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눈을 떴을 땐 한나절이 흘러있었다. 내 방을 들른 진혜연이 말하길, 죽은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고. 그래도, 충분한 휴식을 취한 덕인지 육체적, 정신적 피로는 완전히 풀렸다.
눈앞을 바라본다. 뽀얗게 김이 서린 욕실 거울 안에는 육체가 있다. 초콜릿이 생각나게 만드는 구릿빛 피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이상적으로 자리 잡힌 근육.
그야말로 남자라면 누구나 가지길 염원하는 이상적인 육체. 바로 내 몸이다. 그동안 대충 씻어서 자세하게 관찰한 적은 없었는데··· 바라보고 있으니 나르시시스트로 전직해버릴 것 같다.
이내, 내 눈은 천천히 거울 속에 비친 ‘눈’으로 향한다. 황금색으로 선명하게 빛나고 있는 눈. 이번에 얻은 통찰안. 가볍게 안력을 키우자, 마치 증강현실처럼 정보가 떠오른다.
[이진서]
- 능력치
(상세 보기)
- 보유 스킬
(상세 보기)
- 보유 기프트 : 1,445,767,556
얼핏 보기엔 플레이어 정보와 판박이다. 굳이 정의하자면 플레이어 정보의 열화 버전 정도로 볼 수 있을까. 그러나 내가 볼 수 있는 건 비단 내 정보뿐만이 아니다.
다른 이들의 정보 역시 볼 수 있게 됐다. ‘사물의 본질을 시각화할 수 있다’라고 적혀져 있던 내용은 아마 이런 의미였던 모양이다. 물론 이게 끝일지는 차차 알아봐야겠지만 말이다.
생각하던 나는 가볍게 마력을 방출해, 물기를 날려버린 후 바깥으로 나와 옷을 걸쳤다. 침대에 앉아 있는데, 똑똑- 누군가가 노크했다. 일어나 문을 열자, 정민혁이 서 있다.
[정민혁]
- 능력치
[근력 88.000] [민첩 87.500]
[체력 87.500] [지력 80.000]
[마력 102.000] [행운 77.000]
- 보유 스킬
<기계 정령, 에코(L)>
<뇌신 소환(L)>
<해신 소환(L)>
<솔로몬의 77악마 소환(L)>
<숭고한 희생(L)>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L)>
<황제의 통솔력(L)>
- 보유 기프트 : 7,866,086
‘얘는 아예, 소환사로 전직했나? 뭔 소환 스킬이 이렇게 많아?’
기계 정령, 에코와 뇌신 소환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해신 소환이나 솔로몬의 77악마 소환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는 오늘 처음 알았다. 소환 스킬만 무려 네 개인 셈.
‘숭고한 희생’이라는 스킬도 소환 스킬을 보조하는 스킬 같고.
“형님, 눈이···”
“근데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저건 뭐야?”
내 말에 그가 조금 눈을 크게 뜬 채 말했다.
“아- 스킬 카드 탐색 중에 발견했는데 흥미로워서 습득했습니다. 형님도 제 팔로워가 되시겠습니까?”
“팔로워 되면 무슨 혜택이 있는데?”
“얼마만큼 후원했느냐에 따라 등급이 정해지는데··· 후원을 하나도 하지 않은 팔로워 기준으로 모든 능력치가 0.01 상승한다고 합니다. 최대 팔로워 숫자는 100명이고요.”
요컨대, 기프트 계약의 역(易)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 같다. 팔로워가 되기만 해도 모든 능력치 0.01. 뭐, 나쁘지는 않네.
“그런데 형님, 제 플레이어 정보는 어떻게 보신 겁니까? 아··· 그 통찰안 스킬 때문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그에게 숨길 이유는 없었다.
“그래. 그나저나 팔로워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냥 팔로워 된다고 말하면 되나?”
“예.”
[플레이어, 정민혁의 팔로워가 됐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0.01 상승합니다.]
[100,000,000기프트를 후원했습니다.]
[후원 등급이 갓 티어가 됐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 상승합니다.]
“1억에 고작 1?”
1억에 모든 능력치 1, 단일 능력치로 따지면 6이 오른 셈이지만··· 기프트 계약을 떠올려보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비효율적이다. 그래도 아무렴, 무상 지급보다야 낫지.
“역시 형님이 최고십니다.”
그의 쌍 따봉을 받으며 나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그에게 운영비용이라는 명목으로 기프트를 줄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냐?”
“혜연이 부탁을 받아, 형님이 살아 계신지도 확인할 겸··· 그리고 브리핑도 드릴 겸 겸사겸사해서 말입니다.”
“브리핑?”
“형님이 주무시는 동안 저희 하늘 요새는 러시아를 넘어, 태평양 연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초월체 열 마리의 침입을 받았고, 성공적으로 격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진혜연이 말을 해주지 않았기에, 이건 또 몰랐다.
“잘됐네. 부상자는 없고?”
정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플라즈마 생성기 한 기와 승주 누나의 센트리건 여러 기가 파괴되긴 했지만, 플레이어의 피해는 전무합니다.”
“그래, 인명 피해만 없으면 됐지.”
“그리고··· 신화 등급 스킬 카드 두 장의 주인을 정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끼리 토론해봤는데, 다들 서로 양보하려고만 하기에···”
내가 뽑은 신화 등급 스킬 카드는 총 다섯 장.
그중에서 ‘블랙 마켓’, ‘환상의 꽃, 라플레시아’는 내가 습득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스킬 슬롯도 없기에 그림의 떡이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신화 등급 스킬 카드를 서로 양보하려 한다고?
