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강태윤의 활약으로 니콜라이가 있는 핵 벙커의 대략적인 위치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내부에 있는 이들 중 한두 명쯤은 성인 사이트를 들어갈 것이라는 그의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물론 핵 벙커의 위치를 찾아냈다고는 하나, 섣불리 진입할 수는 없었다. 저쪽이 쥐고 있는 무기는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로 ‘무수한’ 핵미사일이었으니 말이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속전속결. 순식간에 들어가서, 저들이 상황 파악을 하기 전에 니콜라이와 군 장성들을 암살하는 것. 굳이 셋이나 들어갈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실리와 스텔라. 러시아에서 수위를 다툴 정도의 플레이어들이라지만 내게 있어서는 걸림돌에 지나지 않았다. 바실리는 순순히 수긍했고, 스텔라 역시 불만 어린 표정이지만 수긍했다.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핵전쟁은 막아야 합니다.”
[플레이어, 스텔라가 당신에게 ‘바람의 축복’을 내립니다. 1시간 동안 민첩 능력치가 0.5 상승합니다.]
그녀는 말없이 행동으로 대신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짤막하게 말한 나는 숨을 마셨다가 내뱉었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간 가속.’
[시간 가속(G)을 사용합니다.]
[모든 마력을 소모해, 플레이어에게 적용되는 시간 배율을 5배로 늘립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탈력감이 치밀었다. 물론 내게는 미미르의 샘물이 있다. 소환해 단숨에 들이마셨다. 체력과 마력이 100% 회복됐다는 메시지와 함께, 이번엔 충만함이 들었다.
“거어어어어언투우우우우르으으으으으을비이이이이입니이이이이다아아아아.”
늘어지는 바실리의 목소리. 내 시간이 더 빨라져서, 그에 반해 세상의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지면을 향해 짤막하게 주문을 외웠다.
“디그(Dig).”
디그는 갈락시아의 도서관에 있던 기초 마법서에 있던 마법이다. 그 효과는 말 그대로 땅을 파는 기초 마법. 그러나 내 마력이 더해지는 순간, 그 위력은 더 이상 기초 마법이 아니었다.
마치 영화에서 봤던 싱크홀을 연상케 할 만큼 거대한 구덩이가 팬다. 나는 단숨에 구멍을 향해 몸을 던졌다. 바닥에 착지한 후, 한 번 더 디그를 사용했다.
반복하기를 수차례. 나는 지하 수천 미터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물론 핵 벙커의 위치는 이곳과 꽤 거리가 있다. 혹시 내 침입을 눈치챌까 봐 일부러 거리가 있는 곳에서 사용했다.
그들의 눈을 피해, 아예 지하에서 이동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찾아가 보실까.’
진리의 눈, 게비샤를 사용한다. 어둠 속임에도 마치 대낮처럼 시야가 훤해진다. 나는 가볍게 주먹을 휘둘렀다. 구멍이 만들어진다. 몇 번 더 휘두르자, 제법 통로 같아졌다.
그렇게 나는 반복하며 마침내 핵 벙커 외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외벽은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 단단한 아다만티움 금속 벽이었다. 그 강도는 2급 바리케이드에 준할 거라고 했다.
2급 바리케이드를 뚫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라 하더라도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굳이 뚫을 필요는 없다.
금속 벽에 막혀있을 뿐, 안전가옥처럼 마법 방지 기능이 있는 건 아니니까. 다시 말해, 굳이 벽을 부수지 않아도 마법을 사용해 이동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이다.
“블링크.”
새하얀 빛과 함께 내 몸이 공간도약을 한다. 벙커 내부의 풍경이 들어온다. 내 앞에 서 있는 건 수통을 들고 있는 러시아군이었다. 느려진 세상 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조금 움직인다.
그는 아직 내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한 번 더 블링크를 사용한다. 벽을 뛰어넘은 내 몸이 사라진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0.1초. 아마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것이다.
곧, 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엘리베이터가 아닌 수동 엘리베이터.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엘리베이터를 안전가옥으로 개조해놨다.
즉, 블링크를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확신이 들었다. 니콜라이가 있다면, 바로 저기 있으리란 확신 말이다. 엘리베이터 앞을 지키고 있는 건 병사들.
그들의 앞에 도달한 나는 오른손을 움직인다. 내가 사용한 건 주먹도 아니고, 고작 손가락 하나. 그러나 그의 몸을 날려 보내기에는 충분했다. 옆에 있던 병사의 입이 열린다.
“무···”
표정이 점차 변화한다.
하지만 내 손가락은 이미 그의 몸을 찔렀다. 퍽! 영 좋지 않은 곳을 맞았는지 피 분수를 뿌리며 날아간다. 나는 엘리베이터 문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지금, 내 근력은 150을 돌파했다. 시간 가속을 사용해, 육체는 5배나 가속된 상태. 콰직. 3급 안전 가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은 단숨에 찌그러진다. 나는 몸을 날렸다.
‘이제는 진짜 타임 어택이다.’
수백 미터 지하로 떨어져 내린다. 쿵. 가볍게 착지한 나는 재차 주먹을 휘둘렀다. 문이 뚫리며, 내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제복을 입은 남자가 나를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니콜라이는 아니다. 하기야, 니콜라이는 이 깊은 지하 속에서도 꼭꼭 숨어있을 것이다.
“니콜라이는 어디 있지?”
러시아어 따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다. 진리의 눈, 게비샤로 그의 생각을 읽어 니콜라이의 위치를 안 나는 그를 주먹으로 때려눕히고 달리기 시작한다.
아까처럼 블링크를 사용해 이동하는 건 불가능했다.
