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쉘터 전체를 아우르는 두꺼운 바리케이드 장벽.
2급 바리케이드를 무려 5중으로 겹쳐 만들었고, 안쪽엔 1급 바리케이드를 덧씌웠다. 장벽을 직접 설계한 김민수는 이 장벽이 초월체의 공격조차 가볍게 막아낼 수 있을 거라며 자신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진서의 아낌없는 투자로 ‘플라즈마 생성기’를 다수 배치함으로써, 쉘터 전체를 아우르는 플라즈마 보호막을 상시 발동할 수 있게 됐다.
이론상, 현대의 핵미사일 정도는 너끈하게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룹원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이러한 장벽이 뚫리는 상상을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났다. 느닷없이 하늘에 모습을 드러낸 운석들. 이진서가 영령 빙의를 사용해 대부분 막아내긴 했지만, 미처 막아내지 못한 운석들이 장벽을 강타했다.
단숨에 플라즈마 보호막이 날아가 버린 건 물론, 바리케이드 장벽마저 반파돼버렸다. 그 정도로 운석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방증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댐이 무너지며 한강까지 범람했다.
그룹원들이 다급히 장벽을 보수했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모두 다 보수하기란 무리였고, 그 와중에 배수 시설도 망가져 쉘터 내부는 말 그대로 물에 잠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침입자들을 마주하게 됐다. 숱하게 상대해왔던 변이체들. 하지만 그 숫자는 무려 수천 마리에 이르는, 특수 변이체들이 골고루 섞인 변이체 무리.
한승주의 센트리건들이 변이체들을 요격했지만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운석 낙하로 인해 멀쩡하게 가동되는 센트리건의 숫자가 적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지형도 한몫했다.
장벽의 절반 가까이 물에 잠긴 탓에 변이체들은 어렵지 않게 장벽의 꼭대기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급하게 보수한 곳이 무너져서 물이 줄줄 새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나마 늦지 않게 그룹원들이 배치됐기 때문에 쉘터가 물에 완전히 잠긴다거나, 변이체가 쉘터 너머로 넘어온다든가 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벌어지지 않았지만, 불안감으로 가득했다.
“화력은 이쪽이 우위에 서 있습니다. 정면에서 붙으면 우리가 압살할 수 있습니다.”
강순철의 말에 박승기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변이체들이 우리랑 정면에서 붙어줄 이유가 있을까? 저놈들은 조직적으로, 지능적으로 움직이고 있네. 과거에 상대하던 최하급 변이체나, 하급 변이체가 아니란 말일세.”
“그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걸 각오를 한다면 어떻게든 한 번쯤은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걸 각오라니··· 뭐, 누군가를 미끼로 내던지기라도 하자는 얘긴가?”
반은 농담이었다. 그러나 강순철은 진담으로 받아들였다.
“필요하다면. 모두가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간부들이 침음을 흘린다. 언젠가 이런 최악의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설마 오늘, 이런 식으로 찾아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애초에 우리 리더가 그걸 바라지 않을 거네. 리더라면···”
그룹원들을 사지(死地)로 몰 바엔, 혼자 나섰을 거다.
“맞아요. 진서 씨가··· 아니, 리더가 그걸 바라지 않을 거라는 건 순철 씨도 잘 알잖아요?”
김하나의 말에 강순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리더는 지금 이 자리에 없습니다. 그리고 리더 역할을 대신 해줄 플레이어도 이 자리에 없고요. 다들 어린애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세요.”
“······”
“우리가 선택해야 합니다. 이대로 바리케이드가 뚫리는 날엔 쉘터 전체가 물에 잠기게 될 겁니다. 고층 빌딩은 잠기지 않겠지만, 대부분의 건물이 물에 잠기겠죠. 그러면 상황은 더 악화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강순철은 정민혁을 바라본다. 마치 그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은 복잡하기 짝이 없다. 그동안 쉘터의 중대소사를 의사결정 해왔던 그였지만, 단언컨대 이번만큼 어려운 적은 없었다. 그의 의사결정에 그룹원 전체의 목숨이 달려있다.
조금이라도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죽는다. 쿵쿵, 정민혁은 미칠 듯이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리더 자리에 익숙해지며 잊었던 부담감, 중압감. 지금 일순간 몰려온 기분이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가빠온다. 그의 긴장을 눈치챘는지, 그를 바라보던 강순철도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민혁아, 너를 자꾸 벼랑 끝으로 몰아넣어서 미안하다. 하지만 네 선택이 필요하다.”
“아닙니다, 형님···”
길게 한숨을 쉰 그가 입을 열었다.
“이해합니다.”
“부담가지지 말고 선택해라.”
“제가 어떤 선택을 하든, 모두 다 따라주실 겁니까?”
“······”
강순철은 침묵을 지켰다. 다른 간부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강순철처럼 침묵을 지키는 이들도 있었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양보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저도 이해하겠습니다, 다들. 그리고 제 선택은···”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쉘터를 버리는 겁니다.”
“뭐?”
간부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박승기조차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강순철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마치 범인을 취조하는 듯한 강압적인 눈빛에 그도 움찔했다.
“선택을 하랬더니 아예 한 술, 아니 두 술 더 뜨는구나.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저는··· 진심입니다. 사실 한참 전부터 생각했습니다. 이곳은 쉘터로 적합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이진서가 강동구를 쉘터로 정한 이유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는 가까운 곳에 정민혁과 진혜연을 지키기 위한 쉘터를 만들었고, 사람들이 몰려들며 쉘터가 커졌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내심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외면해왔다. 지금 와서 손대기엔 쉘터가 너무 방대해졌다. 형님이 계시니 괜찮을 거다···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 쉘터에 투자해온 게 얼만데. 웨이타오 영감이 알면 난리 나겠군.”
