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미국에서의 일은 옐레나에게 맡겨두기로 하고 블링크를 사용해 단숨에 국경을 넘어, 중국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나를 반기는 건 무려 수만 마리에 달하는 상급 변이체들이었다.
지금의 상급 변이체는 한 마리, 한 마리가 과거의 최상급 변이체에 필적하거나, 그 이상의 힘을 가졌다. 그런 녀석들을 상대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 과거의 나라면 말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기프트 계약을 습득하기 이전의 나 말이다. 기프트 계약을 습득한 후 내 능력치는 개별 능력치마다 편차가 있긴 하지만, 전부 다 120을 뛰어넘었다.
특히 집중적으로 올렸던 마력의 경우엔 190을 돌파했다. 이전의 나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다. 달려드는 변이체를 향해 가볍게 주먹을 휘두른다. 단순히 마력만 실은 주먹질.
그러나 그 주먹질의 위력은 결코 가볍지 않다. 변이체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나가는 것도 모자라서, 풍압에 의해 뒤이어 오던 변이체들의 몸이 그대로 뼈 채로 으스러졌다.
솟구치는 피분수를 뚫고, 변이체들의 시체들을 짓밟으며 사족 보행하던 최상급 변이체가 멈춘다. 그 상태에서 녀석이 입을 벌리자, 개구리처럼 길쭉한 혀가 이쪽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질 뿐이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가볍게 피해낸 뒤 녀석의 혀를 오히려 손으로 붙잡았다. 사르르. 산성액이 묻어있는지 부식되기 시작한다. 내 손이 아닌, 내 몸을 둘러싼 앱솔루트 배리어가.
고작 그 정도로 앱솔루트 배리어가 파괴될 리 만무하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나는 개의치 않고 손에 그대로 힘을 줬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내 쪽으로 끌려온 최상급 변이체를 향해, 주먹을 꽂아버렸다. 펑! 수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그대로 날아가 버린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영령 소환으로 그냥 영령도 아니고 상급의 영령인 옐레나를 소환하며 많은 마력을 소모한 탓에 내 마력은 그야말로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제로가 되지는 않았다.
내가 잘 조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라면 얼마든 싸울 수 있다.’
이전처럼 단순히 마력만 퍼부어가면서 무식하게 싸우는 게 아니다. 근력, 민첩, 체력 베이스가 더해지자 마력을 낭비하지 않고 전투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거기에 쉘터에 머무는 기간 동안 정독했던 체술서도 한몫했고. 플레이어가 아님에도 마법을 익힌 연병훈의 사례를 떠올려 한번 시도 삼아 해본 것인데 효율이 괜찮았다.
‘그나저나···’
마치 겁에 질린 양, 변이체들이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중급 변이체 시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 지능이 올라가, 자신들이 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일까?
문득 루나(Runa)가 떠올랐다.
‘어떻게 됐으려나.’
나와 무려 세 번이나 전투를 벌인 변이체. 초월체가 돼서 내 목숨을 노리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어쩌면 다른 초월체의 먹이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살아있으면 알게 되겠지.’
생각을 마친 나는 하늘로 도약했다. 마치 썰물이 빠져나가듯 변이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고 있다. 그냥 보낼 생각은 없었다. 변이체들을 향해 미티어 스웜을 사용했다.
지상에 떨어지는 수십 개의 운석들. 운석에 정면으로 충돌한 변이체들의 몸이 말 그대로 박살 나버렸다. 그러나 적잖은 변이체들이 빠져나갔다. 과연 상급 변이체다운 모습이다.
퇴로가 차단당하자, 몇몇 변이체들이 달려들었고 나는 여유 있게 주먹으로 그들의 머리를 박살 냈다. 시간으로 따지면 20분 정도. 들어온 기프트의 양은 100만 기프트.
‘시급으로 따지면 300만 정도인가?’
물론 전력을 다해 싸우지 않았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몸 상태만 정상이었다면 닥치는 대로 미티어 스웜을 난사했을 것이고, 지금보다 더 많이 기프트를 벌어들였을 것이다.
하물며 영령 소환이나, 영령 빙의를 사용했다면 말할 필요도 없고. 변이체들을 즈려밟던 나는 내 몸에 무언가가 들어온 것을 느꼈다. 곧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게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바이러스라는 것을 말이다. 앱솔루트 배리어를 사용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는 내 몸에 침투했다. 나는 만약을 대비해 품에서 약병을 꺼냈다.
‘시간 회귀의 물약’이다.
그 어떤 바이러스라 한들 시간 회귀의 물약이 있다면 완치가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변이체를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는데, 고작 바이러스 하나 없애지 못할 리 만무하다.
물론 나는 시간 회귀의 물약을 바로 마시지 않았다. 바이러스를 시험해볼 생각이었다. 마력을 살짝 끌어올린다. 시간 회귀의 물약까지 준비해놓은 것이 무색하게, 그걸로 끝이었다.
[순도 높은 마력으로 체내의 불순물을 완벽하게 제거했습니다.]
[30분간 마력 회복 속도가 10% 상승합니다.]
뭐, 시간 회귀의 물약을 쓰는 것보단 안 쓰는 편이 더 낫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바이러스는 내게는 별 효과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는 다를 것이다.
‘돌아갈 때 샘플 정도만 챙기면 되겠어.’
시간 회귀의 물약을 다시 아공간 창고에 집어넣은 나는 걷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허공을 비집고 하늘에서 옐레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옐레나는 젊은 서양 여자를 손에 들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녀가 여자를 지상에 내팽개쳤다. 나는 몸을 날려, 떨어지기 직전 그녀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곧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그녀가 내게 묻는다.
