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유럽에서 생존자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발견한 건 아론 한 명이 전부였다. 안전 가옥, 바리케이드 등의 흔적은 발견했지만 정작 생존자는 발견하지 못했다.
스마트 워치로 탐색되지 않는 깊은 지하 벙커 속에 숨었거나, 아니면 모두 다 죽었거나, 가능성은 두 가지였지만 솔직히 말해서 전자보다 후자의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다른 대륙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이 유럽 대륙에서 인간이란 종은 멸종한 것이다. 오로지 변이체들만 존재하는 세상. 인간이 사라지자 변이체들은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아예 초월체들을 주축으로 한 집단끼리 싸우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졌다. 물론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저 전투의 결과로 탄생하는 것은 엄청난 숫자의 초월체들일 테니 말이다.
지금의 나라 하더라도 그 많은 숫자의 초월체들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중에는 지난번, 중국에서 상대했던 킹 타일런트 같은 강력한 종도 틀림없이 섞여 있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회수한 핵미사일들을 이 유럽에 일제히 투하하기로. 북한에서, 중국에서, 그리고 러시아에서 회수한 핵미사일의 숫자는 무려 백 단위에 이를 정도다.
그런 숫자의 핵미사일들을 일제히 투하한다면 유럽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괜찮겠어요? 여파가 상당할 거예요.”
아나스타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핵미사일만으로 모든 개체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이곳에 남아야 합니다.”
핵미사일을 투하한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초월체를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초월체들의 끈질긴 생명력도 생명력이지만, 녀석들은 내성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최상급 변이체나, 특수 변이체는 다르겠지만. 뭐, 어쨌거나··· 그렇게 살아남은 초월체들을 처치해야 하는 것은 내 몫인 것이다. 핵미사일은 그저 도와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을 뿐.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러면 하늘 요새는 러시아 쪽으로 이동시킬게요.”
“······”
“행운을 빌게요.”
그로부터 세 시간 뒤, 나는 이 유럽 대륙에 홀로 남겨졌다. 수송기 위에 탑승한 채 난 지상을 내려다본다. 물에 잠기고, 이곳저곳이 파괴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경관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내 손으로 파괴하려 한다. 도저히 담배를 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었다.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다.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 내뱉는다.
담배 한 대를 다 피운 나는 지상을 향해 꽁초를 던졌다. 나풀나풀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며 수천 미터 아래를 향해 떨어져 내린다. 지켜보던 나는 이내 아공간 창고를 열었다.
핵미사일들을 꺼내, 투하한다. 핵미사일들은 나풀나풀 떨어지는 담배꽁초를 지나치고, 지상을 향해 가속돼 떨어진다. 카운트다운. 1, 2, 3, 4··· 속으로 숫자를 셌다.
그리고 그 숫자가 60을 넘어설 때쯤··· 강렬한 폭발이 지상에서 일었다. 거대한 버섯구름은 지상에 있는 것은 물론 떨어져 내리던 담배꽁초까지 일순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내가 떨어트린 핵미사일은 한 개가 아니었으니까. 쉴 새 없이 계속되는 폭발. 엄청난 열폭풍이 내가 있던 자리를 휩쓸고 지나간다.
폭발이 완전히 멎었을 때, 지상엔 지옥도(地獄道)가 펼쳐졌다. 그와 함께 떠오르는 메시지.
[677,568,546기프트를 획득했습니다.]
한 번에 어마어마한 기프트를 획득했음에도 내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적다.’
최상급 변이체가 보유한 기프트가 1,000기프트 정도다. 그리고 내 채굴량 보너스는 700%. 거기에 1.5배 보너스가 적용돼 12,000기프트가 실질적으로 들어온다.
7억에 가까운 기프트를 획득했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지금의 공격으로 5만 8천 마리밖에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내 예상보다도 훨씬 적은 수치다.
진리의 눈, 게비샤를 사용한다.
곳곳에서 거대한 마력들이 물결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나는 때려치웠다. 이대로 도망친다 하더라도, 곱게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고. 호흡을 가다듬고 대멸겁의 지팡이를 들었다. 하늘에서 운석이 소환된다.
수백 개의 운석이 지상을 향해서 일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운석들을 뚫고 기어코 변이체들은 내가 있는 곳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거대한 날개를 달고 있는 변이체. 블랙 엔젤이라는 이름의 초월체.
동시에 세상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온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앱솔루트 배리어를 사용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방어 효과는 발동하지 않았다.
방어할 수 없는 종류의 ‘정신 공격’인 모양이었다. 물론 상태 이상은 금세 사라졌다.
[압도적인 마력이 환각에 저항합니다.]
[압도적인 마력이 저주를 극복합니다.]
일그러지던 세상도, 부풀어 오르던 내 몸도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 나는 녀석을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에 머리를 후려 맞은 녀석의 몸이 끝없는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그러나 내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저런 녀석이 만약 수 마리, 수십여 마리라도 지금처럼 대처할 수 있을지는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유롭게 생각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지상에서 광선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하나도 아니고 수십여 개의 광선이.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슬슬, 제대로 시작해볼까.
‘마인화.’
[마인화(G)를 사용합니다.]
[‘마인화’ 스킬을 사용합니다.]
[신체의 일부가 변화합니다.]
