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브라질 카르텔에 포로로 붙잡혀 있던 윤민수가 미군에 의해 구출된 지 벌써 3주째. 하지만 그는 아직도 격리 시설을 벗어나지 못했다. 관리자는 그에게 전염병 유행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직까지 증상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잠복기일지도 모르니 앞으로 몇 주는 추가로 격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관리자의 말을 곧이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의 말대로 전염병 때문이라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이유가 있다면··· 이진서 때문이라든가.’
윤민수의 딴에는 꽤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미국에 있어, 이진서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이고, 그와 원수 관계인 그를 억류할 이유는 충분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섣부르게 행동하진 않았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격리 시설에 갇혀있는 건 그뿐만이 아니다. 그가 가장 사랑하던 연인뿐만 아니라 친구들 역시 억류돼있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격리 시설에서의 삶은 부족하지 않고 풍족했다. 매일 일정한 양의 기프트가 지급됐고, 그 기프트로 필요한 물건을 대부분 구매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진서가 만약 그를 해코지하라고 지시라도 내린다면, 이곳은 끔찍한 형무소로 변할 것이라는 걸 윤민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불안감에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그 누나가 오면 정보라도 알아봐야겠어.’
윤민수는 에밀리- 라소미를 떠올렸다.
높은 직책처럼 보이는 그녀는 이 미국에서 그와 유일한 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것이 그의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창가를 바라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때였다. 드르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방 안으로 들어온 건 젊은 남자였다.
언젠가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게 설마 오늘일 거라곤 그도 예상치도 못했다. 남자의 정체를 확인한 그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다가, 이내 중얼거렸다.
“···진서 형?”
그러나 그는 곧 괴리감을 느낀다. 그가 기억하던 모습과 달라졌기 때문이다. 얼굴도, 몸도, 분위기도. 분명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옛 흔적은 남아있지만, 어느 것 하나 옛날과 다르다.
“잘 지냈어, 형?”
“잘 지냈겠냐? 누구 때문에 4년 동안 딸배 일, 존나 열심히 했거든.”
그렇게 말한 이진서는 생각에 잠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나쁜 기억만 있었던 건 아니다. 배달부 일을 하는 중에, 좋은 기억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쁜 기억이 더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니, 그건 내가 미안하게 됐···”
그는 얼른 입을 열었다. 이진서는 이 세계에서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그와 그의 애인, 친구들의 생사여탈권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만약 과거의 일을 복수하고자 든다면···
아마 미국조차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제 그런 존재니까.
‘그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진짜 미안해, 형. 진짜로.”
“사과로 끝날 시기는 지났지? ‘그때’의 내가 사과를 받아줬을지도 의문이지만. 아마 그 당시에 너를 만났다면 너를 죽이지 않았을까?”
한순간의 그릇된 선택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그리고 그 주범은 눈앞에 있는 윤민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 만약 그를 만났다면 어쩌면 홧김에 죽여버렸을지도 모른다.
물론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에,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천천히,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그래도 네 덕분에 플레이어로 각성하게 됐으니, 솔직히 말하면 고마워해야 하나 생각도 하고 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그는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맞아, 형. 내가 아니었으면 형도 변이체가 됐을 거야.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 아니야? 형은 이제 이 세계의 신이나 다름없다고. 내가 형을 신으로 만들···”
이진서는 피식 웃었다.
“넌 어떻게 이렇게 하나도 안 변했냐?”
“혀, 형은 많이 변한 거 같은데? 좋은 쪽으로 말이야.”
“됐고 딱 한 대만 맞자. 그걸로 깔끔하게 끝내줄게.”
“한 대라면···”
다음 순간, 그의 주먹이 움직인다. 막는다는 생각도, 혹은 남자답게 멋있는 자세로 맞는다는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빠른- 그의 인지의 속도를 한없이 초월한 주먹이 그의 볼에 닿았다.
그대로 날아간 그는 격리 시설 벽에 부딪힌다. 와르르, 벽이 무너져 내리는 건 물론 건물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잔해를 가볍게 떨쳐버리며 그는 윤민수에게 다가간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눈을 감은 채 그는 몸을 꿈틀거렸다. 의식이 날아가진 않았지만, 전신에 격통이 전해진다. 고작 주먹 한 대 맞았다고, 이게 말이 되는 건가? 그가 강해졌다는 건 알았지만···
그런 그에게 이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대만 더 때릴까?”
윤민수는 간신히 눈을 떴다. 눈 한쪽이 어둡다. 눈알이 날아간 건지, 아니면 단순히 시력만 상실한 건지 그에게는 분간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으느, 흥···”
부러진 이빨과 핏물이 입속에 가득해,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한 글자, 한 글자 입을 여는 것 자체가 괴롭기 짝이 없다. 그러나 해야만 했다. 이런 걸 한 대 더 맞으면···
진짜로 죽는다는 생각이 치밀었기 때문이다. 그의 모습을 본 이진서는 씁쓸하게 말했다.
“됐다. 너 때려서 뭐 하겠냐?”
흐린 시야 너머로 메시지가 떠오른다.
[‘무작위 계약 2’에 의해 갑으로부터 계약금 100,000기프트가 제공됩니다.]
