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제이드와의 통화 이후, 라소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런 일리아티가 정말 일을 저질렀는지 확실치 않지만, 그의 말대로라면 그녀가 위험에 처했을 가능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미국에 한번 가봐야 하나 고민할 찰나, 뚝- 연결음과 함께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녀에게 안부를 물었다.
“소미야, 괜찮아?”
- 오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조금 당황한 듯한 그녀의 어조에, 나는 제이드와의 통화 내용을 차근차근 그녀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제이드가 말하길 대리어스를 죽인 게 예런이라던데?”
- 에이, 그건 인종 차별주의자들이 떠들어대곤 하는 찌라시야. 그때 예런은 나와 함께 있었는걸? 그리고··· 애초에 예런이 그와 20년 지기인데, 그를 왜 죽이겠어?
그녀의 말대로 20년 지기 친구 사이인 그가 대리어스를 죽였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그때 미국에서 봤을 때 딱히 둘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역시, 제이드가 그 ‘초월체’의 말에 속아 넘어간 것인가.
‘아니···’
사실 떠오르는 가능성이 하나 더 있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위화감. 평범한 위화감이라기엔, 무려 신화 등급 스킬 ‘통찰안’으로 느끼는 위화감이다. 그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서 나쁠 건 없을 것이다.
“소미야.”
- 응?
“우리가 살았던 아파트 이름 기억나?”
- 무슨 아파트?
“4년 전쯤, 우리 같이 들어갔던 신혼집 말이야.”
내 기억엔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아파트 구조마저 떠오른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그녀가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그 신혼집의 이름은 ‘금마 아파트’ 내가 날려버린 신혼집의 이름.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어째서 대답하지 못하는 거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의심은 점점 증폭된다.
‘라소미의 목소리를 흉내 낸, 혹은 외양을 따라 한 누군가라서?’
- 너무 오래된 일이라,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 그렇구나? 그러면 혹시···”
- 미안, 오빠, 피곤하다. 먼저 쉬어야겠어.
더 질문을 할 생각이었으나, 그녀 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마지막엔 당황한 듯한 기색까지 역력했다. 나는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증폭되던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대역을 내세운 것이라면, 소미는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는 건가.’
20년 지기인 대리어스마저 죽이는 마당에, 라소미를 죽이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나는 눈을 감았다.
‘제이드의 말이 사실이다.’
나는 이번에는 예런 일리아티에게 전화를 걸었다.
- 친구, 무슨 일이지? 드디어 내 이주 계획에 투자를 할 결심이라도 선 건가?
천진난만한 소리를 하는 그. 전화 통화만으로 속내를 읽지는 못하지만, 말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있다. 나는 그에게 질문을 던져, 내가 원하는 정보들을 얻을 생각이었다.
“어째서입니까?”
-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얘기해봐, 친구.
“어째서 라소미를 죽인 겁니까?”
- 그건 정말 오해야. 나는 라소미를 죽이지 않았어.
그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순순히 예런이 라소미를 죽이지 않았다고 받아들이기엔 내 질문이 다소 모호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라소미를 죽이라고 시킨 겁니까?”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거짓이었다.
“소미는 살아있습니까?”
- 그건 나도 모르지, 친구. 그녀가 요 며칠 새 보이지를 않거든.
애매모호한 대답.
“직접 가서 찾아도 됩니까?”
- 미안하지만 아무리 내 친구라 하더라도, 그건 명백한 월권행위야. 나는 우리가 서로 좋은 친구 관계로 남았으면 좋겠어.
“······”
- 잊지 마, 우리는 미합중국이라는 걸. 저 구닥다리 니콜라이의 러시아 따위와는 다르다는 걸.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 아니, 충고하는 거야, 친구.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관계는 수직 관계가 아니라 수평 관계다. 그 말인즉, 남 나라 사정에 이래라저래라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야.
나는 눈을 감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 미국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미국은 미국이었다. 만약 미국에서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핵이라도 뿌리는 날엔.
이쪽의 피해가 아예 전무(全無)하리라고 보장할 수 없다. 핵미사일의 위력을 이미 뼈저리게 겪어본 내가 아닌가. 게다가 저쪽이 보유한 핵이 고작 한두 개일 리도 없고.
예런 일리아티의 성격을 생각하면, 니콜라이처럼 핵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할 리도 없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야 존재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희망 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직접 나설 수 없는 이 상황이, 더없이 답답했다.
‘그러면 어떻게 한다···’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라소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 너와 그녀는 이미 헤어진 관계 아니었던가?
“헤어진 건 맞지만, 그녀 역시 내 사람입니다.”
-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군. 하지만, 진서, 나는··· 정말 라소미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는걸.
나는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속이 답답했다. 떠오르는 4년 전의 기억. 분명 그때의 ‘사랑’이라는 감정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퇴색됐지만 그녀를 바라는 마음 하나만큼은 여전했다.
그녀가 살아있으면 좋겠다, 그녀가 무사했으면 좋겠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그녀에게 5천만 기프트를 줬다는 것.’
5천만 기프트는 결코 적은 기프트가 아니다. 아니, 능력치 풀 강화를 하고, 신화 등급 장비 풀 세트를 맞추고, 전설 등급 장비까지 맞추고도 남을 기프트.
