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성명?”
“마쓰무라 이치로.”
“···마쓰무라 가문?”
이치로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마쓰무라 가문이 일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재벌 가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마쓰무라 이치로라면···
“가주?”
“그렇소, 나는 마쓰무라 가의 가주요. 나를 알고 있는 걸 보면, 그대는 일본 재계와 어느 정도 연이 있나 보오?”
“저는 별로 연이 없지만, 아버지께서 연이 있으셔서.”
실제로 지하오란은 일본에 들르면 일본 재벌들과 식사를 가지기도 했다. 그녀 역시 몇 번 그 자리에 동행한 적 있었다. 마쓰무라 이치로를 본 적은 없지만,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대의 아버지를 내가 뵌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잘 부탁드리오.”
미란은 가볍게 그와 악수를 나누고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치로 씨는 서울로 이주하고 싶으시다고요?”
“그렇소.”
“이유는요?”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온 자가 서울에 있다고 알고 있소. 나는 그자의 직접적인 보호를 받고 싶소.”
“미안하지만 불가능해요.”
“어째서?”
“한국과 일본은 서로 감정이 좋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요. 그건 중국 역시 마찬가지지만.”
며칠 전에는 지하오란과 진지하게, 그룹 합병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었다. 그룹 내에서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합병 여론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면 논의 결과는 ‘반대’로 돌아갔다. 역시 국적이 발목을 잡았다. 한국과 일본의 감정이 좋지 못하듯, 한국과 중국의 감정도 좋다고 말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지하오란은 그룹끼리 융화되지 못하고 혐오와 차별 문제가 생길 것을 두려워했고, 그녀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다. 실제로 란페이 그룹원들 중 몇몇은 아직도 혐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이진서에게 그렇게 도움을 받아 놓고도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자신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진서의 그룹원들 중에도 혐중 감정을 품고 있는 이들이 없진 않을 것이다.
미란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걸 그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그녀에게 이치로는 답답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한국과 일본의 감정이 좋지 않은 것처럼, 일본과 중국의 감정도 그리 좋다고 할 순 없지 않소? 실제로 내 아들이 구타를 당했소. 중일 전쟁의 원수를 갚겠다고 그러면서.”
“그것 참 안 됐네요. 최대한 자제해달라고 말을 했는데···”
미란은 머리가 복잡해지는 걸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그 일은 제가 확실하게 조치할 테니 염려 마시고··· 일단 ‘리더’에게 연락은 해볼게요. 하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그리고 설령 허락이 떨어진다 해도···”
기대한 만큼 실망 역시 클 것이다. 그러나 미란은 굳이 뒷말을 말하지는 않았다. 허락이 떨어질 확률부터 낮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재산이라면 달라는 대로 다 드리겠소. 아직 일본에 내 비상금이 상당하거든.”
미란은 피식 웃었다. 이 노친네, 섬에만 갇혀 살았더니 현실 감각이 많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세계에서 그런 재산 따위는 아무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필요 없어요.”
“뭐가 있는 줄 알고?”
“핵미사일 정도 되지 않는 이상 관심도 보이지 않을 텐데.”
“······”
애석하게도 일본은 핵보유국이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핵보유국이라 하더라도 재벌인 그가 핵미사일의 위치 같은 걸 알고 있을 리 없는 것이다.
“한 천만 기프트쯤 기부하면 또 모르겠네요.”
이치로는 자신의 귀를 또다시 의심하고 말았다.
“천만 기프트?”
“웨이타오 주석은 서울에 거주하는 유일한 중국인이에요. 그는 천만 기프트를 ‘리더’에게 기부했고, 그 대가로 서울에 거주하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웨이타오 주석···? 중국의 이인자?”
그 신분은 재벌가의 가주인 그와도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중국의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세상이 코인 채굴기로 변하기 이전의 이야기였지만.
“지금은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지만. 뭐, 어쨌거나 천만 기프트가 있다면 시도해보시는 것도 좋겠네요.”
“포기하겠소.”
결국 이치로는 힘없이 말했다. 신분도 신분이지만, 무엇보다 그의 수중엔 천만 기프트는커녕 백만 기프트도 없었으니 말이다.
힘없이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미란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녀는 행복한 표정으로 메시지를 입력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만 이치로 씨, 연락할 구실 정도는 돼줘야겠어.”
***
쉘터의 외곽에 위치한 빌딩을 개조해 외국인 거주 건물을 만들었다. 아직 거주인이라 해봐야 웨이타오와 인도의 정부 요원이었던 나레쉬, 그의 가족들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나는 외국인 거주 건물에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웨이타오가 그의 기프트를 소모해 단장했다더니 내부는 그야말로 화려하기 짝이 없다. 마치 궁전이라도 온 듯한 느낌이다.
내 앞에 홀로그램이 생성된다.
-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AI?”
- 저는 이 건물의 AI인, 하이브(Hive)입니다.
놀랍게도 수송기에 달려 있는 AI가 건물에 장착돼 있었다. 그 형태는 물론 음성마저 인간과 유사함을 넘어 동일하다. 홀로그램만 아니었다면 진짜 인간이라고 착각할 만큼 말이다.
“이 영감님, 건물에 얼마를 쏟아부은 거야?”