“이건 깽값 해라. 우리 관계는 여기서 청산하는 걸로 하고. 또 나한테 메일을 보낸다든가, 어디 가서 나 안다고 떠들어 대는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
차마 복수한다는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한 그였다. 이진서의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설을 빠져나갔다.
윤민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는 방을 나갔고, 그는 홀로 남겨졌다.
“쓰블···”
그의 욕설만 공허하게 남았을 뿐이다.
***
이곳으로 오기 전 박승기를 만나 조언을 구했다. 내게 코인 투자를 적극 권유했던 후배를 만나게 될 것 같은데, 의원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거냐고 말이다. 그는 간결하게 물었다.
- 지난 4년은 자네에게는 지옥이었을 거네. 그렇다면··· 그 후배는 어떤가?
- 예?
- 그 4년이 자네 후배에게는 어땠냐는 말일세.
- 그건···
그 이후, 윤민수는 회사를 퇴사했다.
처음에 나는 그가 나와 마찬가지로, 코인 투자에 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분노했지만, 그가 나와 똑같은 신세라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일말의 동질감 내지 동정심도 느꼈다.
이전까지는 내가 그와 친한 관계였던 것도 한몫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 내 착각에 불과했다. 들은 바에 따르면, 윤민수는 코인 투자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코인 투자로 축적한 것이 아닌, 다른 개미들을 끌어들이는 ‘바람잡이’ 역할로 축적한 것이지만 말이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결국 경찰이 수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윤민수가 브라질로 튄 후였다. 내가 아는 것처럼 사업을 시작했고, 사업은 꽤나 번창했다는 모양이었다. 그에게 당한 수많은 피해자는 고스란히 남겨졌지만 말이다.
- 지옥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오히려 다른 이들을 지옥에 빠트렸으면 빠트렸죠.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는 자네 후배를 죽이기는 싫은 거고?
- 그건··· 예. 결과적으로 말하면 이 세계에서 제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고···
- 나는 사람과 사람의 인연은 마치 실과 실이 이어지는 것과 같은 거라 생각하네. 한번 잘못되면, 실타래가 엉키면 풀어내기도 쉽지 않지. 풀어내기 힘들 정도로 엉켰다면···
그는 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 가차 없이 잘라내게.
그리고 나는 그의 조언대로, 과거의 악연(惡緣)을 끊어내는 데 성공했다. 앞으로 다시 엮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가 경고한 대로 그가 선을 넘으려 한다면, 다시 실을 엮으려 든다면 그때는 진짜 ‘응징’이 무엇인지 보여줄 생각이었다. 생각하던 나는 이서란을 바라본다.
내 통역 겸 안내역을 맡은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건물이··· 무너졌네요?”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최대한 힘 조절을 한다고 쳤는데, 설마 건물이 무너질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예, 뭐.”
“죽이신 건 아니죠? 하도 만나고 싶다고, 내가 이진서와 어떤 관계인지 아냐고 으름장을 놓기에···”
“뭐, 일단 살아는 있습니다. 깽값도 줬으니, 상처는 알아서 치유할 겁니다.”
물론 평범한 깽값이 아닌, 조건부 깽값이었다. 윤민수는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녀와 함께 보트에 탑승했다. 부우웅. 보트가 이동하기 시작한다.
“대통령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궁금하다고 물어보시던데요? 나를 제치고, 제일 먼저 보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나는 대답 없이 웃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여전히 흐린 하늘, 하늘에서는 비가 쏟아져 내린다. 우리가 탄 보트는 곧 백악관으로 이동했다. TV에서 백악관을 봤던 적이 있다.
물론 기억 속의 풍경과는 다르다. 내가 봤던 풍경에는 백악관이 물에 잠겨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최대한 물을 뺀다고 뺐는데도 이래요.”
“아, 괜찮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물에 잠기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다. 우리가 탄 보트는 백악관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곧 건물 위에서 나를 기다리는 흑인을 볼 수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제이드?”
“어떻게 알았어요?”
“예?”
“대리어스 대통령의 아들 이름이 제이드잖아요. 알고 말씀하신 거 아닌가요?”
설마 강릉에서 마주쳤던 그 흑인이 대통령의 아들일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하기야, 그런 신분이니 미국이 항공모함까지 동원해가며 데려갔던 거였구나.
이제야 미스터리가 풀린 듯한 기분이었다.
“제이드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대리어스 대통령이에요. 이거 타고 올라와요.”
그녀가 건네는 로프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야 그냥···”
가볍게 도약한다. 꽤 높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볍게 그의 앞에 착지했다. 경호원들이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악수를 건넸다.
“Hello.”
대리어스는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Welcome.”
그제야 뒤에서 로프를 타고 올라온 이서란이 투덜거리며 중얼거렸다.
“정말 터프하시네. 대리어스 대통령이 이진서 씨가 몹시 반가운가 봐요.”
“저도 정말 반갑다고 전해주세요.”
“네.”
나는 대리어스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그 내용은 큰 의미 없는 대화들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지 않았냐고, 힘들지 않았다고, 그동안 보고 싶었다고, 뭐 그런···
“대리어스 대통령이 이진서 씨를 만찬에 초대하고 싶다네요.”
아마 진짜 얘기는 만찬에서 할 생각인 건가. 나는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