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그냥 날 보내줘요. 오빠한텐 말 안 할 테니까.”
예런 일리아티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라소미에게 태연한 투로 말했다.
- 미안하지만, 난 사람을 잘 믿지 않아.
“대체 왜 나를 죽이려 하는 거죠?”
- 네가 내 계획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지. 그리고··· 이제 우리 둘 다 그만둘 때는 지났잖아, 에밀리?
“나는 당신의 계획에 반대한 적도 없다고. 젠장, 엿이나 먹어요.”
그의 위선적인 말투에 토악질이 쏠리는 걸 느끼며, 라소미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후.’
가볍게 한숨 쉰 그녀는 스마트폰을 들어 이진서의 번호를 눌렀다. 혹시 하고 시도해봤지만 역시나 연결조차 되지 않았다. 예런 일리아티가 무언가 수작을 부렸음이 틀림없었다.
‘하기야, 진서 오빠가 그를 적대하면, 그로서는 막아낼 수단이 없으니까.’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스마트폰을 던져버리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아무리 그녀가 무력을 가졌다지만 그녀를 쫓는 예런 일리아티의 수족들을 모두 상대하기는 무리였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세라에게 해코지를 하면 안 될 텐데···’
친한 사람들의 걱정을 해봤지만, 제 코가 석 자인 그녀였다.
***
정민혁은 사뭇 긴장 어린 표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다른 그룹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긴장감이 고조되던 바로 그때, 그의 입이 열렸고,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블랙 마켓.”
허공에 차원문이 열렸다. 높이는 건물의 3층 높이 정도고 너비는 그 절반 정도 되는 거대한 차원문이었다. 차원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옆에 있던 진혜연이 흠칫 놀랐다. 그룹원들 역시 각자의 병장기를 꺼내 그에게 겨눴다.
차원문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내의 외모가 단순히 흉측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변이체를 닮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최하급, 하급 변이체를.
하지만, 나는 그의 정체가 변이체가 아님을 깨달았다.
<우주상인, 트레이>
손을 들어 그룹원들을 제지했다. 곧 사내- 트레이의 입이 열렸다. 익숙한 한국어였다.
“상처받게 왜 놀라고 그래? 아, 내 생김새 때문에 그런 건가?”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청년의 그것과 같아, 더없이 이질적이었다. 나는 그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진혜연 역시 순순히 사과했다.
“죄송해요.”
“이해해, 우리 구울(Ghoul)족을 처음 본 이들은 대개 그런 반응이니까. 여긴 어디지?”
“지구입니다.”
“지구? 지구면 그··· 최근에 발라르에게 넘어간, 태양계에 속한 행성?”
그렇게 말하는 그는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발라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맥락상 채굴자를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동안 베일이 싸여있던 그의 이름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나를 소환한 너희들은··· 발라르의 일꾼들인가?”
나는 긍정하며 그에게 되물었다.
“아마 맞는 거 같습니다. 발라르는 어떤 존재입니까?”
“기프트를 모으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계의 신격이라고 들었다. 최근에 행성 하나를 구매했다는 것. 그리고 그런 행성을 여러 개 보유하고 있다는 것 정도. 그 이상은 나도 몰라. 그를 숭배하는 신관 놈들이라면 모를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쨌거나··· 여기가 발라르의 행성이라면 물자는 풍족하겠군.”
다음 순간, 그는 휘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차원문 안에서 마차 여러 대가 등장한다. 마차에는 짐들이 천으로 덮인 채 실려 있었는데, 그 물건들의 종류는 다양했다.
“한번 거래를 해보자고.”
무기류부터 시작해서 잡화류, 심지어 살아있는 생물들도 보였다. 짐 위에서 하품을 하는 귀여운 고양이를 발견한 진혜연이 슬그머니 다가갔다. 그러자 트레이가 그녀를 제지했다.
“와일드 혼은 1급 위험 생물이야, 이 아가씨야. 그러다 손목 날아가.”
그의 말에 나는 안력을 키워, 고양이를 바라봤다.
<와일드 혼>
- 성장기
- 고양이 모양의 환수. 출중한 전투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주인을 잘 따른다고 한다.
“귀여운데, 힝··· 이건 얼만데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100트레이.”
“트레이?”
“아, 블랙 마켓에서는 기프트 대신 내 이름을 본떠 만든 트레이라는 코인을 사용하지.”
“기프트로 바꿀 수 있어요? 전 기프트밖에 없는데?”
“아니, 트레이 코인은 나와의 물물 교환으로만 얻을 수 있다. 나보고 발라르의 행성에서 기프트로 거래하라고? 나는 그런 자살 행위를 하긴 싫거든? 이쪽 물건 보여줬으니까, 그쪽 물건들도 보여줘 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공간 창고에서 물건들을 내려놨다. 만약을 위해 준비해놓은 물건들이었다. 그때 생각했었던 대로 농작물, 음식, 이제 더는 안 쓰는 장비들을 준비해뒀다.
그는 흥미로운 얼굴로 물건들을 살폈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십니까?”
“모두 합쳐서 2,000트레이에 사도록 하지.”
그는 품에서 동전을 꺼낸다. 어딘가 으스스한 느낌을 가져다주는, 그의 얼굴이 그려진 동전이었다.
“2,000트레이가 얼마 정도인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저 와일드 혼 하나가 100트레이야. 그리고 저 단검이 50트레이고.”
<장인이 공들여 만든 미스릴 단검(U)>
‘유니크 장비 하나가 100~200 기프트라는 걸 생각하면 바가지 같긴 한데.’
