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발신인 : 윤민수]
선명하게 적혀져 있는 발신인 이름 ‘윤민수’. 잊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윤민수는 내게 코인을 추천했던 후배 놈의 이름이었으니까. 그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형, 미안하게 됐어.’
‘아, 씨발, 왜 나를 탓해! 내가 형 잘되라고 그랬지, 못 되라고 그랬겠냐고.’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할게, 투자는 결국 본인 선택 아니야?’
4년이 흐른 지금, 생각만 해도 피가 솟구치는 일이었다. 물론 후배 놈의 말대로 투자가 본인의 선택이라곤 하지만··· 결국 내게 있어 결정적인 투자의 원인은 바로 놈이었으므로.
물론 세상이 이렇게 변해버린 걸 생각하면 놈에게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메일을 열었다.
어떤 말을 지껄일지, 한번 확인이라도 해보기 위해서다.
[Como vão as coisas, irmão?]
[잘 지냈어? 형?]
‘포르투갈어인가.’
그러고 보니, 윤민수가 퇴사 이후 브라질 쪽에서 운명의 여자를 만나 사업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 같다.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건 그러한 이유에서일까?
[우리 둘 다 할 말이 많지? 길게 말 안 할게. 브라질로 와.]
호승심 넘치는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에라이, 미친놈아.”
지가 오라고 하면, 내가 가야 되나?
그것도 고작 말 한마디 하려고 브라질까지? 물론 아우리엘의 날개와 블링크의 힘을 생각하면 브라질까지 가는데 몇 시간이면 충분하겠지만, 후배 놈을 위해서는 단 1초도 쓰기 아까웠다.
나는 망설임 없이 메일을 삭제해버린 후, 답신을 보냈다. 정성스런 한마디를.
[ㅗ]
그리고 차단 박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복수는 안 할게.’
한때 정을 생각해서, 그리고 이렇게 돼버린 상황을 생각해서, 굳이 찾아가 복수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다시 엮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지긋지긋한 과거의 연이었으니까.
나는 스마트폰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내려놓고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쯧, 괜스레 생각만 복잡해졌다. 차라리 메일을 읽지 말걸, 그 시간에 눈이라도 조금 붙일 걸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안전 가옥 내에서 충분한 휴식을 마친 나는 바깥으로 나왔다. 이미 해가 떨어진, 밤 시간. 날개를 펼치며 도약한다. 시원한 밤공기를 한껏 만끽하며, 지도 기능을 사용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는··· 상하이인가?’
상하이. 공식적인 인구수 2,400만 명 이상의,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대 도시.
말로는 많이 들었지만, TV 다큐 영상으로도 몇 번 봤지만, 직접 가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가슴이 두근거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상하이 역시 죽음의 도시로 변해버렸을 테니까. 2,400만의 인구 역시 태반이 변이체들로 변했을 것이다.
***
[ㅗ]
답장이 도착했다. 4년이라는 세월을 생각하면 제법 긍정적인 답장이었다. 윤민수는 뭐라고 답장할까 고민하다가, 천천히 자판을 치기 시작했다. 효과적으로 한 글자, 한 글자 함축해서.
[인생 실패자! 형이 그러니까 누나하고 헤어진 거야. 눈앞에 온, 나를 잡을 기회조차 놓치게 생겼잖아? 브라질, 상파울루로 와. 이게 형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그가 생각하기에도, 다소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다시 말하면 그만큼 효과적일 것이다. 맹수를, 이곳까지 불러들이기에 말이다.
그는 잠자코 답장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아니, 그가 보낸 메일을 읽지도 않았다.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형, 나 차단함?]
[정말 차단함?]
하지만 답장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때, 방문을 열고 금발 머리 라틴계 여자가 들어온다.
“뭐래?”
“아. 이게 안 먹히네. 분명 나에 관련된 일이면 죽어라 달려올 줄 알았는데.”
“그러면 이제 어쩔 거야? 카르텔 녀석들이 항복 안 하면 싸그리 씨를 말려버리겠다는데.”
“기다려봐. 이 형이 읽다가 갑자기 곯아떨어졌을 수도 있잖아?”
“퍽이나 그러겠다.”
쯧쯧, 혀를 찬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바깥으로 나간다. 홀로 남겨진 윤민수는 어두운 얼굴로 다시 자판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형 사과할게. 사실 구라였고 제발 나 좀 도와줘.]
[지금은 남보다도 못한 사이지만, 그래도 한때는 동생이었는데 카르텔한테 목 잘리게 둘 거야?]
[ㅅㅂ 좀 도와줘라!]
물론 닿을 리 없는 외침이었다. 그는 이미 차단당한 지 오래였으니까.
***
상하이에서 일어난 두 세력 간의 다툼은 결국 두 세력 모두의 파멸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물론 그렇다고 생존자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생존자들은 복잡한 도시 곳곳에 몸을 숨겨 목숨을 건졌다.
물론 살아남았다고는 하나, 그들에게 희망은 없었다. 도시는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변이체들로 가득했고, 그들을 구하러 올 사람도 없었으니까. 그들 역시 절망감으로 가득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는 말이다.