“내숭은 아니고?”
농담 반, 진담 반의 물음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숭이든 어쨌든, 금덩어리 때문에 우애 상한 형제 이야기처럼··· 빨리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음··· 어차피 너 스킬 슬롯 하나 남잖아? 블랙 마켓은 민혁이, 네가 습득하는 걸로 해. 그편이 나도 편하고.”
그는 조금 감동 받은 눈으로 말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뭘, 새삼스럽게. 그리고 환상의 꽃, 라플레시아는··· 누가 습득하지?”
환상의 꽃, 라플레시아가 어떤 스킬인지는 설명만 봤을 뿐이다. 누가 습득하는 게 가장 나을까. 곰곰이 생각에 잠긴 내게 정민혁이 입을 열었다.
“사실 자원자가 한 명 있긴 합니다.”
“누군데?”
“김하나. 비전투원이라서 보류하긴 했는데···”
“왜 하나 씨는 누나라 안 불러? 승주 씨는 누나라 부르고?”
“제가 누나라 부르면 소름 돋는다던데요?”
음··· 이건 조금 이해할 것 같기도 한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하나 씨가 습득하는 걸로 하자. 그동안 고생 많이 했잖아?”
말이 비전투원이지, 그녀가 우리 그룹에 기여하고 있는 바는 상당하다. 당장 우리 그룹의 식사는 전부 그녀가 이끄는 요리조에서 책임지고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그냥 요리도 아니고 버프 요리고, 나도 그 혜택을 많이 봤다.
그런 그녀에게 신화 등급 스킬을 주는 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정민혁은 이의는 없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 씨는 왜 습득하고 싶대?”
순수한 의문이었다. 요리 스킬을 제외하곤 다른 스킬에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던 그녀가 느닷없이 왜 신화 등급 스킬에 꽂혔단 말인가?
“어, 그게 말입니다.”
그는 천천히 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란 다름 아닌···
“···라플레시아로 요리를 하고 싶다고?”
“얼핏 들은 바에 따르면 VVIP 상점에서도 구할 수 없는 식재료인 모양입니다.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스킬을 습득하는 것밖에 없다고···”
“대단하네.”
그녀는 요리에 진심인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걸로 브리핑은 끝입니다.”
“수고 많다, 너도.”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는, 입을 열었다.
“블랙 마켓 습득하고, 사용하면 말해. 나도 구경하고 싶으니까.”
암시장. 어떤 형태일지, 어떤 물건을 구매하고, 판매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형님. 스마트폰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내, 그가 방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겨진 나는 드물게도- 자극을 받았다. 리더 일을 성실히 하는 정민혁에게, 요리에 누구보다 열정 있는 김하나에게, 아니면 둘 다에게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이렇게 한가로이 쉴 때가 아니지.’
이럴 시간이 없다. 내가 습득한 나머지 두 개의 신화 등급 스킬- ‘스킬 개조’와 ‘동화 세계’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
마치 회광반조(廻光返照)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비를 쏟아내던 하늘이 개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태양 역시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세 달 간의 우기(雨期)가 마침내 끝난 것이다.
그러나 저스틴과 그의 동료들은 기뻐할 수 없었다. 태양이 나타났다고 해서, 변이체가 사라진 건 아니었으니까. 변이체들은 여전히 건재한 채, 그들을 죽이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소파에 앉은 채 서로를 마주 봤다. 앞으로의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마른 담배를 입에 문 채 잘근잘근 씹고 있던 저스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지?”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들이 있는 필리핀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땅이었다. 국토의 대부분은 물에 잠긴데다, 외부에서 변이체 역시 너무 많이 유입됐기 때문이다.
그들로서는 변이체를 상대할 여력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니콜은 유일하게 반대 의사를 내비쳤다.
“우리가 여기를 왜 벗어나? 여긴 상수님이 예루살렘이라 말한 성지인데. 그분이 돌아오실 때까지 우리는 이곳에서 기도드리면서 기다려야 해.”
듣고 있던 미하일이 짜증 난 목소리로 말했다.
“니콜, 제발 그런 미친 소리는 작작 하고. 현실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정상수는 천하의 개새끼야.”
“상수님을 욕하지 마. 이 불신자들아! 너희들 눈엔 내가 미친년 같지? 상수님은 반드시 돌아오실 거야··· 돌아오실 거라고!”
그들은 한때 상수교에 몸을 담았다.
그리고 정상수가 그들을 버리고 도피한 지금, 그들은 버려졌다. 사실 엄밀히 말해 상생 관계였으니 버려졌다는 표현이 옳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입장에선 그랬다.
“후, 이러면 우리는 니콜, 너를 놓고 갈 수밖에 없어.”
“듣던 중 반가운 소리야. 나도 불신자들이랑 함께 할 생각은 없어.”
니콜은 오히려 잘됐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바라보던 멤버들은 한숨을 쉬었지만, 그녀를 붙잡지는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갈라설 때임을 느낀 것이다.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안전 가옥을 회수하지는 않을게.”
정말 떠날 줄은 모른 듯 그녀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더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
그들이 벗어난 후, 홀로 남겨진 니콜은 바깥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산이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지만 그 덕에 물에 잠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하늘을 향해 간절하게 기도했다.
“상수님이시여, 제발 저희를 이 재앙에서 구해주소···”
첨벙.
물이 튀는 소리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물고기인가?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 앞을 바라보는 순간, 거대한 무언가가 튀어나와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녀는 물론, 그녀가 있던 산의 일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