어차피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처분할 수 있다는 장점을 생각하면, 바가지라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 상점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 특히 저 와일드 혼과 같은 생물류도 있고 말이다.
“다들 물건 한번 골라보십쇼.”
“예!”
내 말에 그룹원들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2,000트레이를 나름 알차게 썼다.
정민혁은 골동품을, 진혜연은 눈여겨보던 와일드 혼을, 김하나는 가축들을, 서문주는 약품을, 농사꾼 대표인 김희승은 상점에서 구매할 수 없는 새로운 작물들을 구매했다.
“자, 가자, 이것들아.”
꿀꿀.
<품종 개량된 야생 돼지>
- 시미르에서 품종 개량된 야생 돼지.
- 환경 적응력과 번식력이 무척이나 뛰어나다.
야생 돼지 암수 한 쌍이 김하나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간다. 거래를 마치자, 우주 상인 트레이는 차원문을 통해 사라졌다. 다음에 또 만나자는 기약과 함께 말이다.
“재사용 대기시간은 일주일이랍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일주일마다 꾸준히 블랙 마켓을 사용해, 거래를 할 생각이었다. 그와 친분을 쌓으면, 어쩌면 채굴자에 대한 정보를 더 알 수도 있으리라.
‘발라르···’
그 이름 석 글자를 조용히 되뇔 뿐이었다.
***
최상급 변이체들이 상잔한 끝에 탄생한 초월체들은 플레이어들을 습격했고, 러시아도 그 범주에서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물론 이진서에게 다량의 기프트 지원을 받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월체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러시아의 플레이어들의 숫자는 날이 갈수록 줄어갔다. 러시아 대통령, 바실리는 자신의 판단 미스를 인정해야만 했다.
“지금이라도 한국에 합류해야 해.”
그는 이 상태로 더 버티는 것은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최상급 변이체가 초월체로 진화한 지 고작 십 일째. 그러나 상황은 최악이었고,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하물며 우기(雨期)야 언제 끝난다는 기한이라도 있었지, 이건 저 초월체들을 모두 처치하기 전에는 영영 계속되는 것이 아닌가. 그의 말을 들은 스텔라가 푹 한숨을 쉬었다.
“이럴 거였으면, 진즉 하는 게 나았지. 그리고··· 그가 우리를 받아줄까?”
“하지만 그것 이외엔 방법이 없다. 그를 제외하면, 미국밖에 없는데··· 미국에서 우리를 받아줄 확률보단, 그가 우리를 받아줄 확률이 높아 보이니까.”
“그건 사실이지만··· 최대한 감정에 호소해보는 수밖에···”
물론 운 좋게 합병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그대로였다. 두 그룹이 쉽게 섞일 리 없다는 문제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진짜로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아무렴 핍박받는 것이, 죽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들은 또다시 한숨을 흘렸다. 그때였다.
“바실리.”
“무슨 일이야. 니아.”
니아라 불린 하얀색 머리 여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플레이어를 발견했어.”
“플레이어?”
바실리와 스텔라는 의문 어린 표정을 짓는다. 곳곳에 초월체가 나타나고 있는데 플레이어라니.
“도플갱어는 아니고?”
“아냐, 도플갱어는 아니야. 그는··· 자신을 제이드라고 소개했고, 미국에 돌아갈 기프트를 지원받길 간절히 바라고 있어.”
“이 상황에 무슨 지원···”
“그리고 만약 기프트를 지원할 수 없다면, 이진서에게 대신 연락해 달라고 그러던데?”
“그러면···”
스텔라가 거들었다.
“이야기가 달라지지.”
“이럴 때는 아주 둘이 죽이 잘 맞아.”
“그를 당장 이곳으로 안내해.”
구실을 만들어서도 연락해야 할 판국에, 오히려 잘됐다 싶은 그들이었다.
***
- 제이드가 지원이 필요하답니다.
“제이드?”
분명 나는 소프 전 함장에게 그의 근황에 대해 전해 들었다.
그는 우주 비행사로 실험에 참여한다고 했었지. 그런데 그런 그가 어째서 러시아에서 지원이 필요하다는 걸까?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드를 바꿔주실 수 있겠습니까.”
- 예, 이따 드릴 말씀이 있는데 끝나고 드려도 될까요?
잔뜩 긴장한 바실리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할 말을 어렴풋, 짐작할 수 있었다. 곧 화면 너머로, 거구의 흑인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외양은 과거와 큰 차이가 없었지만, 눈빛 하나만큼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 이진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제이드?”
- 나는···
그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나는 조금 놀란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가 겪은 일들은 너무나도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우주선이 추락하고, 간신히 살아남았더니 초월체에 의해 포로가 됐다는.
그런데 그 초월체가 그를 죽이거나 잡아먹기는커녕, 오히려 그에게 잘 대해주고, 아버지를 죽인 흉수(兇手)까지 알려줬다니. 믿기 힘들지만, 통찰안은 그의 말을 ‘진실’이라 판단했다.
- 그래, 그녀는 내게 예런 일리아티가 내 아버지를 죽였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예런 일리아티가 대리어스를 죽였다는 소리가 된다.
물론··· 그의 말이 거짓일 가능성이 존재하긴 했다. 초월체가 거짓을 말했고, 그가 그것을 진실이라 받아들였다면 진실이라 판단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초월체 아닙니까?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의문을 떠올렸다. 과연 초월체들은 모두 다 인간에게 적대적일까? 개 중 안 그런 개체들도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장영하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 물론 내가 속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래서···
영상 속 너머의 그는 무릎을 꿇었다.
- 부탁한다. 나를 도와줘라.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봐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