군데군데 안전가옥들을 깔아놓은 데다, 함정까지 가득하다. 누가 설계했는지는 몰라도, 짜증 나게 설계했다. 경보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빠르다.
‘이렇게 된 이상.’
나는 대멸겁의 지팡이를 들었다. 거대한 불꽃이 피어오른다. 니콜라이가 아닌, 내부에 있는 다른 사람들까지 휘말리겠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벙커 전역으로 퍼져나간 녹색 화염의 벽. 이 층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울 때까지 화염의 벽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펑! 이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내부에 폭발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플레이어를 살해하셨습니다.]
[216,667기프트를 획득했습니다.]
[다른 플레이어를 살해하셨습니다.]
[665,795기프트를 획득했습니다.]
불을 피해, 몇몇 러시아군 장성들이 뛰쳐나온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당황한 얼굴, 곧 그들의 얼굴에 어린 선명한 공포. 나는 그들이 도망치도록 가만히 내버려 뒀다.
어차피 도망칠 곳도 없겠지만 말이다.
화염을 뚫고 뚜벅뚜벅 안으로 걸어간다.
모든 것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벽도, 파이프도, 안전가옥들도. 하지만 곧 나는 중앙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안전가옥을 한 채 발견할 수 있었다. 곧바로, 정보를 확인한다.
놀랍게도 안전 가옥의 정체는 3급도, 2급도 아닌 1급 안전가옥이었다.
<1급 안전 가옥>
내구 : 496,560/500,000
넓이 : 87.5㎡
설명 : 안전을 목적으로 설계된 가옥.
기능 : 기척 제거 Lv.35, 오토 쉴드 Lv.25, 매직 쉴드 Lv.25, 오토 리페어 Lv.25, 공간 확장 Lv.15, 트랜스폼 Lv.15, 고속 이동 Lv.15
1급 안전 가옥. 1급 바리케이드는 여럿 봐왔고, 실제로 구매도 했지만 이렇게 직접 1급 안전 가옥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왜냐하면 1급 안전 가옥은 비쌌으니까.
‘얼마야 이건?’
[10억 기프트입니다.]
하기야, 3급 안전 가옥의 ‘기본가’가 천만 기프트였으니, 계산하면 10억 기프트가 맞긴 하다. 10억 기프트. 내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 액수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물론 여기서 말한 10억 기프트란 상점에서 구매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1급 안전 가옥은 상점에서 구매한 게 아니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설마 이 1급 안전 가옥을 ‘누군가’ 제작했다는 의미일까?
[······]
시스템 메시지로부터 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상점에서 구매했는지, 누군가 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가 이 1급 안전 가옥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
주먹을 쥐었다. 1급 안전 가옥을 향해 휘둘렀다. 지금의 내 공격에도, 아주 작은 흠집만 생긴다.
‘골치 아프네.’
슬며시 내구를 확인했더니, 고작 2,000이 줄어있었다. 이론상으로 대략 250번만 같은 공격을 가하면 부술 수 있겠지만 안전 가옥에 달려있는 오토 리페어 기능을 감안해야 한다.
한마디로 주먹만으로 부수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난감한 얼굴로, 1급 안전 가옥을 바라본다. 어떻게든 핵 벙커 안으로만 들어올 수 있다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마음이 한층 더 조급해졌다.
‘패를 아낄 때가 아니다.’
“영령 빙의.”
[방랑기사, 카론이 몸에 빙의됩니다.]
카론에 빙의하는 것은 오랜만이다. 폭식의 대검, 아르고스를 손에 쥔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영령 소환을 사용했다.
“영령 소환.”
[축적된 행운이 다시 없을 기적을 불러옵니다.]
[상급의 영령 ‘검성, 아자르’를 소환합니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검 한 자루를 쥔 중년 검객.
소환하고자 마음은 먹었지만, 이렇게 그를 소환하는 건 처음이다. 검성, 아자르. 한 자루의 검으로 폭주한 정령왕, 미네르바를 베어낸 사나이.
사실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었지만 라우라가 소환한 이프리트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고작 소환된 분신임에도 이프리트는 경이로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가 쓰러트린 것은 분신도 아닌, 본체일 터. 비록 미네르바가 폭주해서 힘이 약해지긴 했겠지만··· 대마도사, 옐레나와 같은 반열에 서 있는 ‘괴물’임은 틀림없었다.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인가.”
“부탁드립니다.”
그는 1급 안전 가옥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상대군.”
그의 검이 움직인다. 한 번, 두 번, 세 번··· 5배로 시간이 빨라진 세상 속에서도, 엄청난 빠르기로. 수십 번의 검격을 내지른 그는 발도 자세를 취했다. 극한의 발도술.
그의 검이 단숨에 안전 가옥을 베고 지나간다. 흠집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검격이 안전 가옥에 새겨진다. 인상 깊은 등장이었지만 그의 몸이 곧 흐릿해졌다.
“베지 못했는가. 바람이라면 베었을 것을.”
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다. 정확히 절반, 무려 25만의 내구도가 줄어있었다. 나는 폭식의 대검을 들고 발도 자세를 취했다. 버프 스킬로 인해 ‘재능’이 올라갔다.
여기서 말하는 그 재능은 마법 재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정확히 따라 하진 못해도, 마력의 보조를 받는다면 어설프게 따라 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거대한 검이 한층 더 크기를 키운다. 마력을 쏟아내 푸른색으로 물든 대검이 안전 가옥을 향해 휘둘러졌다. 펑! 폭음과 함께 안전 가옥이 정신없이 흔들린다.
순간적으로 부수지 않았을까 행복회로를 굴려봤다. 하지만 안전 가옥은 여전히 멀쩡했다.
[내구 : 196,764/5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