었다.
“네, 오빠.”
“소미한테 숙소 배정해줘.”
그녀는 라소미를 잠깐 바라보다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