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이진서 대신 ‘갈락시아의 도서관’을 습득한 이는 이제원이었다.
‘영화 촬영하느라 어차피 대부분 쉘터에 있을 텐데, 제가 습득하는 게 나을 거 같아요.’
그런 이유로 자원한 그녀를, 이진서는 받아들였다. 그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도서관을 상시 유지하기 위해서 마력 능력치가 높아야 한다’라는 조건 역시 충족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이제원은 하늘 요새의 중앙에 도서관을 세웠다. 비록 이진서가 세운 것보다 그 크기는 작았지만 안정적이었고, 기존의 이용자들 역시 만족해하며 도서관을 이용했다.
그녀는 소모임도 만들었다. 그룹원들끼리 친목을 다짐과 동시에, 학구열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독서 토론 모임, 트리비아(Trivia)는 그중 하나였다. 독서 토론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의구심을 품은 이들이 많았지만 그룹원들이 대거 몰리며 그 의구심은 사라졌다.
간부인 진혜연, 김하나, 박승기는 물론 이프리트를 마음대로 소환하는 라우라, 심지어 도플갱어인 장영하마저 모임에 회원으로 가입할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는 없었다.
트리비아는 화요일에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첫 모임 날이었다.
“지금부터 우리 트리비아(Trivia)의 독후감 발표 시간을 가지겠어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회장인 제가 먼저 발표할게요.”
짤막하게 말한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제가 읽은 책은 ‘방랑기사 카론’이에요. 폭식의 마왕에게 공주가 납치돼, 그녀를 구한 호위기사의 이야기죠.”
그녀는 ‘방랑기사 카론’의 간략한 줄거리와, 인상 깊었던 점, 느낀 점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예요. 질문하실 분 있나요?”
“다음으로 차례를 넘길게요.”
박승기에게 슬며시 눈짓을 하자, 그가 헛기침을 하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흠흠, 내가 읽은 책은 낚시의 대가, 베어본스의 어류 서적으로···”
박승기 이후 다섯 명이 추가로 독후감 발표를 마쳤다. 차례는 이제 연병수에게 돌아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연병수에게 몰린다. 그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발표할 책은 ‘레오니아 왕국의 부흥과 쇠퇴’입니다.”
“재미없겠네.”
고경표가 무의식적으로 말했다가, 소리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입을 막았다.
“그럴지도 모르죠. 레오니아의 3대 왕··· 레오니아 3세는 소싯적부터 마법에 대한 재능이 대단했습니다. 고작 열여섯의 나이에 ‘마도사’의 위를 얻을 정도로 말입니다.”
“열여섯의 나이에 마도사의 위를 얻을 정도면 얼마나 대단한 거야?”
“질문은 나중에, 일단은 이야기에 집중하지 그래요?”
이제원이 눈을 흘기자, 고경표는 입을 앙다물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아무리 레오니아 2세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곤 하나 고작 열여섯의 나이에 마도사면··· 저에 비견될 재능이라 할 수 있겠네요.”
듣고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병수가 마법의 천재라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마법’이라는 분야에 한해선 이진서조차 한 수 접어주는 그였으니 말이다.
“그런 엄청난 재능을 가진 마도사는 부왕의 지병으로 성년이 되기 전에 왕위에 올랐고, 그가 이끄는 왕국은 역대급의 번성기를 맞이하게 되죠. 하지만 왕위에 오른 지 채 5년이 안 돼 레오니아 3세는 돌연 사라져버리고, 짧은 레오니아 왕국의 번성기 역시 끝나게 됩니다.”
“이유가 뭔데?”
“그 이유에 대해선 사람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신의 눈’ 때문이라고 언급을 해요.”
“신의 눈?”
