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내가 쟈비스 안에서 기습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룹원들은 대노했고, 결국 나를 기습했던 남자를 비롯한 러시아인들은 바른 빛 교회 지하의 ‘교화소’에 갇힐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Пожалуйста, послушайте нашу историю.”
그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향해 떠들어댔지만 당연히 러시아어라 알아듣지는 못했다. S31의 번역 기능을 사용해 그들과 대화할까 고민했지만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들에게 내가 공격당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공격당한 게 내가 아닌 다른 그룹원이었다면 큰 상처를 입거나, 정말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물론 그들의 목숨을 앗아갈 생각은 없고, 적당히 벌을 주고 풀어줘 대화를 할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처량하게 끌려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손에 들린 비수로 시선을 돌린다.
<사신의 비수>
종류 : 무기(Weapon)
등급 : 신화(God)
내구 : 444/444
옵션 : 민첩 +14.4, ①사신의 저주 : 공격 시 50% 확률로 공격한 적에게 사신의 저주 발동, 저주 발동 시 저주에 걸린 대상은 매초 마다 피해를 입고, 입는 피해 +50%, 저주는 중첩 가능 ②저주 폭발 : 사신의 저주의 중첩이 4번 쌓일 때마다, 저주가 폭발해 소유자의 마력에 비례한 데미지를 준다.
아까 나를 기습했던 남자가 사용하던 그 비수가 맞다. 평범한 비수가 아닐 거라고 짐작했지만, 설마 신화 등급 비수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좋네.’
민첩 14.4를 올려주고, 그 뒤에 붙은 부가 옵션들도- 물론 직접 사용해봐야 정확하게 알긴 하겠지만- 신화 등급 장비답게 좋은 편이다.
‘이건 얼마짜리야?’
[50만 기프트입니다.]
‘술값은··· 건졌다고 할 수 있나?’
예상치 못한 소득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참으로 미안한 말이지만, 그 러시아인에게 돌려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사신의 비수를 만지작거리던 나는 이내, 아공간 창고에 넣었다.
***
조금 늦게 이서란과 그녀의 동료들, 소프 대령이 도착했다. 미국 쪽의 허가를 받느라 늦어졌다는데, 허가까지 받은 걸 보면 미국 정부에서도 흔쾌히 그들의 의견을 존중한 모양이었다.
직전의 러시아인들의 사례가 있어서 그런지, 나와 함께 그들을 맞이하는 그룹원들의 얼굴엔 긴장이 가득했지만, 내가 그들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자 그들의 긴장 역시 풀렸다.
나는 소프 대령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캡틴.”
그와 악수를 나눴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시네요.”
“예, 저희를 많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자신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일하시겠다네요. 지금 당장이라도 상관없으시다고.”
“하하, 그러면 이따 함께 가시죠.”
어차피 이따가 하남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가지고 온 항공모함을 김민수와 함께 개조하기 위해서다. 소프 대령의 조언을 구한다면, 조금 더 효율적으로 개조할 수 있으리라.
“Thank you.”
그와의 대화를 마친 나는 이서란과 그녀의 동료들을 돌아봤다. 그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놀이공원에 온 것처럼 잔뜩 신난 사람,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는 사람.
그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나는 이내, 엄마로 추정되는 여자가 안고 있는 아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절로 흘러나오는 귀여운 아기였다.
“귀엽죠? 에일리예요. 제가 직접 지은 이름이라고요.”
“그러네요.”
우리 그룹에도 10살 전후의 어린아이들은 제법 있었지만 저렇게 갓난아기는 처음이었다. 저 정도면 많아 봐야 2살 남짓일 거 같은데. 아기와 눈이 마주쳤고, 살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헤에, 아빠 미소 한가득인데요?”
이서란의 말에 나는 헛기침을 했다.
“흠흠, 에일리가 많이 귀엽네요.”
“나중에 소개해드릴게요.”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서란 씨가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선택이요?”
“이런 상황을 대비해, 쉘터 내에 외국인 거주 구역을 따로 만들어뒀습니다. 아무래도 쉘터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도 생각해서 말입니다.”
“아··· 그러면 저보고 일반 구역에서 묵을지, 외국인 거주 구역에서 묵을지 선택을 하라는 소리죠?”
“예, 동료분들은 외국인 거주 구역에 묵게 될 겁니다.”
물론 이서란은 한국인이기에 적응하지 못할 일은 없겠지만, 그녀의 동료들은 전부 미국인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외국인 거주 구역에 묵는 걸로 할게요. 아무래도 동료들이랑 같이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예, 그러면 그렇게 조치해두겠습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네요. 백악관도 물에 잠기는 마당에, 여기가 물에 잠기지 않은 걸 보면?”
“배수 시설을 정비했습니다.”
상당한 기프트를 투자해 강동구 전체의 배수 시설을 정비했다. 아무리 비가 많이 퍼부어도, 더 이상 쉘터와 인근의 지역들이 물에 잠기지 않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단순히 배수 시설을 정비한 것만으로 물에 잠기지 않았다는 건 좀 신기한데요?”
흥미를 드러내는 그녀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한강에 거대한 댐을 쌓았습니다.”
만약 한강을 두른 거대한 댐을 쌓지 않았다면, 진작 흘러넘쳐 이미 잠긴 다른 지역들처럼 물에 잠겼을 것이다. 일찍이 판단을 내린 정민혁의 계획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댐이 무너질 경우, 한 번에 침수당할 위험성도 존재하지만.’
