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지구를 일주하다시피 한 후에야 초월체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방심하지 않고 몇 번의 시험을 거쳐 녀석들이 더 이상 따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나는 하늘 요새로 향했다.
그 사이, 변이체들의 침입이라도 받은 모양인지 군데군데 전투의 흔적이 생겨있다. 그룹원들은 무장한 채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내 존재를 확인한 그들의 표정이 환해진다.
- 리더다!
- 리더가 무사히 돌아오셨어!
그들이 만세를 하며 환호성을 지른다. 그들에게 화답하듯 한 바퀴 돌아 활주로에 착지한 나는 질주에서 내렸다. AI 자동 운전으로 격납고까지 이동하는 걸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룹원들이 서 있다. 그들의 선두에 서 있는 건, 한승주였다. 웃으면서 그녀에게 농담조로 말을 꺼냈다.
“의외네요, 승주 씨는 안에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차피 플라즈마 보호막 안에 있으니, 적어도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요.”
하기야, ‘안전’이라는 단어를 웨이타오 다음 갈 정도로 좋아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됐어요?”
“뭐가 말입니까?”
“그··· 핵미사일 터뜨리고 나서 말이에요.”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그룹원들도 궁금해하는 낯빛이었다.
나는 품에서 주섬주섬 카메라를 꺼내 그녀에게 가볍게 던졌다.
초월체들과의 전투 영상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정민혁의 조언을 얻어, 이번 전투를 영상으로 담아놓은 것이었다. 물론 상황이 상황인지라 군데군데 끊긴 지점도 있겠지만.
뒤죽박죽이어도 제법 초월체들에 대한 정보가 많이 담겨 있으니, 그룹원들은 이를 통해 초월체들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투 패턴이라든가, 약점이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그 안에 담아왔습니다.”
“이걸 제가 혼자 봐도 돼요?”
한승주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히 안 되죠. 가서 복사해서 돌리세요.”
“···오키.”
그녀는 볼멘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변이체들이 쳐들어왔습니까?”
“민혁이가 연락하지 않았어요?”
“사실 방금 전까지 뺑뺑이 도느라 그렇게 여유가 없었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초월체 네 마리가 쳐들어왔었어요. 물론 보호막 안에서 무사히 격퇴하긴 했지만, 그중 한 놈이 도망쳤어요.”
“어렵진 않았습니까?”
“네, 솔직히 말하면 저번과 차이가 좀 크더라고요.”
그녀가 말한 전투의 ‘내용’이란 지극히 간단했다.
초월체 넷이 하늘 요새를 발견, 접근. 그룹원들이 닥치는 대로 원거리 스킬을 투사, 그 과정에서 초월체 둘은 소멸, 하나는 도망치다가 한승주가 설치한 포탑 미사일을 맞고 소멸.
나머지 하나는 도망치긴 했지만, 중상을 입었다고 했다. 반면 이쪽의 피해는 전무(全無), 아무리 초월체가 네 마리밖에 되지 않았다곤 해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성과다.
뭐, 플레이어들이 강해져서 그렇다고 말하기엔··· 지난번으로부터 얼마나 흘렀다고.
사실 나는 이미 그 ‘답’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지형의 차이겠지.’
지난번엔 한강의 범람으로 인해 쉘터 외부는 물론 내부마저 물에 잠긴 불리한 지형에서 싸워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하늘이라는,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한 지형.
지형의 이점은 결코 작지 않다.
“이대로라면 언젠간 나가서 녀석들을 소탕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 언젠가···라고 해봐야 아직은 미래의 이야기일 겁니다.”
나조차 만전을 기울였다.
요리와 버프 스킬을 통한 온갖 도핑을 하고, 마인화의 사용을 통한 이중 영령 소환, 이중 영령 빙의까지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수백 마리 처치한 게 고작이다.
그마저도 최후에는 간신히 도망치는 게 전부였다. 그룹원들과 내 격차를 생각하면, 그룹원들이 힘을 모은다 하더라도 그 많은 수의 초월체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앞으로는 다르겠지만.’
[보유 기프트 : 1,876,961,351]
이번 전투를 통해 약 19억 기프트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기프트를 보유하게 됐다. 예상대로라면 남은 스킬들을 모조리 신화 등급 스킬로 교체해도 꽤 많은 기프트가 남을 것이다.
그리고 난 남은 기프트를 모조리 그룹원들을 강화하는 데 사용할 생각이었다.
***
예런 일리아티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고 정부가 개입하며 FD와 시위대의 분쟁도 종지부를 맞이했지만, 대리어스 전 대통령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는 이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그가 대리어스 대통령을 암살했고, 시위대에게 그 죄를 덮어씌웠다는 소문이 미국 내의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돌기도 했다. 라소미 역시 그의 죽음에 의혹을 품고 있었다.
‘윤민수의 존재도 그렇고··· 뭔가 찝찝하단 말이지.’
그러나 라소미는 굳이 의혹을 제기하진 않았다. 아무런 증거 없이 대리어스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한다는 것은, 무고할지도 모르는 그를 욕 먹이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있어 예런 일리아티는 은인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으므로, 한낱 의혹만으로 그를 폄훼하고 싶진 않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오빠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속으로 중얼거린 그녀는 잠시 지난날을 회상한다. 그에게 오천만 기프트라는 엄청난 거금을 받은 그녀는 오천만 기프트를 어디다 쓸까 고민하다가 스스로를 강화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 결정으로,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마음껏 쓰라고 해서 마음껏 쓰긴 했지만··· 더 좋은 곳- 예런 일리아티의 우주 개발을 지원한다든가-에 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등의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 덕에 지난 ‘운석 낙하’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다.
