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북한에서의 일을 마무리 짓고 쉘터로 돌아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광주에서 겪었던 산성비가 아닐까 우려했지만, 다행히 맞아도 아무 이상 없는 평범한 비였다.
[앞으로 90일간 우기(雨期)입니다.]
물론 앞으로, 90일간 내린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가랑비처럼 가늘던 비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양 굵은 빗방울을 지상에 퍼붓고 있었다.
지상을 내려다본다. 그룹원들이 빗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력을 방출해 대충 옷의 물기를 말린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내부도 분주하긴 마찬가지였다.
“비가 내리면 여긴 다 잠길 거래요. 일단 1층에 있는 시설 전부 3층, 아니 4층으로 옮겨야 돼요.”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여중생- 진혜연에게 다가갔다.
“아, 오빠.”
“민혁이는 어쩌고 너 혼자 이러고 있어?”
“민혁 오빠는 지금 태윤 오빠하고 함께 바깥으로 나갔어요.”
정민혁이 강태윤과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는 말이었다.
“어디로?”
“얼핏 듣기에는 댐을 건설할 계획이라 하더라고요.”
“댐?”
“네.”
나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혜연도 자세히 모르는 것 같은데, 그녀에게 묻는다 한들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다··· 그리 급한 것도 아니었다.
‘이따 민혁이가 오면 그때 물어보자.’
“내가 도울 일은 없어?”
“오빠가 도울 일이요? 아니, 오빠는 고생하셨으니까···”
“고생은 다 했지.”
망설이는 표정을 짓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오빠는···”
나는 그룹원들과 함께 물자를 운반하기 시작했다. 1층에 쌓여있는 물자를 4층까지 운반하는 일이었다.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가 작동하기에 그리 힘든 작업은 아니었다.
물론 아공간 창고를 가진 나는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필요도 없다.
아공간 창고에 물자를 넣었다가 4층에서 꺼내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본격적으로 내가 합세하자 1층의 물자를 4층으로 모두 옮기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직 2층, 3층에도 물자가 남아있지만, 그것들은 지금 당장 해야 할 정도로 급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진혜연은 일을 마친 나를 어디에 쓸까 고민하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말했다.
“오빠, 이번엔 지하로 내려가셔서 민수 아저씨 좀 도와주세요.”
“그래.”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에 있는 그의 공방은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내 예상처럼 이미 공방 바닥은 물 범벅이었다. 물론 배수로로 물이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워낙 비가 많이 내려서 그런지 그리 효과적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함께 일하는 장인들과 함께 땀을 뻘뻘 흘려가며 빗자루로 물을 쓸고 있던 김민수는 인기척을 느낀 듯, 이쪽을 돌아봤다. 이내, 그는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소리치듯 말했다.
“리더!”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민수는 내게 빗자루를 건넸다. 그러나 나는 빗자루를 잡는 대신, 가볍게 마력을 방출했다. 흐르던 빗물들이 역류하기 시작한다. 빗물들을 치워버린 후,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그러자 빗물들은 더 이상 공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물론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시간이 흐른다면 빗물은 바리케이드를 넘어 안으로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김민수는 빗자루를 던져버리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 덕분에 한숨 돌렸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예정보다 일찍 공방을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찜해놓으신 건물은 있습니까?”
“쉘터 안에는 없고, 그 저기··· 하남에 대형 공장으로 쓸 수 있는 건물이 제법 있다고 합니다. 거길 개조해서 쓰고 싶은데···”
한마디로 하남으로 공방을 옮기고 싶다는 말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반도의 변이체들은 대부분 소탕을 마쳤다. 게다가 우리 쉘터와 하남과의 거리가 먼 것도 아니니, 그가 하남으로 옮긴다 한들 큰 위험은 없을 것이다.
갑자기 토네이도라도 들이닥치지 않는 이상에는···
“일단 계약 하나 합시다.”
“예? 계약이요?”
의아해하는 그의 몸을 곧 붉은색과 초록색의 숫자들이 감싼다. 미란과 마찬가지로 당황한 표정을 짓는 그. 곧 허공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계약 이름을 설정해주시기 바랍니다.]
“계약 이름은 공방 계약, 이러면 되려나?”
[계약 내용을 설정해주시기 바랍니다.]
“내용은···”
<공방 계약>
- 계약금 : 1,000,000기프트
- 갑은 을에게 계약금을 제공한다.
- 을은 갑에게 갑이 만족할 만한 공방과, 능력치의 일부(5%)를 지불한다.
계약금을 무려 100만 기프트로 설정했더니, 능력치 비율이 무려 5%로 설정됐다.
[근력 능력치가 2.5 상승합니다.]
[마력 능력치가 0.1 상승합니다.]
[체력 능력치가 2.5 상승합니다.]
···
그러나 능력치 상승량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근력과 체력이 2.5씩 오르고 나머지 능력치는 0.1이 오른 게 고작이다.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시다가 그에게 물었다.
“김민수 씨, 능력치에 투자 안 하셨습니까?”
“아, 예, 별로 쓸 만한 일이 없어서···”
“일단 받은 기프트로 마력 능력치 좀 올리세요.”
“공방을 지으라고 주신 지원금을, 제 능력치를 올리는 데 쓸 수는···”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능력치에 투자하시는 게 저를 위해 쓰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가 능력치를 투자하면, 결과적으로는 내 능력치에 투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김민수는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마력 능력치와 민첩 능력치 역시 마찬가지로 2.5 올라간 걸 확인한 나는 그제야 미소 지었다.
“혹시 도움 필요하신 일 있으시면 또 말씀하세요. 종종 들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리더.”