[마력 능력치가 21.95 상승합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마력 제한이 사라집니다.]
모든 마력 제한이 사라진다는 것. 그것은 마력 먹는 하마라 해도 무방할 신화 등급 스킬들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나 다름이 없었다. 망설임 없이 다른 스킬들을 사용했다.
[시간 가속(G)을 사용합니다.]
[모든 마력을 소모해, 플레이어에게 적용되는 시간 배율을 5배로 늘립니다.]
세상이 느려지기 시작한다.
‘영령 소환.’
[영령 소환(G)을 사용합니다.]
[상급의 영령 ‘마도사, 옐레나’를 소환합니다.]
‘영령 빙의.’
[영령 빙의(L)를 사용합니다.]
[‘검성, 아자르’가 몸에 빙의됩니다.]
‘그리고 다시···’
[성운의 가호(U)를 사용합니다.]
[모든 스킬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초기화됩니다.]
성운의 가호를 사용하면, 마인화를 제외한 스킬들을 한 번 더 사용할 수 있다. 영령을 두 번 소환하고, 영령에 중첩 빙의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사용하지 못했던 이유는 마력의 부족 때문이었다. 마력이 부족하면 영령을 소환해봤자 금방 사라질 거고, 영령에 중첩 빙의해도 별 의미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내 마력은 ‘무한’에 가깝다. 적어도 30분, 아니 시간 가속의 배율에 의해 적용되는 150분 동안은 말이다.
[영령 소환(G)을 사용합니다.]
[영령 ‘마도사, 벨루가’를 소환합니다.]
[영령 빙의(L)를 사용합니다.]
[‘방패 용사, 간츠’가 몸에 빙의됩니다.]
‘이 정도면 제법 알차게 사용했다.’
지금 나는 역대 최고의 전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에 마도사 둘의 보조까지 받고 있다.
“당신은···!”
“누군지 몰라도, 나를 알아보는 모양이네?”
“당신은 저의 우상이십니다, 대마도사시여···!”
옐레나를 바라보는 벨루가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그녀에게 듣보잡 취급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프라이드 대단한 그가 상처받은 기색 하나 없이 울먹이고 있었다.
새삼 옐레나의 위상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자, 뒷이야기는 나중에 나누시고 지금은 저 좀 도와주십시오.”
“상대는 저 녀석들인가···”
“쉽진 않겠네.”
그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정도니,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뭐, 이 상태라면 적어도 싸우다 사라질 일은 없겠네.”
중얼거린 그녀가 손을 펼친다. 그녀의 분신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녀의 분신이 또 다른 분신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마치 증식하듯 수십여 개의 분신이 생겨났다.
그녀로 빙의했을 때, 마력 분신을 사용한 적 있었지만, 역시 원조는 차원이 달랐다.
“오오, 저게 마력 분신···! 나만 믿게.”
벨루가가 손을 펼쳤다. 곧 거대한 불사조- 피닉스가 떠오른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점점 더 커지더니 그 이프리트의 수 배에 달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포스만 따지고 보면 이프리트의 위인데?’
내심, 저 피닉스와 이프리트가 맞붙는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물론 정령왕과, 최상급 정령의 차이가 존재하긴 하겠지만 느껴지는 힘은 거의 동급. 아니, 피닉스 쪽이 위였으니까.
옐레나가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는 마도사? 어느 한쪽으로 집중됐으면, 대마도사의 반열에 충분히 들었겠네.”
나는 벨루가의 어깨가 으쓱이는 걸 볼 수 있었다. 곧, 그가 기세 좋게 외쳤다.
“자, 가자!”
거대한 피닉스가 비행하기 시작한다. 위를 지나다닐 때마다 어김없이 변이체들이 불에 타오른다.
“역시 화염 마법사답게 투박하지만 말이야. 뭐, 나도 시작해볼까.”
수십 명의 분신들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를 소환한 건 최고의 수였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나도 이대로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거인화.’
내 몸이 거대해지기 시작한다. 단숨에 지상에 착지한 나는 마찬가지로 비대해진 검을 들었다. 초월체들이 달려온다. 발도 자세를 취한 후, ‘극한의 발도술’을 사용했다.
압도적인 마력. 거인화를 사용하며 상승된 근력.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만들어냈다. 공간 그 자체가 둘로 갈라졌다. 휘말린 변이체들의 몸은 그대로 두 동강 났다.
초월체든 아니든 휘말린 변이체들은 죄다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눈으로 보면서도 쉽게 믿지 못할 장면. 검성, 아자르의 탄성이 들려왔다.
- 오,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 정도면 나를 뛰어넘었다 해도 무방하겠어.
“과찬이십니다.”
- 아냐, 진심이야. 설령 정령왕이라 하더라도 널 이기진 못할 거다. 그나저나, 검의 정령이 피에 굶주린 거 같은데, 마음껏 먹게 해줘.
“예.”
미미르의 샘물을 들이켠다. 극한의 발도술은 마력뿐만 아니라 체력 역시 소모하기 때문이다. 뒤이어 검의 정령, 세리아를 사용하자 내 검이 붉게 변한다.
나는 검을 수직으로 휘둘렀다. 거대한 붉은 늑대가 튀어나와 변이체들을 단숨에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