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스킬을 제거한 상태에서도 미티어 스웜을 구사하는 데 성공한- 비록 불완전하긴 했지만- 나는 쉘터로 돌아왔다. 쉘터 내는 시끌벅적하다. 일본인들이 구출됐다 하더니 아마 그 때문인 듯 보였다.
새 입주민들과의 인사는 조금 뒤로 미루기로 한 나는, 제일 먼저 ‘갈락시아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원래 1층 건물에 있었던 도서관은 폭우로 인해 전 피트니스 센터 건물 5층으로 옮겼다.
도서관 안은 꽤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중에서 아는 얼굴 몇을 발견한 나는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인사를 마치고는 7층으로 올라왔다. 7층 역시 5층과 마찬가지로 도서관이었다.
다만 서적들 중에서도, 주로 어려운 전문 서적들만 가득했다. 그리고 나는 그 한가운데에서 만나려 했던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마법사 로브를 걸치고 있는, 올백 머리 젊은 사내.
그의 옆에는 또래 여자가 턱을 괸 채, 행복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각각 연병수와 최미라였다. 나는 슬그머니 인기척을 냈다. 나를 알아본 그들이 당황한 얼굴로 인사를 한다.
“형이 이곳까진 어쩐 일로···”
“안녕하세요, 오빠.”
“병수, 너한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다.”
“저는 나갈까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최미라의 말에 손사래를 쳤다. 굳이 다른 이들에게 숨길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아냐, 미라 너도 있어도 괜찮아.”
“그러면 형, 뭘 물어보시려고···?”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잠재력에 대해,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듣고 싶어서 말이다.”
내가 겪은 일에 대해 연병수라면 무언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를 찾은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실실 웃고 있던 그는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내게 물어왔다.
“잠재력 말씀이십니까? 어떤 잠재력을 말씀하시는지···”
“인간의 잠재력에 관한 내용이라면 뭐든지 다.”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그는 이내 입을 열었다.
“잠재력이라··· 제가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분야는 마법에 대한 잠재력이고, 형도 아마 그것을 물어보러 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은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래, 맞다.”
그의 추측에 확신을 더해준다. 연병수는 엷게 웃으면서 앞에 놓인 커피잔을 들었다.
“마법에 대한 잠재력은 그릇에 빗댈 수 있습니다. 흔히 마법사라고 불리는 이들의 잠재력을 이 커피잔에 빗댄다면··· 마도사나, 대마도사라 불리는 존재들의 잠재력은 저 항아리에 빗댈 수 있겠죠.”
장식 항아리는 거대했다. 커피잔의 부피의 수십여 배, 수백여 배에 달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면 나는 어느 정도 되는 거냐?”
“어, 형은···”
연병수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린다. 대답을 듣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한, 소주잔 정도는 되겠지.”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몇 시간 전‘까지’의 이야기다. 잠재력이 다섯 단계나 오른 지금, 내 잠재력은 커피잔일까? 아니면 저 항아리일까?
“아닙니다, 형 정도면 맥주잔은··· 아니, 아닙니다. 하지만 잠재력이 높다고 해서, 그릇이 크다고 해서 무조건 대단한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쉴드 치려고 나름 노력하던 연병수는 포기했는지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릇 안의 내용물과, 그 커피잔에 얼마나 채울 수 있냐 역시 중요합니다. 그릇 안의 내용물은 마력이요, 커피잔에 채울 수 있는 능력은 지력이 되겠죠. Intelligence.”
“지력이라···”
“형은 비록 그릇은 조금 작을지언정, 엄청난 마력을 보유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릇의 크기에 상관없이 마법을 구사할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 역시 말입니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있으니, 문득 플레이어 시스템이 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능이 없는 자도 그 어떤 마법이든 구사할 수 있게 해주는 만능기가 아닌가.
물론 과거, 내가 영령 빙의를 사용하고 탈진(脫盡)했었던 것처럼 마력이 뒷받침해줘야겠지만 마력 역시 시스템을 통해 올릴 수 있으니 결과적으론 그게 그거인 셈이다.
어쨌거나, 나는 내실 하나는 완벽하다 할 수 있었다.
내 마력 능력치는 무려 187. 마도사? 대마도사인 옐레나와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는 능력치. 게다가 앞으로도 꾸준히 발전할 것이다. 지력 또한 125로 결코 낮다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진리의 눈, 게비샤에 시간이 2배로 흘러가는 시간 가속 스킬까지.
내실은 완벽했지만, 그릇이 워낙 작아서 그릇을 채우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은 모조리 흘러넘쳤겠지. 그러나 잠재력이 다섯 단계나 상승한 지금, 내 그릇은 더 이상 작지 않다.
연병수는 생각에 빠진 내 표정을 곡해(曲解)했는지 위로하듯 입을 열었다.
“그릇이 작다고 실망하실 필요 없어요. 형 정도면 굳이 마법을 배우지 않아도···”
“실망 같은 거 안 해. 고맙다.”
재능이 없던 시절에도 실망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나와 재능이란 건 거리가 먼 이야기였으니까. 하물며 지금은 그 재능마저 생겼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품에서 영약을 꺼내 그에게 가볍게 던졌다.
VVIP 상점에서 구매한 영약이다. 비록 플레이어가 아닌 연병수는 스킬을 습득할 순 없지만 영약으로 어느 정도의 마력 증진은 가능하다. 지난번에도 한 차례 효능을 본 적이 있었다.
“형, 고마워요.”
“미라는···”
고민하던 나는 옷 하나를 구매해 그녀에게 건넸다. 당연하게도 평범한 옷이 아니다.