스마트폰이 울린다. 진혜연이다. 타이밍이 절묘하다. 어디서 지켜보기라도 하는 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창문에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또 뭐하면 될까?”
- 오빠, 이번에는 바리케이드에서 승주 언니가 도와달래요.
그의 공방을 나와, 건물 밖으로 나온다. 푹 발이 잠길 정도로 빗물이 차올랐다. 날개를 펼친 채 도약했다. 빗물을 헤치며 날아오른 내가 도착한 곳은 바리케이드였다.
한승주. 내게 센트리건의 사용법을 알려줬던 플레이어.
북한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녀를 만난 나는 그녀와 기프트 계약을 맺었다. 그 이유는 내가 더 이상 ‘레일리의 센트리건’ 스킬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쉘터의 방비를 포기할 수도 없어, 그녀를 지원해서 쉘터의 방비를 대신 하게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바리케이드에는 이미 센트리건이 줄지어 설치돼있었다.
우비를 뒤집어쓴 채 센트리건을 매만지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왔어요?”
“뭘 도와드리면 됩니까?”
“그 진서 씨는··· VVIP 상점 개방돼있죠?”
“예.”
“그러면 제가 부탁드리는 것 좀 구매해주세요. 시스템한테 제가 원하는 걸 물어봤더니 VVIP 상점에서만 구매가 가능하다 해서요.”
“어떤 거 말입니까?”
“플라즈마 쉴드 생성기. 그냥 센트리건은 변이체가 붙으면 무방비이기 때문에··· 방어 수단이 필요한데, 플라즈마 쉴드 생성기가 그걸 해결해줄 수 있어요.”
‘플라즈마 쉴드 생성기 얼마야?’
[한 기에 10만 기프트입니다.]
과거라면 부담스러운 양의 기프트였겠지만, 이제는 크게 신경 안 써도 되는 푼돈에 불과했다. 그렇게 펑펑 써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 수중엔 700만 기프트가 넘게 남아있었다.
게다가··· 몇 시간 뒤면, 중급 변이체는 전부 상급 변이체로 진화한다. 기프트 수급량은 한층 더 폭증할 것이다.
“몇 기나 필요합니까?”
내 눈치를 보는 그녀를 향해 재차 말했다.
“눈치 볼 거 없이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어··· 일단은 다섯 기지만···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 위급 시에는 쉘터 전체에 플라즈마 방어막을 두를 수도 있다고 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 기를 설치하겠습니다. 그밖에 필요한 건 없습니까?”
“일단은 없어요. 그런데 괜찮겠어요? 열 기면 백만 기프트인데···”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반응에, 나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조만간 다시 한번 중국에 다녀올 예정입니다.”
아직 중국에는 변이체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 변이체들이 한국으로 향하기 전, 미리 처치할 생각이었다. 물론 상급 변이체로 변하는 만큼 쉽진 않겠지만,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앞으로 기프트가 부족할 일은 ‘거의’ 없을 거라는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기프트를 막 쓸 수 있는 이유였다. 이내, VVIP 상점을 열어 플라즈마 쉴드 생성기를 구매했다.
상점 할인을 받아 하나에 9만 기프트씩, 총 열 개, 90만 기프트를 소모했다.
<플라즈마 쉴드 생성기>
종류 : 건축물
등급 : 전설(Legendary)
내구 : 4,500/4,500
플라즈마 저장량 : 10,000/10,000
설명 : 반경 500m의 플레이어와 소환수에게 Lv.15의 플라즈마 쉴드 생성. 생성된 플라즈마 쉴드는 소유주가 멈추거나 저장된 플라즈마를 모두 소모할 경우 사라진다.
대략 3m~4m 정도 되는 유리 피라미드처럼 생긴 디자인, 그 안은 플라즈마로 추정되는 초록색 전기로 넘실거린다. 손을 가져다 대자 초록색 전기가 내 몸을 둘러쌌다.
[Lv.15 플라즈마 쉴드]
‘플라즈마를 지속적으로 충전해야 한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레파토리에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플라즈마를 충전하는 데는 기프트가 필요하고?’
[자동 충전 기능을 구매하시면 기프트를 소모하지 않고도 플라즈마가 자동으로 충전됩니다.]
‘···호구 잡혀준다.’
결국 나는 5만 기프트를 추가로 소모해 자동 충전 기능과, 자동 수리 기능까지 추가했다. 한승주는 시험 삼아서 플라즈마 쉴드 생성기를 연계해 보호막을 쉘터 전체에 둘렀다.
은은히 빛나는 녹색의 보호막은 빗물도 막아냈다. 앞으로 변이체들의 침입을 받게 된다면 방어할 때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우리 쉘터는 보험을 하나 얻었다.
***
란페이 그룹은 경기도, 하남에 쉘터를 짓기로 했다.
원래는 인천이나, 부산을 근거지로 삼을 예정이었지만··· ‘최대한 이진서와 가까운 곳에 터전을 잡아야 한다’라는 회장, 지하오란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서다.
물론 다른 그룹원들 역시 마찬가지의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전부 이진서의 활약을 두 눈으로 지켜봤다. 그들은 이진서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고 싶어 했다.
아니, 이진서와 가까운 곳에 터전을 잡아야 한다는 의견을 넘어서, 아예 그룹 합병 의견도 대두될 정도였다. 어쨌거나 란페이 그룹의 쉘터는 이진서의 쉘터와 30분 거리에 지어졌다.
말이 30분이지, 이진서가 마음만 먹으면 수십 초 이내에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이진서와 기프트 계약을 통해 받은 지원금은 적지 않았고, 그들은 건물을 개조했다.
비가 퍼붓긴 했지만 워낙 사람이 많아 작업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작업이 진행되던 중 그들은 한 무리의 플레이어들의 방문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