도시 중심에 거대한 운석이 떨어지는 것을 신호탄으로, 도시 곳곳에 거대한 운석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생존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현 상황을 이해하기보다는 지켜보는 것밖에 없었다.
초록색 화염 속에서 그들의 목숨을 옥죄던 변이체들은 한 줌 잿더미가 돼서 흩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운석의 비가 끝나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로서 처음 접하는 생소한 얼굴의 남자. 그가 입을 열었다. 놀랍게도 그는 중국인이 아닌 외국인이었다.
‘한국인인가?’
생존자들의 리더 역할을 맡고 있던 제갈연은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자신들에게 호의적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가 구명줄이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으니 말이다.
다행히 그는 번역기를 사용했기에, 그녀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자신은 한국에서 온 플레이어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돕겠다.’
안 그래도 부탁하고 싶었던 일이었으므로, 그들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그를 따라 상하이 외곽으로 이동했다. 아직 살아남은 변이체들이 달려들었지만···
떨어진 소형 운석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그들은 깨달았다. 아까 운석은 남자의 소행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괴물, 그는 한때 그들의 리더였던 쟝위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플레이어였다.
설령 자신들을 박살 낸 그 ‘괴물’이라 하더라도 어렵지 않게 처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침내 그들은 상하이를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 제갈연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무리의 일부가 남자를 따라가고 싶다고 나선 것이다. 처음에는 몇 명이 고작이었지만, 이제 와서는 백 명도 넘게 불어난 상태였다.
“은인께 이게 무슨 민폐야?”
“아니, 나는 진심이다. 나는, 우리는 은인께 충성을 맹세할 거다.”
남자도 그들의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한 듯, 난감한 기색이었다.
“이런 분이라면 목숨을 다 바쳐도 좋아. 쟝위 따위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대단하신 그분이라면 국적이 무슨 상관이겠어?”
“아니, 나라고 해서 안 따라가고 싶겠냐고. 그분이 받아주실 리가 없잖아.”
뭐? 목숨을 다 바쳐? 참 빛 좋은 개살구다. 저런 대단한 힘을 가진 남자에게 자신들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그저 목숨을 의탁하기 위한, 기생충들로 비치진 않을까.
그녀는 염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리고 그들의 의사는, 번역기를 통해 남자에게 전달됐다. 남자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어쩌면···?’
제갈연 역시, 이제는 기대를 품고 말았다. 하지만 남자는 결국 고개를 젓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지금 나는 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중국 정부와 그렇게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나와 함께 한다면 여러분의 안위가 위험해질 겁니다.”
누가 듣기에도 완곡한 거절이었지만, 사람들 역시 필사적이었다.
“괜찮습니다. 부패한 정부 따위는 예전에 잊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제발 저희에게 구원을···!”
“거 참···”
난감한 표정을 짓던 남자는 문득 하늘을 바라봤다. 사람들은 그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떨어지고 있었다. 바로 ‘미사일’이라 불리는 것.
비현실적인 광경에 사람들이 멈춰 섰다.
남자의 손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거대한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그들을 촘촘하게 둘러쌌다. 미사일은 강렬한 폭발을 일으켰지만, 바리케이드를 뚫지는 못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남자의 표정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이런 상황은 전에 ‘충분히’ 겪어봤다는 것처럼.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저를 따라오면 위험해질 겁니다.”
탈탈 손을 턴 남자는 그들을 향해 짤막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날개를 펼치고, 미사일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가볍게 도약했다. 사람들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저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제갈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까지 무사히 살아계셔야 할 텐데···’
***
군 장성은 웨이타오의 명령을 하달받았다.
물론 정작 웨이타오는 진심이 아닌, 군 장성들의 눈을 의식해 명령을 내린 것이었지만··· 하달받는 군 장성의 입장에서는 제일의 권좌에 오른 ‘주석’의 명령이었다.
“배달부 생포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생포 명령이긴 하지만, 필요시에는 사살해도 좋답니다.”
“그래? 현재 위치는?”
“배달부의 현재 위치는··· 상하이로 추정된답니다. 아니, 그 확률은 거의 99%랍니다.”
“미사일 날려. 필요하면 도시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좋으니까.”
이진서를 향해 미사일이 날아오게 된 배경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진서는 미사일 따위에 타격을 입지 않았다. 애초에 ‘핵미사일’을 날리지 않는 이상 그의 보호막을 뚫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오히려 보복하겠답시고 날아온 이진서에게 미사일 발사대만 죄다 파괴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군 장성들은 서로 소통을 나눴고,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렸다.
재래식 미사일로 배달부- 이진서를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런데 주석은 우리에게 배달부를 생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지. 설마 우리를 숙청하시려고?”
“논리 비약을 삼가시오.”
“제 부모도 숙청한 인간인데, 막말로 우리는 파리 목숨 아닌가? 그냥 차라리 항복해버리는 건···”
“항복? 항복하면 웨이타오 주석이 우리를 가만히 둘 것 같나?”
“그러면 정말 핵무기라도 날리자는 말···인가?”
그들도 허투루 별을 단 건 아니다. 자국 내에 핵무기를 투하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재앙을 초래할 것인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주석의 명령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론 주석은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지만, 어느 곳에나 타의를 자의로 해석하는 이들은 존재하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