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드래고니안 3호. 미국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우주 항공 기술과 외계의 기술이 더해져 만들어진, 예런 일리아티의 역작(力作)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우주 왕복선.
지금으로부터 수일 전, 발사 성공 이후, 지구 주위를 순항하며 각종 실험 데이터를 수집 중이었다. 그렇게 수집한 데이터는 ‘화성 이주 계획’을 위해 쓰일 예정이었다.
그런 드래고니안 3호의 조종사인 제이드는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행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가 알던 지구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던 아름다운 푸른 별의 모습이 아닌, 행성 전체가 두터운 하얀색 구름으로 빽빽하게 뒤덮여있다. 하기야, 저러니까 그렇게 비가 퍼부었던 것이겠지.
‘······’
제이드는 지구를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지구를 떠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내심 반신반의했다. 과연 화성 이주 계획이 옳은 선택일까. 꼭 지구를 버려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는 마침내 깨달았다.
‘지구에 미래는 없다.’
예런 일리아티가 말했던 것처럼 지구의 미래는 오로지 끔찍한 파멸뿐이라는 걸. 어느 누구도- 설령, 이진서라 하더라도 그 예정된 미래를 바꾸지는 못하리란 것을.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한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혼자가 할 수 있는 일에는 엄연히 한계가 존재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미국에만 가면 모든 일이 잘 풀릴 줄 알았는데.’
마치 오르지 못할 절벽을 기어오르는 듯한, 절망적인 기분마저 들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귓가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상관이자, 선장인 밀러 중령이었다.
- 제이드, 내려와, 심심한데 포커나 한 판 치자.
어차피 이곳에 있다 한들, 그가 딱히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으므로 그는 순순히 수긍했다.
“예, 선장님.”
그렇게 몸을 돌려 선실로 내려오려는 순간이었다.
‘!?’
무언의 섬뜩함을 느낀 그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저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잔잔했던 구름 한가운데에 거대한 타원이 생겨났다. 지상에서 무언가 거대한 폭발이라도 일어나서 구름이 퍼져 저런 모양이 돼버린 걸까?
그런 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타원이 점점 형태를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타원 안에 수많은 동심원들이 생겨난다. 이내, 그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저건···
‘눈?’
틀림없는 눈의 형태였다.
한가운데 위치한 눈동자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는 꿀꺽 침을 삼키고 말았다. 마침내 그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구름으로 이루어진 눈이라니,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저건 대체 누구의 눈인가?’
저런 짓을 벌일 수 있을 만한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다. 그는 이내, 합리적인 추론을 해냈다.
‘지구를 한순간에 코인 채굴기로 만든 초월적인 존재.’
천천히 그의 입이 열렸다.
“채굴자.”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동자에서 강렬한 빛이 일었다. 지켜보는 그의 눈을 한순간 멀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드래고니안 3호는···
- 추, 추락한다!
중심을 잃고 끝없는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아니, 추락이라는 말보다는 지구가 그들을 잡아당기고 있다는 표현 쪽이 더 그럴듯했다.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빌어먹을.”
입에서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는 선실로 뛰었다. 살아남아야 한다.
***
대통령의 딸이라고 거들먹거리던 니콜라예브나를 한껏 조롱해준 것까지는 좋았지만, 아나스타샤는 곧 그녀가 만든 지하 벙커로 숨어야만 했다. ‘동양인’이 그녀를 잡으러 왔기 때문이다.
정찰용 드론을 통해, 입구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확인한 그녀의 표정은 어둡기는커녕 오히려 잔뜩 들떠 있었다. 그녀는 동양인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이진서.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플레이어라고 알려져 있다. 그녀도 이견은 없었다. 정면 승부라 한다면 아무리 신화 등급 스킬을 가진 그녀라 한들 그를 이길 자신은 없었으니 말이다.
이마저도 미국 정보부를 해킹해 입수한 그의 전투 영상을 토대로 판단한 것이지, 실제로는 더 강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곳은 그녀의 홈그라운드다.
‘과연 내가 놓은 함정을 뚫고, 나를 잡으러 올 수 있을까?’
아나스타샤는 벙커 입구는 물론 벙커 내부에도 온갖 함정들을 설치해 놨다. 그녀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강대한 적이 벙커로 들어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만든 함정들이다.
그런 만큼 하나같이, 그녀가 상당한 기프트를 들여 공들여 만든 함정들이었다. 이진서가 그런 함정들을 뚫고 그녀에게 올 수 있을까. 그녀는 잔뜩 기대감 어린 눈으로 지켜봤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한 시간. 쇠사슬에 꽁꽁 묶인 신세가 된 그녀는 화가 잔뜩 난 이진서에게 자신을 변호해야만 했다.
“먼저, 저는 니콜라이와는 동업자 관계였을 뿐이에요. 그의 미친 뉴클리어 신앙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다는 걸 밝혀두죠.”
“아니, 동업자건 자시건, 그 미친 함정들은 왜 깔아둔 겁니까?”
산전수전을 겪은 그의 입에서 그런 평가가 나올 정도였으니, 그녀가 설치한 함정들이 얼마나 극악무도했는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설마 당신이 올 줄은 몰랐죠.”
물론 실제로 억울한 것이 아닌, 억울함을 연기한 표정이었지만··· 진리의 눈, 게비샤를 가진 이진서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거짓말이네.”
