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블라디미르 니콜라이. 내가 그에 대해 직접 찾아본 적이 있을 정도로, 그는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전직 KGB 요원이었던 러시아의 대통령.
한국 내에서 그의 인기는 상당해,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 보면 심심치 않게 그의 사진을 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상의를 탈의한 채 그리즐리 베어 위에 올라타 있는(···) 사진이라든가.
그게 아니면 총을 든 채 특수 부대원들과 함께 서 있는 사진이라든가. 그야말로 ‘상남자’의 전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물론 그에 대한 정치학자들의 평가는 극과 극이 갈린다곤 하지만···
한국의 일개 소시민이었던 나는 그를 그렇게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애초에 러시아와 한국의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기도 했고. 그런데 그런 니콜라이가 핵전쟁을 일으키려 한단다.
아니, 핵전쟁이라는 표현보다는, 지구 멸망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전쟁이라는 건, 상대가 있을 때나 사용 가능한 단어니 말이다. 아, 전쟁의 상대가 지구니까 틀린 말은 아닌가?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그에게 물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제가 가진 ‘이단 심문관의 눈동자’로 확인했습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변이체나, 하늘에서 퍼붓는 비도 골치 아파 죽겠는데 이제는 전 세계에 핵미사일을 뿌리려는 미친 독재자까지 출현했단다.
이 상황에 내가 할 것은 하나뿐이었다. 눈을 천천히 뜨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막아야겠네요.”
한편으로는 점점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미친 독재자가 단추 한 번이라도 누르는 순간 지구가 멸망할 위기에 처했다. 그것이 내일일 수도 있고, 당장 오늘일 수도 있다.
“러시아 측의 반정부군이 그를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지만··· 니콜라이가 우랄산맥 내의 벙커에 숨어, 그것도 쉽지 않다는 모양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빨리 가봐야겠네요. 그 전에 러시아인들은 모두 풀어주세요.”
방금 전 그들을 만났을 때 ‘기프트 계약’을 맺어 놨다. 덕분에 내 잔고의 마이너스가 더 늘어나긴 했지만, 그들이 나쁜 마음을 품는다 하더라도 더는 적대 행위를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의문을 표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신이시여.”
“그놈의 신은··· 바른 빛 선교회엔 필요한 것 없습니까?”
그룹 내의 어두운 일을 도맡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른 빛 선교회의 부처별 예산 순위는 최하위였다.
심지어 예산을 적게 가져가는 편인 ‘버프조’와 비교해도 고작 십 분의 일에 불과할 정도로 말이다. 사실 예전에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원한다면 예산을 수십 배로 늘려주겠노라고.
그때 김선우 목사는.
-신에게 바치지는 못할지언정, 신의 재산을 어떻게 탐하겠습니까.
라는 참으로 목사스러운 답변을 했었다. 그 말처럼 예산을 그렇게 적게 가져가고도 오히려 십일조라고 헌금까지 바치니 언행일치(言行一致)의 표본이라 말할 수 있었다.
‘뭐, 그렇게 바쳐진 헌금은 정작 정민혁의 주머니로 가고 있지만···’
나는 한편으로 그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고, 그가 필요한 것이 있다고 말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사줄 생각이었다. 앞으로도 고생하라는 의미를 담아서 말이다.
이번에는 무언가 필요한 게 있는 눈치인지, 내 말에 그는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다소 뜬금없는 이름이 흘러나왔다.
“혹시 강태윤 감독님을 뵐 수 있을까요?”
“예? 태윤이는 왜요? 그리고 감독님이라면···”
그에게 굳이 감독님이라는 호칭을 붙인 이유가 뭘까?
“그게 말입니다. 이번에 개봉하신 영화, 잘 봤습니다. 신도들이 보면서 눈물을 흘리더군요. 비록 나중에 딥페이크 합성이란 말을 듣고 실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진짜 같았습니다.”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정작 저는 보지도 못했네요.”
미국에 다녀온 이후에도 바쁘게 움직이느라, 영화를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솔직히 낯부끄럽다. 내가 찍은 적 없는 내 주연 영화라니. 심지어 그 장르는 로맨스(Romance)였다.
“그런데 그게 태윤이를 만나는 거랑 무슨 상관이···?”
“아, 굿즈 제작을 할 수 있을까 해서 말입니다. 포스터라든가, 아니면 실제 크기의 인형이라든가···”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엔 일말의 광기가 엿보였다.
“??”
“신도들이 워낙 좋아해서 말입니다.”
“그건 태윤이가 아니라, 저한테 말씀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네요.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미 팔린 얼굴 몇 번 더 팔린다 한들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겠어?
“이왕 제작하는 거 확실하게 제작하는 걸로 하시죠. 필요한 예산은 전부 민혁이에게 요청하시고.”
“예, 감사합니다.”
그는 내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바른 빛 선교회를 빠르게 빠져나온 나는 질주에 탑승했다. 일 분 일 초가 급했기 때문이다. 질주는 최적의 경로로 순식간에 날아가기 시작했다.
AI에 자동 운전을 맡기고 정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 예, 형님.
“이미 너한테 전해졌을지 모르지만, 러시아 대통령이라는 놈이 지구 상대로 핵전쟁을 계획하고 있단다.”