모르긴 몰라도, 내가 수송기에 쏟아부은 것 이상의 기프트를 쏟아부었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하기야, 김민수 역시 그에게 상당한 지원금을 받고 개조에 참여했다고 했었지.
게다가 옵션이 AI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 1급 기밀 정보입니다.
“됐다. 하이브, 나를 웨이타오 주석님께 안내해줘.”
- 허가된 방문자임을 확인했습니다. 저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탑승해주시기 바랍니다.
홀로그램이 앞장섰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곧 나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슈우우웅. 빠른 속도로 올라가던 엘리베이터는 이내 10층에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 앞엔 정장을 걸친 나레쉬가 서 있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얼굴의 그는 나를 보자,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자연스러운 한국말.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능숙해진 걸 보면 그사이에 꽤 연습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여기서 일하시는 겁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일···이라고 하기는 뭐하고, 방문객이 있을 때만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여기는 무슨 일로···”
“아, 그렇군요. 주석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왔습니다.”
나는 쟈비스와 같은 무인 수송기를 통해 아직 살아있는 플레이어들을 계속 구출할 생각이었다. 전 세계로 따지면 그 숫자는 못 해도 수천, 수만 명에 이를 것이다.
앞으로 이 빌딩뿐 인근의 빌딩들을 개조해, 그들을 수용할 생각이었다.
이 빌딩만 해도 수백 명 정도는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내부에 있는 공간 확장된 안전 가옥들까지 생각하면, 모르긴 몰라도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곧 나는 나레쉬를 따라 맞은편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20층으로 올라왔다. 내가 도착했을 때, 웨이타오는 선글라스를 낀 채 골프를 치고 있는 중이었다.
새삼스레 그의 아이디어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안전 가옥 하나를 아예 실내 골프장으로 개조해버렸다. 가볍게 골프채를 휘둘러 홀에 공을 집어넣은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강녕하셨습니까, 주석님.”
웨이타오는 슬그머니 선글라스를 내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어눌한 한국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네 덕분에 항상 강녕하지.”
강녕이라는 단어는 어디서 배워왔을까?
“핵미사일 위치는 잘 받았습니다. 조만간 회수할 예정입니다.”
그는 정민혁을 통해 중국 핵미사일의 위치를 모조리 불었다. 그중 상당수가 지하 창고에 보관돼있다고 했으니 아직까지도 멀쩡할 확률이 높았다.
나는 그것들을 모조리 회수할 생각이었다.
“그래,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하게. 그나저나 오늘은 무슨 일인가? 물론 자네가 못 올 곳을 왔다는 게 아니라, 갑자기 찾아오니 이 늙은이가 괜스레 당황스러워서 말이야.”
구렁이가 담 넘어가는 듯한 화법으로 말한 그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말입니다. 이번에 플레이어들을 다수 구출해서 말입니다. 란페이 그룹에서 수용하기로 하긴 했지만, 저희 쪽도 일부를 수용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곳에 수용하고 싶다는 건가?”
“예.”
“자네 공간처럼 마음대로 쓰도록 하게. 어차피 이 쉘터는 자네의 것 아닌가.”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리더가 아닌 일개 구성원에 불과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 같은데 말이야.”
“어쨌거나··· 주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마음대로 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20층은 건들지 말게. 대신 다른 사람들이 이주하는 데 드는 비용은 모두 다 내가 부담하도록 하겠네.”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필요하다면 증축해도 되는 노릇이니까요.”
그나저나 이주 비용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문득 궁금해져 그에게 물었다.
“주석님께서는 몇 기프트나 가지고 계십니까?”
“그건··· 자네라 하더라도 말할 수 없···”
그의 대답을 들은 나는 피식 웃었다.
진리의 눈, 게비샤를 사용해 이미 그의 생각을 읽었기 때문이다. 변이체를 직접 사냥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들었는데, 그러기엔 다람쥐가 도토리 모으듯 참 많이도 모아 놨다.
한편으로는 조금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저 정도 기프트를 가지고 있으니, 분명 어떤 형태로든 우리 그룹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내려왔다.
타기 전, 웨이타오의 한숨을 들은 건 착각은 아니겠지.
건물 밖으로 나오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나레쉬에게 물었다.
“나레쉬 씨는 전반적인 생활에 불만은 없으십니까?”
“예, 덕분에··· 다만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일이요?”
“그룹의 진짜 구성원이 되고 싶습니다. 이방인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렵지 않게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다른 구성원들처럼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이 환영이다. 어차피 지금, 이 쉘터에 할 일은 넘쳤으니 말이다.
“민혁이에게 말해두겠습니다. 그리고 가족분들도 일할 생각이 있다면 민혁이에게 말씀하세요.”
“예! 그러겠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고, 나는 빌딩 밖으로 나갔다. 하수도 공사를 하면서 쉘터 내에 있는 물을 모두 빼는 데 성공했다. 이제 더 이상 지상은 물에 잠기지 않았다.
물론 앞으로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바로 그때였다.
[채굴 난이도가 올라갔습니다.]
[변이체의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긴장 어린 얼굴로 혹시 모를 다음 메시지를 기다렸지만, 다행히 그게 끝이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냥 좀 쉽게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