“Quem é Você?”
아마 내 정체를 물어보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대답 대신··· 여자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내 주먹이 그녀를 때리는 일은 없었다.
화염에 휩싸인 정령이 내 주먹을 막아냈기 때문이다.
<불의 상급 정령, 이그니스>
- 플레이어, 라우라의 소환수
그러나 내 주먹을 받아낸 불의 상급 정령, 이그니스는 결코 멀쩡하지 못했다. 방패는 산산조각 나 버리고 신체에는 구멍이 뚫려버렸다. 여자가 겁에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Não!”
나는 발로 이그니스를 걷어찬 후, 쇠사슬로 그녀를 묶었다. 그리고 그녀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타나토스의 쇠사슬. 묶인 대상의 능력치를 99% 경감시키는 효과를 가졌다.
묶인 그녀는 아등바등했지만 ‘당연하게도’ 쇠사슬을 풀어내지는 못했다. 나는 그녀를 바닥에 놓고는 옐레나를 쳐다봤다. 옐레나는 왜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 여자가 그 거인-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를 소환한 자입니까?”
“그래. 보기 드문 정령사다.”
“보기 드문 정령사라는 건?”
“정령사로서의 자질이 내가 봤던 이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대단하다는 말이다.”
“혹시 스킬 때문이라면···”
“너처럼, 편법만 사용한 게 아니다. 편법에 그 재능마저 더해졌지.”
“편법만 사용해서 죄송합니다.”
‘요컨대, 정령사 버전 연병훈인가···’
아니, 엄밀히 말하면 거기에 플레이어로 각성한,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겠지만 말이다. 나는 여자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쇠사슬에 묶인 이상, 더 이상 위험한 존재라 말하긴 힘들다.
솔직히 말하면, 가능만 하다면 포섭하고 싶었다. 영상 속에서 그녀가 보여준 무력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으니까. 그 미국마저도 어쩌지 못했던 1인 무력.
‘기프트 계약을 사용해서, 묶어버려?’
“O que você está fazendo? Solte esta corrente agora!”
“지금 뭐 하냐고, 당장 쇠사슬을 풀어달라고 말하는구나.”
옐레나가 포르투갈어를 알고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그녀의 말을 알아듣는 것은 바로 그녀가 사용한 번역 마법 때문이다. 무척이나 탐나는 능력이다.
“···번역 마법, 그거 저한테 시전 안 됩니까?”
“15분 남았다. 소환 시간이 끝나면, 번역 마법 역시 자동으로 풀릴 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짓이야? 너는 누구고, 여긴 대체 어디지? 그가 느껴지지 않아.”
“그?”
“이프리트 말이야.”
“미안하지만 여긴 중국이다.”
“중국인?”
“한국인이다. 나를 모르는 건가?”
“미안하지만 동양인 얼굴 외우는 취미는··· 배달부?”
그녀도 내 영상을 본 모양이었다. 하기야, 너튜브 등과 같은 주요 미디어 사이트에서 내 영상은 인기 동영상에 올라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제 좀 말이 통하겠군. 나는 미국의 부탁을 받고, 너를 납치했다.”
“어째서 내게 그런 짓을?”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듯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미안하지만 나는 미국과 동맹 관계거든.”
“당장 나를 놔줘. 미국이 얼마를 약속했는지 모르지만, 이 자리에서 나를 놔주면 100만 기프트를 주지.”
“100만 기프트? 좀 더 써 보지 그래. 네 목숨값이 그거보다 안 되나?”
“미쳤어? 100만 기프트면··· 그래, 200만.”
“200만 기프트가 있긴 하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프리트 소환은 신화 등급 스킬이라고 했다. 신화 등급 스킬을 보유했다면, 채굴량 역시 낮지 않을 테니 이런 세상에서 200만 기프트를 벌어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작 200만 기프트를 받고 그녀와의 ‘관계’를 끝낼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녀를 그냥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그러면 일단 나한테 줘봐. 확인되면 풀어주지.”
“너 같으면 주겠나? 풀어줘. 그러면 바로 주지.”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잘 모르는 모양이다.
“변이체에게 던져버리기 전에, 얌전히 내놔. 너는 모르겠지만··· 중국 변이체들은 보통 변이체들이 아니거든. 바이러스를 가진 변이체들이다.”
“흥, 바이러스? 그런 거짓말을 믿을 거 같나? 내가 무슨 바보도 아니고···”
그녀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녀 정도 되면 바이러스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바이러스를 없애버릴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몸 상태가 정상일 때의 이야기다.
지금 그녀는 타나토스의 쇠사슬에 묶여 모든 능력치가 -99%가 된 상태. 따라서 바이러스에 걸리면 별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이러스가 온몸에 퍼져 죽을 확률이 높다.
“차라리 나를 죽여. 절대로 그렇게는 못 하겠으니까.”
이 상황에서도 그녀의 태도는 대범하기 짝이 없다. 그러면 나도 태도를 조금 바꿔볼까.
“그러면 정말로, 죽여주지.”
나는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붉은색과 초록색 숫자 띠가 그녀의 온몸을 묶었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한번 묶인 띠는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노예 계약 1>
- 계약금 : 10,000,000기프트
- 갑은 을에게 목숨에 대한 안전을 보장한다.
- 을은 갑의 말에 절대로 복종한다.
“천만 기프트가 있나?”
“···없습니다.”
대답해놓고서도 그녀는 놀란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었을 테니까. 노예 계약의 효과가 제대로 발동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