“이 이상의 내용이 안 나와 있어서, 갈락시아의 도서관에 있는 서적을 모두 뒤진 결과, 놀라운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어요. 몇몇 책에서 이 책과 비슷한 묘사의 ‘눈’이 등장한 거죠. 부르는 이름은 제각각이지만, 세상을 집어삼킬 수 있을 것만 같은, 황금색의 눈. 요컨대, 이 책의 저자는 그 레오니아 3세가 그 눈을 연구하다가 휘말렸다고 주장한 겁니다.”
“단순히 추측일 수도 있잖아?”
“예, 그렇죠. 추측일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추측이든, 아니든···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사람은 분수를 알고, 욕심을 정도껏 부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대단했던 천재가 한순간에 사라질 거라고는 본인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신의 눈이라··· 그래서 그 진짜 이름이 뭔데?”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부르는 이름은 제각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나마 공인인 대현자, 갈락시아는 이 눈을 ‘통찰안’이라 부르더군요. 어쨌거나, 다음 차례로 넘길게요. 미라야?”
최미라가 긴장한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읽은 책은···”
***
수천, 수만 마리의 미라들이 해일처럼 내게 달려든다. 붕대 감은 그 미라 맞다. 블리자드. 가볍게 중얼거리자, 거대한 공동에 눈보라가 몰아치더니 그들의 몸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러나 얼어붙은 몸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금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레오니아 3세]
- 살아생전엔 고대의 왕이었으나 통찰안의 시험에 실패해 저주받은 존재.
- 마음대로 죽은 자의 시체를 일으킬 수 있는 강력한 주술 능력을 가진 머미 로드.
그를 지긋이 바라보자, 정보가 떠오른다.
“레오니아의 꺼지지 않는 성화가 있는 한, 짐의 군단은 쇠하지 않는다.”
그의 말이 단순한 허세는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나는 미라를 수십 번 죽였다. 베고, 태우고, 지지고, 이번엔 얼려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미라들은 그때마다 번번이 되살아났다.
그의 말처럼 정말 죽지 않는, 불사(不死)의 존재인 것처럼 말이다. 진짜 불사인지, 아니면 한도가 정해져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멸겁의 지팡이를 활용한 혼돈의 불로도 피해를 입지 않는다.’
역시 방법은 하나뿐인가. 저 미라들을 소환한 ‘레오니아 3세’를 죽이는 것. 물론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해서 쉬운 건 아니다. 애초에 쉬웠다면 진작 녀석을 죽였을 것이다.
전투 경과 후 무려 48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나는 녀석을 죽이는 데 실패했다.
‘장비만 있었어도, 아니 하다못해 스킬만 사용할 수 있었어도 수월하게 처치했을 텐데.’
애석하게도 이 공간 내에선 스킬도 사용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슬슬 지친 모양이구나. 짐에게 무릎을 꿇어라. 너 정도의 전사면 짐의 군단에 들어오기에 충분하다.”
“스카우트 제의는 감사한데, 그럴 거면 차라리 내 그룹에 들어오는 게 어떻습니까?
“오만한 작자로다. 나를 영입하겠다는 거냐? 감히 나, 레오니아 3세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는 여태 없었거늘.”
끝나지 않는 입씨름을 주고받던 나는 바닥에 있는 단검을 쥐어 그에게 던졌다. 그는 단검을 쳐내고는 미라들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모습에 참다가, 한마디 내뱉고 말았다.
“황제인지 왕인지 프라이드는 대단한데, 빤스런도 대단하네.”
그를 놓치진 않았지만, 미라를 무시하고 그만 쫓을 정도로 내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미라들을 향해 주문을 외우고 뒤로 몸을 날린다. 뒤늦게 번개 다발이 미라들에게 떨어졌다.
파지직. 감염되듯 전류가 연쇄적으로 퍼져나간다. 수백 마리의 미라들이 검게 그을린다. 물론 의미 없는 소모전에 불과했다. 체력과 마력 상태를 점검한 후 나는 블링크를 사용했다.
그러자 레오니아 3세 역시 블링크를 사용해 피했다.