- 예, 그룹원들 방공호로 피신 명령을 내려놨고 플라즈마 보호막까지 작동시켜놨습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플라즈마 생성기를 그 열 배로 늘려 놨다. 물론 한승주가 말하길 숫자를 열 배로 늘린다고 해서 그 출력량이 열 배로 강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나름 안심이다.
정면으로 수 발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에는 보호막을 뚫고 쉘터에 떨어지진 못할 것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중국에서 맞았던 핵미사일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지하오란님에게 연락해서 란페이 그룹원들도 대피하라 그래. 가능하면 쉘터 안으로 들여도 좋고. 진짜로 핵 날아오면 난리 나니까.”
아직 합병은 시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양측 간부들 모두 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상황이니 어차피 곧 시행될 예정이었다. 합병의 여부를 떠나 그들이 핵미사일을 맞게 둘 수 없고.
- 예, 알겠습니다, 형님.
“댐은 괜찮겠지?”
- 지금 제가 가고 있는 중입니다. 가서 1급 바리케이드로 도배해야죠. 워낙 면적이 커서··· 솔직히 다 막기는 무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도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최악의 상황에는 댐을 포기하는 걸로 하자.”
- 예, 형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끝까지 댐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의 강력한 의지를 어렴풋이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말한다고 들을 녀석도 아니고.
‘내가 막으면 된다.’
더 서둘러야 한다. 내 기분을 대변하듯 질주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나는 순식간에 중국의 영토를 넘어 러시아의 영토에 들어설 수 있었다. 우중충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강이 흘러넘쳐, 혹은 바닷물이 넘쳐 수장된 도시들을 지나, 더욱더 내륙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대략 몇 분여를 더 이동했을 때였다. AI가 나를 향해 경고를 해왔다.
[유도 미사일이 포착됐습니다.]
카메라를 통해 미사일을 볼 수 있었다.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두 발의 미사일. 정부군이 날렸는지, 반정부군이 날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신경 쓸 이유는 없다.
[플레어(Flare)를 사용해 미사일을 회피하겠습니다.]
푸른색 불꽃이 뿜어진다.
[부스터 모드를 가동합니다.]
그와 동시에 질주의 속도가 더욱더 빨라진다. 미사일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멀어진다. 플레어에 닿은 미사일이 상공에서 폭발을 일으킨다. 펑! 나는 지상을 내려다본다.
목적지인 우랄산맥에 도착했다. 물론 그 산맥의 일부는 물에 잠겨있었지만, 산맥이 방파제 역할을 했기 때문인지 오히려 그 내부는 물에 잠기지 않았다. 진리의 눈, 게비샤를 사용했다.
주변의 정보가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어떻게 한다.’
막상 오긴 했는데, 막막하기 짝이 없다. 이 거대한 산맥에서 니콜라이가 숨어있는 핵 벙커를 찾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보다도 힘든 일이었으니 말이다.
차라리 모래사장은 범위가 좁기라도 하지.
“어떻게 한다.”
섣부르게 행동했다가는 저쪽에서 핵미사일을 발사해버릴 가능성도 있다. 물론 아직까지 발사하지 않은 걸 보면 무언가 걸림돌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핵미사일이 발사된다면, 핵전쟁을 막는다는 계획은 말짱 도루묵이 된다. 생각하던 나는 미국 측에 연락을 걸었다.
세상이 코인 채굴기가 되기 이전부터 러시아와 대립해왔던 미국이라면 그의 핵 벙커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라소미와 예런 일리아티.
내가 알고 있는, 미국 내에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이는 그 둘이다. 둘 중에 누구에게 전화를 할까 고민하다가, 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런 일리아티에게 먼저 알리는 편이 대통령에게 전하기 편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전자에게도 전화를 걸어 경고할 생각이었지만.
- 친구?
“저기···”
- 미안하지만 지금 나는 자는 중이야. 나중에 연락해.
‘음성 메시지였나.’
선택지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 오빠?
“여보세요?”
- 응응, 들려. 주변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지금 우랄산맥에 와있거든?”
- 우랄산맥? 그 러시아? 러시아는 갑자기 왜?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미국은 러시아가 핵전쟁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항공모함도 운용하지 못하는 마당이니까 당연한 거겠지.
“놀라지 말고, 잘 들어. 지금 러시아의 니콜라이가 핵전쟁을 계획 중이야.”
- ···오늘 만우절이야?
“아니, 만우절 아니고 사실 맞으니까 대리어스 대통령에게 전해줘.”
- 대체 러시아에서 왜?
“나름대로의 이유야 있겠지.”
물론 그 이유라는 것이 일반인은 이해할 수 없는 종류가 분명하겠지만 말이다. 또다시 침묵하던 그녀에게 이번에는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급한 그녀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 기다려, 오빠. 지금 달려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미국에 지원 요청을 하고 싶어. 니콜라이가 우랄산맥 내의 핵 벙커에 숨어있다곤 하는데, 그게 어디인지를 모르겠거든.”
곧 나는 대리어스 대통령과 통화를 나눌 수 있었다. 자다가 일어났는지 그의 목소리는 잠겨있었지만, 그는 내게 전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그리고 나는 정보를 받을 수 있었다.
핵 벙커의 ‘예상 위치’를.
‘총 다섯 곳.’
가짜 벙커가 있을 확률도 있지만, 다섯 곳 중 하나일 확률은 거의 99%에 달한다고 했다. 질주에서 내린 나는 위치를 향해 직접 걸었다. 일단 진짜 벙커를 찾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