오천 만 기프트는 결코 적지 않은 기프트였고, 그 기프트의 대부분을 스스로의 강화에 투자한 그녀는 미국 내의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단연 수 위에 드는 강자가 됐다.
아직 이 사실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다가올 초월체의 위협에서 그녀의 힘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때 가서 당당하게 알릴 생각이었다. 이건 이진서가 준 힘이라는 걸.
이 미국 내에서 그의 이름을 더욱더 드높일 생각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었으니 말이다.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을 이어나가던 그녀의 방문을 누군가 두드린다.
“들어오세요.”
곧 방문을 열고 남자가 들어온다. 그녀의 얼굴이 찡그려진다. 남자의 정체가 친숙하면서도, 전혀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었기 때문이다.
“네가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윤민수?”
“너무 미워하는 얼굴 하지 말라고. 나는 그저.”
짤막하게 말을 끊었던 그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얼굴이 반전된다.
“···누나를 죽이러 왔을 뿐이니 말이야.”
“어째서?”
“‘그 분’께서 네가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린 거지. 그래, 누나는 존재 자체로 위험해. 이진서에게- 빠득, 있어서 누나보다 중요한 인물은 없거든? 적어도 이 미국 내에서 말이야.”
“예런 일리아티가 시킨 건가? 그래서 윤민수, 네가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예상보다 라소미의 어조가 침착하다.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라도 있는 걸까. 그는 왠지 모르게 짜증 났다. 한때 연인 관계였다고 닮은 건지는 몰라도, 그를 벌레 보듯이 했던 이진서의 얼굴이 연상됐다.
그녀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하자 아주 약간의 굴욕감이 치밀어오른다.
‘그래봐야···’
그는 스산한 얼굴로 천천히 검을 꺼냈다.
“내가 죽으면 진서 오빠가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지?”
“당연히, 나도 그렇게 생각 안 하지. 아직도 누나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는 놈이, 누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면 가만히 있을 리 없거든. 분명 진상 조사를 한답시고 당장에 달려와 이 미합중국을 뒤흔들어 놓겠지.”
그는 살짝 몸을 떨었다.
“그건 나도, 그분도 바라지 않아. 그래서···”
열려있던 방문 사이로 여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제니퍼? 아니, 저건···”
“제니퍼가 아니라, 제니퍼를 집어삼킨 도플갱어 로드다. 이래 봬도 초월체라고.”
“에밀리, 나는 초월체가 아니야.”
짐짓 동정심을 유발하는 불쌍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하는 제니퍼. 영락없이 얼굴도, 생김새도 제니퍼가 틀림없다. 그러나 직후, 그녀는 그녀가 제니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플레이어로서 떠오르는 ‘변이체에 관한 정보’ 때문이다.
[도플갱어 군주(Doppelganger Lord)]
- 다수의 플레이어와 동족을 살해하고, 진화의 정점에 도달한 초월체.
- 특수 변이체일 때보다 모든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플레이어를 살해하거나 동족을 살해해 체내에 기프트를 축적할 수 있고, 축적한 기프트로 신체와 특수 능력을 더강화할 수 있다.
- 최대 500,000마리의 변이체를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
- 보유 기프트 : 150,000
“어렵게 찾았어. 도플갱어는 희귀한 개체니까.”
그러자 제니퍼가 입을 열었다.
“연기를 할 필요 없는 건가?”
“···변이체랑 손을 잡아 제니퍼를 죽인 건가?”
라소미는 분노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윤민수의 조소가 한층 더 커졌다.
“제니퍼? 그년을 죽이는 데 변이체와 손까지 잡아야 해? 정말 상상력이 대단하군. 물론 도플갱어가 ‘계획’에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라, 서로 협력하고 있지만 말이야.”
제니퍼도 엷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뭐야, 에밀리,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도 은혜를 모르는 짐승은 아니란 말이야.”
“제니퍼의 얼굴로 그렇게 말하지 마.”
라소미는 눈을 감는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예런 일리아티가 왜 자신을 죽이려 한단 말인가? 그의 말대로 이진서의 개입을 걱정했다면 그냥 내쫓아도 될 노릇이다.
자신을 죽일 이유라고 한다면.
‘내가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계획에 방해가 됐기 때문이겠지.’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아닌 이진서가 방해가 됐기 때문에. 어째서? 그는 이진서의 후원을 바라지 않았었나? 만약 이진서의 기프트를 탐냈다면 오히려 불러들였어야 하는데···
혹시 도플갱어를 변장시켜서 기프트 지원을 요청하는 건··· 아니, 그의 앞에 서는 순간 도플갱어는 낱낱이 그 모습이 드러나고 말 텐데. 상념과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빨리 끝내자, 누나. 저세상에선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런 놈 만나지 말고.”
“그래, 에밀리, 옛정을 생각해서 빨리 끝내줄게.”
너스레를 떨며 다가오는 제니퍼. 그녀의 손이 강철로 변한다.
라소미는 눈을 감는다. 이내,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누가 누구를 빨리 끝낸다고? 웃기지도 않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