<여신, 아라의 천옷>
종류 : 방어구(Armor)
등급 : 전설(Legendary)
내구 : 100/100
옵션 : 오토 쉴드 Lv.10, 모든 능력치 +3.0
전설 등급 상의치고는 두 개밖에 안 되는 옵션. 특이한 점은 ‘오토 쉴드’라는 옵션이 달려있다. 입기만 하면 안전 가옥처럼 상시 보호막에 보호받는 것이다.
플레이어가 아닌 그녀라 하더라도, 보호막은 발동되리라.
“입고 있으면 혹여나 위험한 일이 생겨도, 보호해줄 거다.”
물론 가장 좋은 건,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사람 일이란 건 또 모르는 거니까.
“감사합니다, 오빠.”
최미라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 연병수는 감동 어린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둘 다, 이따 보자.”
마지막으로 유리 항아리를 힐끔 쳐다본 나는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
“무인 수송기 ‘쟈비스’는 입력한 명령대로 반경 수백 킬로미터를 정찰하며 총 36명의 생존자를 구출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중 일본인은 28명이며, 중국인은 8명으로···”
공식석상인지라 극존칭을 사용하는 김민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네요. 이런 쟈비스를 양산한다면 직접 발로 뛰지 않아도 생존자들을 구출할 수 있겠어요.”
“예산만 충분하다면 가능합니다. 물론 현재의 AI로는 쟈비스와 같은 무인 수송기 네 기를 운용하는 게 고작이겠지만··· 앞으로 발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예산은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쟈비스를 만드는데 꽤 많은 기프트가 들어가긴 했다. 하지만 지금 내 수중엔 2억 개가 넘는 기프트가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그 이상의 기프트를 모을 수 있었다.
이런 쟈비스 정도는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무기를 장착하는 건 불가능합니까?”
“아니, 가능합니다. 다만 상급 이상의 변이체에게 효과적으로 타격할 만한 무기를 장착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기프트가 추가로 필요할 겁니다.”
“예산은 걱정 마시고, 연구해보세요.”
“예!”
“다음은···”
김하나가 손을 들고 있다.
“저희 요리조는··· 비록 신화 등급 요리 레시피를 만들진 못했지만 전설 등급 요리 레시피를 ‘추가로’ 여럿 만드는 데 성공했어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룹원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재룟값 지원을 받고 싶어요.”
“알았습니다.”
“정예만 추려도 꽤 많이 들어갈 텐데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그때 말했던 것처럼 수천 명에게 보급되는 것인 만큼 꽤 많은 기프트가 요구되는 일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내 대답은 역시 그때와 같았다.
기프트 계약을 통하면 이쪽에게도 손해는 아니니까. 김하나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에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여자- 이제원을 바라본다.
그녀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저도 영화 촬영을 모두 마쳤어요. 상영할 차례예요.”
“그··· 영화 말입니까?”
“배우가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뭐, 어쩌겠어요. 본인이 직접 찍을 수도 없고.”
나는 눈을 감았다. 내가 찍지 않았지만, 내 얼굴이 나온다는 영화. 정녕 상영을 허락해야 한단 말인가.
“영화를 모두 감상한다면 능력치를 1.5나 늘려준다네요. 게다가 뿐만 아니라 관람인이 5,000명을 넘어간다면 배우들에게도 추가 보너스 능력치를 준다고···”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내 얼굴이 팔리는, 사소한 희생 정도야···
“···알겠습니다. 민혁아. 기존에 영화관으로 사용되던 건물 개조하고, 영화 상영해라. 능력치 올려준다고 그룹원들 무조건 관람하게 하고.”
기다렸다는 듯 정민혁이 입을 열었다.
“예, 형!”
“저희도 새로운 작물을 기를 예정입니다.”
농사꾼 모자를 뒤집어쓴, 살짝 얼굴이 그을린 젊은 남자가 말한다. 이름은 김희승. 농사꾼들을 대표하는 리더 격의 인물이었다. 노인이든, 젊은이든 그를 잘 따른다고 했다.
“어떤 작물 말입니까?”
“VVIP 상점에서 이 세계에선 찾아볼 수 없는 여러 작물 씨앗을 구할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가령 능력치를 올려주는 작물이라든가··· 마치 터렛처럼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식물이라든가··· 리더께서 구입해주시면, 저희가 시도를 해보겠습니다.”
터렛처럼 적을 공격하는 식물? 문득 생각해보니까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시도해서 나쁠 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능력치를 올리는 작물 같은 경우는 필수적이고.
“어떤 작물 기르실지 생각하고, 카탈로그 짜서 보내주세요. 이제, 다 됐나요? 예, 말씀하세요, 서문주 씨.”
“백신 개발을 거의 완료했습니다. 자원한 북한군 실험체들과 리더께서 직접 가져다주신 변이체 표본들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먼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백신 보급이 완료되면 실험체들은 어떻게 할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그가 북한군들과의 약속을 지켰음을 하고 바란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어차피 어길 생각도 없었다. 북한군 실험체가 총 50명 정도.
그중 절반만 시간 회귀의 물약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250만 기프트가 소모되는 셈. 최악의 경우에는 모두에게 사용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내뱉은 말은 지킨다.’
물론 그들과 기프트 계약을 새로 맺어야 되긴 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계획대로 그들과의 약속을 이행할 예정입니다.”
서문주의 표정이 절로 밝아졌다. 곧 그는 자리에 앉았고, 나는 다른 이들을 향해 물었다.
“더 없으십니까?”
잠잠하다.
“이걸로 간부 정기 회의는 끝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