만약 그녀가 그 전부를 온전하게 그녀 스스로를 위해 투자했다면, 아무리 예런 일리아티라도 그녀를 쉽게 죽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온전하게 사용했다는 가정하의 이야기겠지만.
‘남을 돕기 좋아하는 그 성격을 생각하면, 그랬을 가능성은 다소 낮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희망 회로를 굴려보기로 했다. 아무리 부정적인 생각을 한들, 지금의 상황에 도움 될 것은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그 전에···’
수송기가 도착했다. 곧, 수송기는 지상에 가까워졌고, 그 안에서 누군가가 내려, 지상으로 착지했다. 거구의 흑인 남자,
“제이드.”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제이드였다.
사실 이렇게 그를 만나는 건 두 번째였다. 초창기에 강릉에서 처음, 이번이 두 번째. 물론 그는 알지 못하겠지만 일전에 TV 화면을 통해 우주선에 탑승한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그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하지만 무언가 갈망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에게 기프트 계약을 걸었다. 이제 그에게 투자할 시간이었다.
투자하기에 앞서, 그에게 물었다.
“얼마를 바라지?”
“···적어도 천만 기프트 이상은 투자해줬으면 고맙겠군.”
그렇게 말하는 그는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 너무 많이 불렀나?
그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바라는 대로 미국에 잠입해서 예런 일리아티를 죽이기 위해서는 고작 천만 기프트 정도로는 안 된다는 걸.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나이기에, 이번에는 지갑을 좀 더 열기로 했다.
“일억 기프트를 투자하지. 대신 노예 계약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제약은 걸 거야. 물론 상호 공격 행위 조항 역시 포함할 거고.”
“이, 일억 기프트?”
그의 입이 쩍 벌어진다. 그러나 나는 진심이었다. 신화 등급 스킬을 제외한 모든 걸 그에게 투자할 생각이었다. 그의 존재가 예런 일리아티의 미국에 해가 된다면 말이다.
리모델링을 마친 그는 수련장에서 몇 번 수련을 마치고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곧 미국행 수송기에 올랐고, 쏜살같이 미국으로 향했다.
나는 그가 제대로 트러블(Trouble)을 일으켜주길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이젠 나도···’
나만의 트러블 메이커를 하나 구할 시간이다. 나는 허공에 중얼거렸다.
‘영령 소환.’
[영령 소환(G)을 사용합니다.]
[계약된 상급의 영령 ‘대마도사, 옐레나’를 불러옵니다.]
“옐레나, 부탁드립니다.”
“···갑자기 뜬금없이 뭘 부탁한다는 거야?”
“구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혼내주고 싶은 이들도 있고요.”
“뭘 하면 되는데?”
나는 품속에서 장비를 꺼냈다.
<정체불명의 흑마법 모자(L)>
<정체불명의 흑마법 로브(L)>
<정체불명의 흑마법 바지(L)>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칠흑의 천옷들을 바라보며, 옐레나가 보인 반응은··· 의외로 반가움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병수에게 들었습니다. 과거에 네크로맨서로 활동한 적이 있으셨다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인다.
“우리 병수, 입이 좀 싸네. 그래, 맞아. 나는 네크로맨서로 활동한 적이 있지. 물론 고작 일 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말이야.”
연병수에게 전해 듣기로, 그 당시의 그녀는 대륙에 있어서 ‘재앙’이었다고 한다.
하기야, 사실 그녀가 굳이 네크로맨서 짓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녀가 가진 힘은 충분히 재앙이지만 말이다.
“정체가 드러나지 않게, 부탁드립니다.”
“시간은 고작 한 시간. 아니, 정확히 59분 40초.”
그녀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흘러가던 시간이 멈췄다. 타임 스톱(Time Stop)? 그야말로 책으로만 봤던, 지금의 나는 물론 연병수조차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고위 마법이다.
“오랜만에 제대로 깽판 한번 쳐볼까.”
짤막하게 중얼거린 그녀는 정체불명의 옷 세트들을 걸친다. 그녀를 바라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안면 인식이 제대로 안 된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통찰안을 사용하자,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건 통찰안을 사용해서 그런 것일 뿐.
나를 제외한 플레이어들은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내 완벽하게 옷을 걸치고, 거울을 바라보며 흑마법사 포즈를 몇 번 취하던 그녀가 하얀색 광채와 함께 사라졌다.
텔레포트를 사용한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이미, 미국에 도착했을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갔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그래서 일단은 조용히 기다기로 했다. 만약 그가 항의한다면.
그가 시치미를 뚝 뗀 것처럼, 나 역시 시치미를 뗄 생각이었다. 반응은 고작 몇 분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플레이어들이 하나둘씩 동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찍어 올렸기 때문이다.
[Holy Shit. 언데드 군단의 출현. 저들은 과연 변이체가 맞는가?]
그녀가 이끄는 언데드 군단이 플레이어들을 습격했고, 큰 피해로 이어졌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처음 보는 언데드 군단의 출현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고.
하기야, 동영상으로 보고 나니 나도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물량이 한두 마리가 아니다. 수백, 수천, 수만··· 그 숫자는 수십만을 헤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