“거짓말 탐지기라도 있나? 뭐, 뭔 스킬인지 모르겠는데 그거 그렇게 정확하지 않다고요. 그래서 나 죽일 거예요?”
“죽이진 않을 겁니다. 대신··· 노예로 삼아서 굴릴 겁니다.”
“노예로 삼겠다고요? 나를? 한국은 노예제가 폐지된 나라 아니었나? 아, 혹시 그런 노예가 아닌가? 그런 노예라면 차라리 제가 로봇을 만들어드릴 테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겁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이진서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의 극악무도한 함정을 맛본 그는 상당히 화가 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함정이 그 정도로 대단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녀는 반드시 필요하다.’
핵 벙커 설계에, 함정 설계까지. 만약 그녀에게 기프트를 투자한다면 설령 초월체 ‘무리’가 온다 한들 쉘터는 안전할 것이란 생각을 하는 이진서였다.
<신화 등급 노예 2호>
- 계약금 : 100,000,000기프트
- 을은 갑에게 노동을 제공한다.
- 갑은 을에게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제공한다.
- 모든 기준은 갑이 판단한다.
“아니, 이 센스 없는 계약명은 뭐예요? 신화 등급 노예 2호라니?”
“그래서 안 받아들일 겁니까?”
이진서는 그녀의 대답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계약 내용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승낙했다는 의미임이 틀림없었다. 아나스타샤는 툴툴거렸다.
“어차피 선택지도 없잖아요.”
한편으로 그녀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런데 내가 2호면, 1호는 누구예요?”
“아, 1호는··· 뭐,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돌아가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호를 떠올린 그는 피식 웃었다.
***
이진서와 굴욕적인 기프트 계약을 맺은 라우라였지만, 그 덕에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비록 그것은 제한된 자유였지만, 적어도 그 ‘싸이코’가 있는 지하실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으므로 그녀는 더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 와중 몇몇 친구들을 사귀기도 했다.
대부분은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에 홀린 이들이었지만(어디까지나 그녀의 주관적인 생각이었다), 그중에는 그녀와 거의 띠동갑 차이인 여중생도 섞여 있었다.
그녀의 정체는 바로 진혜연이었다. 그녀에게 친근하게 다가와 팔짱을 끼는 그녀를 바라보며 라우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는 내가 무섭지도 않니?”
“안 무서운데요?”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쯤은···”
진혜연도 명색이 버프 조장이다. 제법 많은 기프트를 투자해 능력치를 올리고, 전설 등급 스킬들로 둘둘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전투력만 놓고 보면 라우라와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닌 일개 국가- 그것도 지금도 초강대국이라 불릴 만한 미국을 사실상 단신으로 상대했던 플레이어였으니 말이다.
“언니가 그러려고 마음먹었으면 진즉 그랬겠죠.”
물론 불가능하다. 이진서와 기프트 계약의 내용 중에는 이진서와, 이진서의 그룹원들에게 절대로 해를 끼치지 못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설령 계약이 없다 한들, 친근하게 다가오는 10대 소녀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훈계 정도는 할 수 있어도.’
남미 카르텔인 그녀가 저지른 악행의 피해자 중에는 당연히 10대들도 들어 있었지만, 의외로 대부분 부하들의 소행일 뿐 의도하고 죽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그 행위를 알고 있으면서도 방관한 이상, 사실 그녀가 한 짓이나 별로 다를 건 없었지만 말이다.
“······”
“그래서 오늘은 어디 갈까요? 카페?”
“···너도 어지간히 대단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 소녀의 천진난만한 행동의 감상평을 내뱉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그냥 언니랑 친해지고 싶다니까요. 빨리 가요.”
“마음대로 해.”
곧, 그녀들은 Seo Jin이라는 간판의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의 이름은 서진. 앞뒤를 바꾸면 진서였다. 괜히 간판을 보고 이진서를 떠올린 라우라는 빠득빠득 이를 갈았다.
그 때문에 그녀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졌으니 당연한 반응이라 할 수 있었지만 ··· 정작 그녀가 이진서에게 화난 이유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감히 나를 방치해?’
기프트 계약을 맺은 후, 이진서는 그녀에 대한 관심을 꺼버렸다. 찬밥도, 이런 찬밥 신세가 없다. 인간관계에 능한 그녀는 그의 감정을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수집된 수집품은 그녀와 같은 수집가(Collector)게 큰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어장 속에 갇힌 물고기에게는 더 이상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수집가였던 시절이라면 모를까, 수집품이 된 입장에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일부러 기프트까지 들여서 한국어도 배웠건만···!’
“요즘 그 사람은 뭐해?”
“그 사람이요? 아 진서 오빠요?”
빠득. 슬쩍 그녀의 눈치를 보던 진혜연이 입을 열었다.
“러시아 언니 만난다고 바쁘던데··· 그 언니도 예뻐서 큰일이에요.”
“러시아인? 역시 그럴 줄 알았지.”
배신감마저 밀려올 정도다.
“그래서 언니는 뭐 시킬 거예요?”
“난···”
그녀들이 순조롭게 주문을 이어나가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외부가 시끌벅적해졌다.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 카페의 주인조차 허겁지겁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곧, 그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수한 운석들과 그 한가운데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무언가’를 목격할 수 있었다. 진혜연은 발을 굴렀다.
“어떻게 하죠? 플라즈마 쉴드가 작동해야 할 텐데?”
“쯧.”
혀를 찬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프리트.’
그녀의 부름에, 곧 불의 정령왕이 현계에 강림(降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