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영령 소환의 지속 시간이 끝나고, 옐레나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쇠사슬에 칭칭 묶인 여자와 나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쇠사슬을 풀어줬다. 그녀는 속박이 풀리자마자 손가락을 뻗었다.
아마, 내 눈을 찌를 생각인 듯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은 허무하게 앱솔루트 배리어에 가로막혔다. 그녀는 몸을 뒤로 날린 후, 나를 보며 소리치듯 주문을 외웠다.
“Apareça, espírito de fogo!”
소환 주문이었던 듯 여자의 등 뒤로 거대한 불사조가 모습을 드러낸다. 불의 최상급 정령, 피닉스. 직접 소환하고, 전투하는 모습을 본 적 있기에 나는 그 위력을 잘 알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거대한 늑대 모양의 정령도 모습을 드러냈다. 몸집은 피닉스보다 작지만, 느껴지는 존재감은 동등하거나, 오히려 그 이상이었다.
진리의 눈, 게비샤를 사용해 녀석의 정체를 확인한다.
<시큐엘>
- 플레이어, 라우라의 소환수
물의 최상급 정령, 시큐엘이었다.
최상급 정령을 무려 둘이나 부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별로 지친 기색도 없는 걸 보면 옐레나가 말한 대로 ‘편법’과 ‘재능’이 합쳐진 결과물이 바로 이런 건가 싶었다.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쳤고 피닉스와 시큐엘이 내게 달려든다. 그러나··· 당연히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여자에게 속으로 한마디 중얼거렸다. 멈추라고. 그걸로 끝이었다.
그녀의 몸이 경직된다. 정령들 역시 마찬가지다. 방금 그녀와 맺은 기프트 계약. 계약금 이상의 기프트를 지불하지 않는 이상 그녀는 내 말에 절대 복종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걸어놓은 계약금은 무려 천만 기프트. 그녀에게 천만 기프트가 있을 리 없다. 그녀가 말한 대로 200만 기프트라면 모를까. 즉, 그녀는 이제 내 노예다.
“정령들을 역소환시켜.”
“······”
정령들이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췄다. 그녀는 허무한 표정으로 땅에 주저앉았다.
“선택해라. 방금 전처럼 쇠사슬에 묶일지, 아니면 얌전히 나를 따라서 이동할지 말이야.”
그녀는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어조를 통해, 내 말을 짐작했는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따라와라.”
곧 나는 이동하기 시작했다. 여자- 라우라는 그런 내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
라우라는 ‘카르텔 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브라질에서 가장 큰 카르텔의 리더였고, 그런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는 가업(家業)을 이었다. 마약을 제조해서 팔고, 때로는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딱히 죄책감은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봐온 풍경이었으니까.
그렇게 수중에 모인 천문학적인 돈을, 그녀는 아버지나 다른 카르텔의 수장들과 달리 창고에 그냥 처박아두지 않았다.
각국의 투자처를 찾아, 투자를 했다. 코인 투자는 그 일환이었다. 물론 그녀가 매수한 코인은 수백 개에 달했기에 그녀는 ‘기프트’ 코인이라는 코인에 투자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덕에, 그녀는 플레이어로 각성할 수 있었다.
그것도 무려··· 천만 기프트나 지닌 채 말이다. 함께 플레이어로 각성한 아버지, 조직원들과 함께 그녀는 브라질의 플레이어들을 규합했다. 말이 규합이지, 사실상 노예화나 다름없었다.
그들을 통해 변이체를 사냥하고, 기프트를 착취했다. 그러나 라우라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꼈고 다른 나라로 눈길을 돌린다. 천만 기프트나 가진 그녀를 아무도 막지 못했다.
심지어 운까지 좋았다.
무작위 유일 등급 카드를 개봉했다, 신화 등급 스킬 카드인 ‘정령왕, 이프리트 소환’을 손에 넣었으니까. 이프리트의 힘까지 더해지자 남미를 평정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물론 아주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라우라가 마지막에 상대한, 한국인이 리더였던 강력한 플레이어 그룹의 경우에는 그녀조차 장기전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승리했고, 그들을 모조리 포로로 붙잡았다
남미를 평정한 그녀는 미국으로 눈길을 돌렸다. 미국에 있는 플레이어들을 다음 먹잇감으로 삼기로 했다. 순탄했다. 그들은 재래식 미사일을 쏟아부었지만, 이프리트를 막지 못했다.
워싱턴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항복한 미국인들을 포로로 붙잡았다. 미국 전체를 집어삼켜, 미국인들을 노예로 삼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달성까지는 머지않아 보였다.
미국은 거대한 만큼 잃을 것이 많다.
그러나 저들의 눈으로 보기엔 그녀는, 그녀가 이끄는 카르텔은 잃을 것이 없다. 잃을 것이 많은 자는 잃을 것이 없어 보이는 자를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모든 계획은 전부 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마법사 모자를 뒤집어쓴 ‘한’ 여자에 의해서. 그녀의 앞에 나타난 젊은 여자는 자신을 납치했다.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할 만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눈을 감았다 뜨니···
그녀는 미국이 아닌 중국에 떨어져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기도 전에 그녀는 쇠사슬에 묶이고 말았다. 자신을 ‘배달부’라고 주장하는 동양인에 의해서.
그녀는 배달부에 대해 알고 있다. 물론 그의 국적이 중국인지, 한국인지와 같은 신상 정보에는 관심 없었지만 너튜브로 그의 전투 영상을 본 적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투 영상을 본 이후에도 그녀는 배달부가, 그녀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피닉스를 소환했다. 그녀는 정령왕, 이프리트를 소환할 수 있다.
