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우랄산맥 안에 위치한 핵 벙커. 애초에 벙커가 위치한 산맥 자체가 험준한데, 그 입구는 1급 바리케이드로 막혀 있어 설령 초월체라 한들 침입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요새.
그런 벙커 지하 수백 미터에서 러시아 대통령, 니콜라이는 클래식 음악을 즐기고 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마치 지휘자가 된 듯 일어나서 팔을 휘젓기도 한다.
잠시 후 음악이 끝났고, 그의 동작 역시 멈췄다. 지켜보던 군 장성들이 그를 향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퍼붓기 시작한다. 니콜라이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앞에 놓인 위스키를 들었다.
“나의 전우들이여, 축배를 드세.”
“예, 각하!”
“이 세계의 유일한 구원, 뉴클리어를 위해.”
“뉴클리어를 위해.”
위에 걸려있는 버섯구름 문양을 보며 기도한 니콜라이는 단숨에 위스키를 들이켠다. 워낙 도수가 높아 목구멍이 얼얼할 정도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군 장성들 역시 위스키를 들이켰다. 그때, 군 장교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니콜라이는 무슨 일인가, 그를 쳐다봤다. 장교는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각하, 반대파 세력들이 벙커에 침입하려고 하고 있답니다.”
“쯧쯧, 쓰레기 녀석들. 치워라.”
“하지만 그 세력이 결코 작지 않아서···”
니콜라이는 권총을 꺼낸다. 그리고 당황한 장교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장교 역시 플레이어였지만 탄환을 피하지는 못했다. 탄환은 그의 머리를 파고들었고··· 그걸로 끝이었다.
철저하게 엘리트 길만을 걸어온 젊은 장교는 고작 독재자의 총질 한 번에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보리스, 자네가 직접 가게.”
보리스라 불린 중년 사내는 부동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예, 각하!”
“구원을 막으려는 녀석들은 모조리 치워버려야 한다. 유일한 구원, 뉴클리어를 위해!”
그렇게 외치며 버섯구름 문양을 향해 경례를 하는 니콜라이의 모습은 광인에 가까웠다. 신도, 하다못해 인간도 아니고 뉴클리어, 핵을 숭배하는 모습이 정상일 리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를 따르는 이들 역시 정상일 리 없다. 그들 역시 광적인 목소리로 경례를 한다.
“뉴클리어를 위하여!”
벽에 펼쳐진 세계 지도에는 붉은색으로 색칠 있었다. 오로지 그들이 있는 ‘러시아’ 땅만을 제외하곤 말이다. 단순히 의미 없는 그림은 아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뉴클리어, 핵미사일을 투하할 지역들이었다.
***
재사용 대기시간이 끝나자마자 영령 소환을 사용해, 대마도사 옐레나를 소환했다. 나를 보자마자 의아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갑자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내 이곳저곳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왜 그러십니까?”
“못 본 사이에 변했네. 그것도 꽤 많이.”
“그럴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답을 마친 나는 내심 기대를 가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대마도사인 그녀가 보기에 잠재력이 다섯 단계나 오른 현재의 나는 어떻게 보일 것인가.
곧,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열린다.
“전에는 못 봐줄 정도였다면, 지금은 봐줄 만한 정도는 돼.”
대마도사라는 그녀의 신분을 떠올리면 극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썩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다. 나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고작 봐줄 만한 정도가 전부입니까?”
“미안하지만 나를 다른 마법사들과 똑같이 생각하지 말아줄래?”
“······”
“내가 보는 시선이, 그들과 차원이 다르다는 말이야. 뭐, 인정해줄게. 네 잠재력은 어지간한 마도사 수준으로는 올라왔어.”
“마도사 수준이라면 높은 겁니까?”
“전에 봤던 그 정령사보다는 못해도··· 내 세계를 통틀어서도 ‘보기 드문’ 재능이야.”