그래도 플라즈마 보호막이 있으니, 어떻게든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여기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생각이 끝까지 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내 말에, 이서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저희는 어디로 가게 되나요?”
“일단 외국인 거주 구역까지 이동하시죠.”
일단 그들에게 숙소를 소개해주고, 그들이 가진 짐을 풀어놓으면 그때 대화를 다시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
이진서와 함께 외국인 거주 구역으로- 구역이라 해봐야 아직은 빌딩 하나가 전부였지만- 이동한 그들은 빌딩의 관리자이자 책임자인 웨이타오 주석을 만날 수 있었다.
미리 이진서의 부탁을 받은 웨이타오 주석은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그들에게 친절하게 빌딩 내부를 소개해줬다. 물론 빌딩의 최상층은 ‘절대’ 올라오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말이다.
“저 인상 좋게 생긴 사람이 중국의 주석이라고요?”
이서란의 물음에, 밥은 무술을 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래, 내가 쿵후 배운 거 말해주지 않았나? 그때 중국말을 조금 배웠거든.”
“그런데 중국의 주석이 여기 왜 있대요?”
“그건 나도 모르지만, 뭐, 우리와 같은 사례 아니겠어?”
불현듯 그들은 지난 날들을 회상한다.
세상이 코인 채굴기로 변했고, 로스앤젤레스 역시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지옥이 돼버렸다. 도시를 떠돌아다니던 생존자 그룹에 합류했다. 지금의 동료들은 그때 만난 이들이었다.
어느 정도 이 세상에 적응하나 했더니, 한 달간의 혹한기가 시작됐고, 혹한기가 끝났더니, 이번에는 거대한 쓰나미가 그들을 찾아왔다. 항거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던 대재앙이었다.
쓰나미로 인해 그때까지 함께 해온 동료 몇몇이 쓸려나갔다. 만약 미국 정부에 의해 구조되지 않았다면, 그녀와 다른 동료들 역시 똑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비록 쓰나미가 그들이 있던 윌셔 그랜드 센터(Wilshire Grand Center) 최상층까지 덮치진 못했지만, 변이체들이 쉴 새 없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구조돼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제 좀 한숨 돌리나 했더니, 우기(雨期)가 시작됐다. 무섭도록 폭우가 퍼붓기 시작했고 그들은 거처를 거의 매일마다 옮겨야만 했다. 그야말로 긴장의 연속이었다.
백악관마저 물에 잠긴 마당에, 새로 이동하는 거처라고 멀쩡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날들을 회상하던 이서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끔찍하다.
“긴장 풀지 말라고. 여기도 겉만 훌륭하고, 사실 속은 끔찍할 수도 있으니까.”
밥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여기가 세계에서 ‘제일’ 안전하다는 건 사실인걸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이서란은 이진서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녀는 미국 정부의 통역 일을 맡은 후, 그의 행적들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한국 전체의 변이체를 소탕한 건 물론, 중국의 그 수많은 변이체들까지 소탕했다고. 그야말로 전설적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거 몰라? 우리도 무언가 일을 하게 되겠지. 어쩌면, 인체 실험의 실험체가 될지도 모르고 말이야. 내가 들은 소문에 의하면 말이야··· 서울에서 인체 실험을 자행한다는 말이 있어.”
숨죽여 말하는 그의 말에, 이서란은 피식 웃으며 헛소리로 치부했다.
“인체 실험은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그들은 곧 그들이 묵게 될 층에 도착했다. 12층. 전에 5성급 호텔이었다는 말답게 외관이 아름다웠지만 내부는 더 아름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2층에는 바(Bar)가 있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저건 미칠 듯이 마음에 드는군.”
“섣부르게 행동하지 말아요. 기프트를 지불해야 할지도 모르잖아요.”
“전부 드셔도 됩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그들은 화들짝 놀랐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건 정장을 걸친 남자였다.
“아랍인? 인도인? 아, 실례라면 미안해요.”
“인도인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레쉬라고 합니다.”
그의 영어는 능숙했고, 그와 대화를 나누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정말 저거 전부 다 마셔도 된단 말이오?”
바로 본론을 꺼내는 밥의 말에 나레쉬는 엷게 웃으며 영어로 말했다.
“예, 웨이타오 주석 님께서 개인적으로 구매해 채워놓으신 것들입니다.”
“그러면 더더욱 마시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저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는데.”
“여러분의 편의를 위한 것이시랍니다. 그리고 진짜 마시면 안 되는 것들은 웨이타오 주석님의 층에나 있으니까요.”
“그게 더 궁금해지는데? 마시면 안 되는 것들이 뭐지?”
이서란이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술에 대한 그의 강력한 집착을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그가 ‘절대’ 올라오지 말라고 경고했었던 그의 층에 침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허튼짓할 생각 말아요. 내쫓기고 싶어?”
“아니, 그럴 의도는···”
나레쉬는 어깨를 으쓱였다. 곧 밥은 성큼성큼 바(Bar)로 이동했다. 그리고 냉장고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위스키 한 병을 꺼내 테이블에 앉았다. 딸깍. 단숨에 들이켠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지상 풍경. 단숨에 벌컥벌컥 한 병을 들이켠 그가 입을 열었다.
“서울도 나쁘지 않은데?”
나레쉬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마, 더 좋아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