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높이만 15m가 넘는 거대한 해일 앞에서 방파제는 별 의미가 없었다. 채 일 분도 버티지 못하고 허물어졌고, 부산시 전체는 바닷물에 잠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고층 빌딩으로 도망친 플레이어들은 생존했지만, 미처 그러지 못했던 몇몇 플레이어들은 그대로 수장되고 말았다. 게다가 위협은 해일뿐만이 아니었다.
변이체들은 활달하게 움직이며 플레이어들을 습격했다. 상황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부산에서 제일 큰 플레이어 그룹, ‘에이스’라고 한들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에이스의 리더인 이제원은 세계가 이렇게 변해버리기 전에 유명한 연예인이었다. 그녀는 그 명성과 그녀가 가진 대량의 기프트를 활용해 그룹을 창설하고 확장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룹원의 숫자는 무려 1,000명을 넘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며칠 전의 이야기요, 이제는 그 절반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어, 어떻게 할까요?”
그녀는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는 듯한, 신경질적인 얼굴로 말했다.
“뭘 어쩌긴 어째요? 나보고 뭐 어떻게 하라고?”
원래부터도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인 이제원은, 이 전례 없는 위기에 한층 더 예민해져 있었다.
“아니. 그건···”
그에게 말을 꺼낸 에이스의 간부, 유한솔은 말을 얼버무렸다. 그녀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 지금까지의 위기를 그녀 혼자 극복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하지만···
그런 그녀라 하더라도 지금 몰려온 해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원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방법 없으면 말을 꺼내지 말든가. 됐고 일단 헬기부터 타요. 여기 계속 있다가 수장되고 싶어요?”
“아, 아닙니다.”
얼른 고개를 끄덕인 유한솔은, 그녀의 말처럼 정말 수장될까 싶어 허겁지겁 착륙장으로 향했다.
착륙장에는 헬기가 여러 대 도착해 있었다. 탈출용으로 급하게 개조한 헬기들이었다. 프로펠러로 인한 바람을 맞으며, 그녀는 기다리던 그룹원들과 함께 헬기에 탑승했다.
곧 헬기가 떠오른다.
그녀는 지상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한때 그들의 쉘터가 있던 곳은 수장돼버렸다. 쉘터 건설에 쏟은 기프트만 해도 수십만 기프트인데. 한순간에 죄다 가라앉고 말았다.
그녀가 거주하던 6급 안전 가옥이 수장돼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 피눈물 나는 심정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단념하고 몸을 뉘었다.
‘목숨을 건졌다는데 만족하자.’
그때 함께 탑승한 그룹원들 중 한 명이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 저게 뭐야?”
그 순간,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정면에서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빠르게 날아오는 것을.
“변이체야? 아무리 봐도 새 같지는 않은데?”
“모, 모르겠습니다!”
조종사 역시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러다가 부딪치는 거 아니야? 뭐, 뭐라도 좀 해봐!”
이 헬기는 수리했을 뿐, 기프트를 사용해 개조한 헬기는 아니다. 즉, 지금 날아오는 무언가가 변이체던, 새던, 부딪치면 무사하지 못할 확률이 농후한 것이었다.
“······”
당황한 조종사의 심경을 대변하듯, 헬기가 거칠게 흔들린다. 하지만 애당초,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그것을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200m, 100m···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유한솔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사, 사람?”
놀랍게도 정면에서 날아오는 것은 사람이었다. 사람··· 그것도 얼굴이 낯이 익은. 그녀는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진서 플레이어?”
충돌하기 직전, 그의 몸이 흐릿해졌다.
“추, 추락합니다!”
조종사가 소리치며 조종대를 놨다. 헬기가 중심을 잃은 채 공중에서 뺑글거리며 돌기 시작했다.
“꺄아!”
유한솔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추락하고 자신들은 죽으리라. 머릿속에 부정적인 이미지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 순간··· 기체의 흔들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무슨···?”
“아, 미안해요.”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그녀는 눈을 뜬다. 방금 전 봤던 남자, 이진서였다.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멋쩍은 얼굴로 그는 짤막하게 플레이어들을 향해 사과했다.
“의도한 건 아닌데, 죄송하게 됐습니다.”