다행히 변수였던 여자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감췄다.
‘이 쇠사슬에서 풀려나기만 하면···’
그를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배달부의 방심을 유도했다. 미인계를 사용했다. 그녀는 그쪽 방면에 자신이 있었다.
미인계를 사용해 적대 카르텔의 수장의 머리에 탄환을 박은 적도 있을 정도로 말이다.
결국 쇠사슬에서 풀려나는 데 성공한 라우라는 배달부를 기습했다. 급소를 찔러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결국 기습은 실패했지만 목적이었던 대로 시간을 버는 데 성공했다.
그녀의 장기인 정령들을 소환할 시간을 말이다. 불의 최상급 정령과 물의 최상급 정령. 이제는 복수의 시간이다. 지금껏 그녀가 해왔던 대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털어버릴 시간.
그래,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 멈춰라.
그녀의 머릿속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그녀는 무언가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그녀는 힘 빠진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체, 내 몸에 무슨 짓을···’
그녀는 배달부의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그녀의 수난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
나타난 화염 거인이 닥치는 대로 변이체를 쓸어버린다. 변이체들은 거인의 몸에 달라붙었지만 얼마 못 가 그대로 잿더미로 화하고 말았다.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엄청난 위력이다.
아마 옐레나를 소환하지 않고, 정면으로 상대하려 했다면 나도 함부로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뿐만이 아니다. 이프리트가 손을 저을 때마다 불의 정령이 소환된다.
그 개체 수는 한둘이 아니다. 처음에는 한둘이 아니었는데 가면 갈수록 ‘배’로 늘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가진 정령왕, 이프리트 소환 스킬이 탐나는 것을 느꼈다.
‘신화 등급 스킬 도박을···’
아니, 도박을 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녀의 스킬을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아니, 애초에 신화 등급 스킬을 얻을 수 있다는 보장 자체가 없지. 이후에도 신화 등급 스킬 도박을 여러 번 했지만 한 번도 얻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극악의 확률임이 틀림없다.
게다가 지금 내가 습득하고 있는 스킬 중에서 버릴 만한 스킬도 없었다.
사용해보지 않아서 어떤 스킬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마력을 많이 먹는 스킬임이 틀림없는데 기본 스킬이라 할 수 있는 미티어 스웜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시스템에게 물었다.
‘기프트 계약을 통해 다른 플레이어의 스킬도 빌릴 수 있나?’
[제한적이긴 하지만, 가능합니다.]
‘얼마가 필요하지?’
[플레이어, 라우라의 정령왕, 이프리트 소환 스킬을 1회 빌리는데 필요한 계약금은 천만 기프트입니다.]
“······?”
천만 기프트. 아무리 기프트 수급량이 많이 늘어났다고는 해도 ‘고작’ 스킬 한번 빌리는 데 드는 비용이 천만 기프트란다. 신화 등급 스킬이긴 해도 비정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0% 할인도 못 받을 테고···’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천만 기프트는 지나친 사치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늘어날 대로 늘어난 정령 군단은 변이체들을 해치웠다.
지속 시간이 끝난 듯 정령왕, 이프리트가 모습을 감췄고, 뒤이어 정령 군단도 모습을 감췄다.
“다 내놔.”
나를 향해 혐오감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던 그녀는 기어코 한마디 내뱉었다.
“Esta loca.”
아마 욕설일 것이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그녀는 충실히 명령을 이행하고 있었다. 곧, 떠오르는 메시지.
[플레이어, 라우라가 당신에게 456,435기프트를 양도했습니다.]
‘적네.’
꽤 많은 변이체들을 처치했음에도 그녀가 가진 기프트는 고작 45만 기프트. 내가 처치했으면 그 세 배 이상은 벌어들였을 것이다. 채굴량이 나보다 훨씬 떨어지는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겠지만 말이다.
‘앞으로 내가 직접 사냥하는 편이 더 낫겠어.’
그녀에게는 보조를 맡기는 편이 나을 거 같다.
“라우라, 앞으로 너는 내 뒤에서 보조해라.”
그녀는 불만 어린 얼굴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진다. 근래 봐온 풍경이긴 하지만, 그 덕에 물에 잠기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건물에 들어가서 늦은 점심 겸 저녁 식사를 했다.
<베이컨 김치볶음밥(U)>
단순한 베이컨 김치볶음밥이 아니다. 김하나가 직접 만든 유일 등급의 김치볶음밥. 물론 그 맛은 갓 만든 것보다야 떨어지겠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맛있다.
나는 라우라에게 김치볶음밥 용기를 건넸다. 그녀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이내 포크로 작게 떠서 입에 넣었다. 그녀는 맛에 감탄하기라도 한 듯 눈을 크게 뜬다.
그러다 이내 부끄러워진 듯 고개를 숙여버렸다. 부끄러움이라··· 무려 카르텔 수장의 딸인 그녀에게는 걸맞지 않은 감정이라 느꼈다. 진리의 눈, 게비샤를 사용해 그녀를 바라봤다.
- 호감을 쌓아, 방심을 유도할 거야. 기회는 언젠가 온다. 반드시 저놈의 목에 칼을 꽂을 날이··· 그런데 이거··· 정말 맛있네?
부끄러워하는 것조차 다 연기였다. 아마 그녀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면 나조차 속아 넘어갔겠지. 물론 속아 넘어간다 한들 별로 달라질 건 없을 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