“그 정도면 뭐···”
“뭐, 내가 보기엔 보잘것없지만 말이야.”
“사족은 굳이 안 붙이셔도 됩니다.”
뭔가 억지로 얻어낸 찬사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녀의 말이 거짓인 것 같진 않으니··· 이 정도면 만족이다. 마도사 수준이라면 전투 마도사, 벨루가 수준 정도는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영령 소환을 사용해 그를 불러냈을 때, 그의 무위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물론 기프트 계약을 습득한 지금, 나는 그를 넘어섰다고 해도 무방하지만 말이다.
하물며 잠재력이 형편없던 시절에도 그를 넘어섰는데, 잠재력이 그와 동일해진 지금은 어떨까?
“어떤 편법을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그야말로 환골탈태 수준이야. 게다가 너는··· 애초에 전부터 강했잖아?”
“그냥 좀 신기해서 말입니다. 편법만 사용하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진짜’ 마법이라는 걸 사용해봤는데···”
쉘터에 머무는 동안 미티어 스웜, 미티어 스트라이크뿐만 아니라 다른 마법 역시 사용해봤다. 그 결과, 나는 내가 사용했었던 대부분의 마법을 유사하게 구현할 수 있었다.
물론 스킬로 사용할 때와 달리, 제법 불편함이 느껴지긴 했다. 주문을 외우거나, 마력 조절에 실패하면 마법이 잘못 나가거나, 아예 마법의 성질 자체가 뒤바뀌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뭐, 간단하게 예를 들면 파이어 볼을 구사하려 했는데 아이스 볼이 나간다든가··· 사실 내 목적대로 온건하게 구사한 마법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이쯤 되면 처음에 미티어 스웜을 사용한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비록 그 재능이 마도의 진리에 도달하지는 못할 정도라도, 편법이 더해진다면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가 보기에 연병수는 어느 정도일까? 게다가 그는 인근의 아군의 잠재력을 올려주는 진혜연의 버프로 인해 잠재력이 2단계나 상승한 상태다.
버프가 이미 일반인에게 적용된다는 것도 확인한 후였다.
“보여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데?”
“저를 따라오십시오.”
아우리엘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내게, 옐레나가 뚱한 눈으로 말했다.
“그냥 나한테 위치 말해.”
아, 잠시 그녀가 텔레포트(Teleport) 마법을 습득했음을 잊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곧 강렬한 빛과 함께 우리는 갈락시아의 도서관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책을 읽고 있던 그룹원들 갑작스런 우리의 출현에 화들짝 놀라며 떨어진다. 무기를 꺼내든 이들도 있었지만, 이내 우리의 얼굴을 확인하자 고개를 90도로 숙였다.
“미안합니다.”
옐레나는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대현자, 갈락시아의 도서관이잖아?”
“그를 아십니까?”
“아니, 나보다 더 고대의 인물이라 만난 적은 없어. 하지만 확실한 건 갈락시아가 수집한 서적들은 하나하나가 ‘진귀한’ 것들뿐이라는 것.”
그토록 자부심이 넘치는 그녀가 ‘진귀한’이라고 표현했다면 그 가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잠시 서적을 둘러보던 그녀는 나를 향해 말했다.
“서적은 나중에 시간 내서 둘러보는 걸로 하고··· 가능하지?”
“예, 근시일 내에 다시 불러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어렵지도 않았다.
영령 소환의 재사용 대기시간은 72시간. 성운의 가호로 인해 재사용 대기시간이 25% 감소됐으니, 54시간이다. 그런데 시간 가속을 습득한 내 시간은 두 배 빨리 흘러간다.
실질적으로 재사용 대기시간은 27시간이니, 거의 하루마다 한 번씩 사용할 수 있는 셈이다. 정 뭐하면, 아예 성운의 가호를 사용해 재사용 대기시간을 초기화해도 되는 노릇이고.