고경표의 말에 이제원이 힐난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은 얼마 투자하지도 않았잖아요? 가진 것도 없었으면서.”
“뭐, 뭐라고?”
“이야기 계속해봐요.”
“감사합니다, 누님. 우리를 지켜주던 댐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저 빌어먹을 비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앞으로 20일만 있으면 이 빌어먹을 비도 그친다고 했잖아?”
“앞으로 20일이면 비만 그치는 게 아니라 상급 변이체들이 최상급 변이체로 진화하게 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최상급 변이체부터는 동종 포식을 통한 진화가 가능해집니다.”
특수 변이체와 초월체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날 것이다.
변이체를 소탕하기 위해 그동안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아직도 이 세상엔 수많은 변이체들이 존재한다. 수십만, 수백만에 달하는 특수 변이체들과 초월체들이 탄생할 것이다.
아무리 지금의 그룹원들이 강해졌다지만 초월체가 천 단위씩 몰려온다면 코스믹 호러 수준이다. 그 이상의 숫자라면 이진서가 멀쩡하다 하더라도 막을 수 있을지가 의문.
생각을 마친 정민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말은, 지금 몰려온 변이체들을 소탕한다 하더라도, 댐을 재건한다 하더라도 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20일 뒤에 물이 사라질까요?”
바리케이드가 뚫리는 순간, 또다시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의 말에 사람들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진혜연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어디로 가자고? 정해놓은 데는 있고?”
“그건··· 강원도 쪽으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했는데.”
물에 잠기지 않는, 고도가 높은 지역ㅡ 산을 쉘터로 삼는 것이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강태윤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산은 지형상 쉘터로 적합하지 않은데. 내가 왜, 형님한테 구출되기 전에 산을 쉘터로 삼았다고 말해주지 않았었나? 지금 와서 말하지만 최악이었어.”
서문주도 의견을 내놓았다.
“단순히 고도가 높다는 이유만으로··· 짓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거 같습니다. 위협이 물만 있다는 보장도 없고. 산보다는 아예 지하에 짓는 건 어떨까요? 아예 지하 도시처럼 말입니다.”
“이야, 누가 의사 선생님 아니랄까 봐 똑똑하네.”
고경표가 순수하게 감탄하며 말했다.
“그러다가 지하에서 마그마라도 올라오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럽니까?”
제주도에서 온 플레이어들을 대표하는 양천우가 몸서리를 치며 물었다. 제주도에서 화산 분출이라는 재앙을 겪었던 그는 마그마, 용암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그건···”
물론 직접 화산 분출을 겪어본 적 없는 고경표의 대답은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연병수였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예전이었다면 그를 무시하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병수야?”
“여러분은 고대 마법 도시의 전설을 아십니까?”
“지금은 전설이나 듣고 있을 시간이 어딨어?”
“뭔데?”
이제원의 긍정적인 반응에 연병수는 그녀에게 고마움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곧, 그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가 어둠의 정령왕, 알폰소에 의해 폭주한 이후 그녀가 이끌던 바람의 정령들 역시 폭주해 무차별적으로 인간들을 공격했습니다.”
폭주한 정령들은 인간들이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재앙이 아니었다. 바람의 정령들이 불러낸 ‘무질서한 바람’에 의해 무수한 마을과 도시가 파괴됐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사르자 역시 곧 멸망을 앞둔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르자를 지키던 윌케인이라는 한 마도사는 생각했습니다. 가만히 재앙을 기다리는 대신, 뭐라도 해보자고 말입니다.
고심 끝에 그가 세운 계획이 바로··· 도시 그 자체를 옮겨버리자는 계획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사르자는 하루 유동 인구만 수십만에 이르는, 결코 작은 도시가 아니었죠.”
윌케인은 당시 기준으로 수년 전 마도사의 칭호를 수여 받은 만큼 대단한 마법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시를 온전하게 옮기기에는 준비도, 그가 보유한 마력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몸을 마왕에게 제물로 바쳐 부족한 마력을 메웠다. 그리고 마침내 계획 실행 날, 윌케인이 주문을 외우자 사르자는 하늘로 떠올랐다.
훗날, 공중 도시 혹은 마법 도시라 불리게 된 이유였다.
어쨌거나 그 덕에 사르자는 바람의 정령들을 무사히 피하는 데 성공했고, 수만에 달하는 시민들의 목숨을 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윌케인의 최후는 그리 좋지는 못했다.
“그러면 결국 마왕에게 끌려갔다는 거야?”
처음만 해도 심드렁하던 몇몇 사람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그가 금지된 마법을 썼다면··· 아마도요. 사르자는 훗날 윌케인 흐 사르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고대어로 윌케인의 사르자라는 뜻이죠.”
“그러면 네가 마왕에게 제물이 되겠다는···”
“??”
“병수야, 네 희생은 잊지 않을게.”
“고맙다.”
“다들 장난은 거기까지 하고, 그러면 사르자처럼 우리 쉘터를 공중 도시로 만들자는 거야?”
“쉽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지도 않을 겁니다. 우리는 윌케인이 가지지 않은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제가 아니라 여러분이···”
간부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가진 플레이어 시스템. ‘기프트’만 있다면 무엇이든 구매할 수 있는 만능 소원기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강태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민혁아, 변이체가 나타났단다.
“얼마나?”
- 많아, 아주 많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