직접 당하고 있는 입장에선, 정말 화가 치밀어오를 정도로 얄미웠다. 나를 맞이하는 건 미라들뿐. 미라에게 검을 빼앗아 검을 휘두른다. 베고, 베고, 베고···
그 사이, 나와 거리를 벌리는 데 성공한 레오니아 3세가 주문을 외운다. 다음 순간, 하늘에서 붉은 태양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여러 번 상대했던 마법이다.
미티어 스트라이크와 비슷한 화염 마법이지만, 단일 대상에게 보다 큰 데미지를 입히는 마법, 썬 버스트(Sun Burst).
피하기엔 늦었다고 생각하고 앱솔루트 배리어를 사용해 막아낸다.
앱솔루트 배리어가 사라졌지만, 붉은 태양 역시 모습을 감췄다. 남은 것은 달궈진 대지와 아이스크림처럼 녹으면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무수한 미라들 뿐.
하지만···
‘불안하다.’
상황은 호각임에도 불구하고, 초조한 건 이쪽이었다.
이 통찰안의 시험에 제한 시간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무려 이틀 동안이나 녀석을 상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루프(Roof)를 깨지 못했다는, 항상 결과는 같았다는 불안감···
‘당장이라도 전력을 다해 녀석을 상대하고 싶다.’
지금까진 체력과 마력을 적절히 안배해가며 싸워왔다. 지금이라도 전력을 다해 상대하는 게 맞지 않을까? ···아니, 전력을 다해도 녀석을 죽이지 못한다면 패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생각을 이어나가면서도, 내 몸은 기계적으로 미라들을 상대하고, 레오니아 3세를 쫓고 있었다. 수없이 반복하면서 이 행위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너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 짐은 불멸의 존재니까.”
입으로는 부정했지만, 머릿속으로는 점점 그의 말에 긍정하고 있었다.
***
치열한 전투였다. 라소미도 몇 번이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하반신이 날아간 채, 상반신만 남은 윤민수의 몸.
실수로 그녀의 분신을 복사해 형체를 잃어버리고 검은 형체로 변했다가 갈기갈기 찢겨나간 도플갱어 군주의 시체 파편. 그녀는 흘러나오는 피를 지혈하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물어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예런.”
- 에밀리?
“어째서 나를 죽이려 한 거죠?”
- 착오가 있었어.
“그러면 지금 윤민수가 단독으로 했다는 말인가요?”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애써 희망회로를 굴려보려 애썼다. 인간이라면 당연한 마음이다.
- 아니, 에밀리, 내 판단에 착오가 있었다는 말이야. 네가 그렇게 강할 줄 알았다면 더 많이 보냈어야 했는데.
“···피도 눈물도 없는 놈.”
라소미의 입에서 욕설이 절로 흘러나왔다.
- 칭찬 고맙군.
“그래서, 나를 죽이려 한 이유가 뭐예요? 죽을 땐 죽더라도 듣고 싶네.”
- 계획에 방해돼서?
“나는 당신의 계획을 방해할 생각이 없었어요.”
-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 신분은 문제가 된다. 너는 이진서와 상당한 친분이 있지.
“오빠가 방해가 된다는 건가요? 당신은 오빠를 좋아했던 거 아니었나요?”
- 나는 라소미, 너 역시 좋아한다고. 능력 있는 이들을 싫어할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과 계획에 방해가 되냐 안 되냐는 건 차이가 존재하거든.
“잘 알겠네.”
더 이상 존댓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은인이 아닌, 그녀를 죽이려 한, 그녀가 아끼던 이를 죽인 원수다. 그에게 예의를 갖출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이제부터 도망칠 거야. 잡을 수 있으면, 잡아봐.”
- 천천히 쫓도록 하지.
그녀는 예런의 느긋한 말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그녀는 들고 있던 십자가로 윤민수의 상체를 마저 후려 버렸다. 콰직. 그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대로 멈췄다. 허무하다면 허무한 그의 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