앞으로 시간이 될 때마다 짬짬이 그녀를 소환해 마법을 배울 생각이었다. 대마도사인 그녀는 그 실력에 걸맞은 오만함을 가졌지만, 마법이라는 분야에 있어서는 1타 강사니 말이다.
“저 친구야?”
“예?”
그녀는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위에 있는 마법사 말이야. 뭐, 저 친구도 우리의 등장을 눈치챈 모양이지만 말이야.”
그녀가 말하는 저 친구가 연병수를 의미하는 것임을 깨달은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또다시 그녀의 손을 잡자, 나는 7층에 도착했다. 연병수는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모양인지 우리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위대한 대마도사님을 뵙습니다.”
“얘, 내 정체에 대해 알고 있나 보네?”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예, 서적을 통해 옐레나님의 이야기를 알게 됐다고 했습니다.”
내게 옐레나 마고스의 전설적인 업적들을 이야기해준 이가 바로 연병수였다.
“병수는 어느 정도입니까?”
다음 순간, 순간적으로 세상이 회색으로 물든다.
정지된 세상. 나는 그녀가 무언가 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려 시간을 멈춘 걸 보면 평범한 마법은 아닐 것이다.
그나저나 이런 마법을 사용한 이유는, 비밀스럽게 할 말이 있다는 걸까?
“본인이 직접 들으면 악영향을 받을지도 몰라서.”
“······?”
“설마 나 이상의 재능을 여기서 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그렇습니까?”
“방금 전에 말했던 ‘마도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만한 재능이야. 물론···”
“그릇만 크다고 되는 문제는 아니겠죠.”
연병수는 내게 말했었다.
단순히 그릇만 크다고 마도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그릇의 내부를 채울 마력과, 마법을 이해할 수 있는 지력, 그리고 올바른 스승, 좋은 마법 서적 등이 필요하다고.
거기에 개인적인 노력과 운마저 필요하다고 말이다. 생각하던 나는 피식 웃었다.
‘연병수가 플레이어였다면 다 찜쪄먹을 수 있었던 거 아냐?’
그가 그 모든 요소- 심지어 행운마저도 ‘편법’으로 습득할 수 있는 플레이어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기프트가 필요하긴 하지만, 지금의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억 단위의 기프트도 지원해줄 수 있다.
물론··· 불가능한 가정이었다. 나는 그를 플레이어로 만드는 방법부터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아니라도, 간접적으로 지원해주는 건 가능하지.’
영약을 지원해준다든가, 아니면 장비 아이템의 지원을 받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나저나 만약 소망 효과까지 받아 연병수의 잠재력이 추가로 3단계 올라갔다면···’
‘초월의 별’의 버프 스킬을 통해 2단계 올라간 그의 잠재력이, 옐레나 이상이란다. 심지어 이건 다른 이도 아니고, 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 그의 잠재력이 추가로 3단계 올라갔다면 그의 잠재력은 누구와 비견될 수 있을까? 아니, 인간계에서는 비견될 이가 없을 것 같은데.
물론 소망 효과의 발동 조건을 떠올린다면 그의 잠재력이 3단계 올라갈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의 옆엔 최미라가 있기도 하고.
“저런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아마 시간이 많이 필요할 거야. 뭐, 내가 가르친다면 그 시간을 조금 단축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왠지 모르게 열망이 엿보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를 보조하고, 대마도사인 그녀에게 교육을 받는다면 연병수는 빠르게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강해진 연병수가 우리 그룹에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오리란 것만은 분명했다. 그걸로 끝이다. 나는 결정을 내렸다. 이른바 ‘연병수 키우기’의 시작이었다.
곧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연병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
“혹시 방금 무슨 일이···”
그런 그를 향해, 옐레나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너, 내 제자가 돼라.”
“예, 예!?”
기겁할 듯 놀라는 연병수. 그러나 그의 표정은 이내 환해지더니, 대답인지 환호성인지 모를 소리를 질렀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