유한솔은 방금 떨어질 뻔한 것도 잊은 채, 흥분된 어조로 물었다.
“이진서 플레이어가 여기는 무슨 일로···? 설마 우리를 구해주러 오신 거예요?”
“구해주러 왔다라··· 뭐, 비슷하긴 한데. 쓰나미를 없애러 왔습니다.”
그녀는 말을 하려다 말고, 지상을 바라본다. 거대한 해일이 또다시 몰려들고 있었다. 이미 폐허가 된 도시를 완전히 휩쓸어버리려는 듯했다. 저런 걸 없애겠다고?
그녀의, 그들의 리더인 이제원조차 어쩌지 못하는 일인데?
“그게 가능할 리가···”
그녀의 혼잣말을 들은 이진서는 그저 씽긋 웃을 뿐이었다.
‘정말 무슨 방도라도 있는 건가?’
“자, 안전 운전하세요.”
“예!”
씩씩하게 외친 조종사는 다시 운전을 시작한다. 그들이 탑승한 헬기는 원래 향하던 곳으로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한솔은 계속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능할 리가···’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그라 하더라도 저 거대한 해일을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겠지. 하지만 그의 지원이 쓸모없는 건 아니다.
지금과 같이 위급할 때, 강력한 플레이어인 그가 도와준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탈출 작업이 더욱더 빨라질 테니 말이다. 그때였다. 녹색의 불사조가 하늘에 모습을 드러냈다.
꽤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한눈에 볼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거대한 사이즈였다. 그녀는 물론, 헬기 안에 탑승해있던 에이스 그룹원들 역시 입을 벌린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저건···”
달려드는 상급 변이체들을 검으로 베어내던 이제원 역시 불사조를 봤다.
불사조는 낮게 비행하더니 다시 몰려오는 해일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불사조의 몸에 닿은 물은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렸다. 곧 해일과 불사조가 부딪친다. 해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불사조는 한층 더 몸집을 키운 채 날아올랐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얼빠진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그녀의 옆에 날개를 활짝 펼친 이진서가 착지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얼굴을 본 그녀의 얼굴이 환해진다.
“···구하러 온 거예요?”
이진서가 입을 열었다,
“조건이 있습니다.”
“결혼하자고요? 알았어요.”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니, 그런 조건 말고. 제 조건은 합병···”
“합병해요, 하면 될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리더 자리도 지긋지긋했는데. 하지만 완벽한 합병을 위해서는 역시 우리 둘이 결혼하는 쪽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이진서는 아직 출발하지 않은 헬기를 손으로 가리켰다.
“일단 안전한 곳에 피해 계십쇼.”
그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진 걸 본 이제원은 군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홀로 남게 된 이진서는 대멸겁의 지팡이를 들었다. 그러자 불사조의 몸집이 한층 더 커지기 시작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가보자고.”
고작, 시작일 뿐이었다.
***
성운의 가호를 사용해, 영령 빙의의 재사용 대기시간을 초기화했다. 그리고 어떤 영령에 빙의하고 있을까 고민하고 있을 찰나였다. 누군가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왔다.
- 나를 부르게.
“하지만 불은 물에 약하지 않습니까?”
- 분명 자네 말대로, 불은 물에 약하네. 하지만··· 자네가 들고 있는 지팡이는 마법을 ‘혼돈’ 속성으로 만들지. 혼돈 속성은 모든 속성과 상성이 없네.
그의 말인즉, 피닉스를 소환해 해일을 막아내자는 말이었다. 나는 자신감 있게 말하는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영령 빙의를 사용해, 피닉스를 소환했다.
막대한 마력을 통해 소환된, 불의 최상급 정령, 피닉스는 이전과는 그 몸집부터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혼돈 속성이기에 전신이 초록색 불꽃으로 타오르기에, 더 강인한 느낌을 주었다.
‘자, 이제부터 제대로 가볼까.’
이제원의 헬리콥터가 출발하는 것을 본 나는 아공간 창고에서 선을 꺼냈다. 길게 늘어진 철사. 얼핏 보기엔 평범한 철사 같이 생겼지만 평범한 철사가 아니다.
<마력 흡수 철사(U)>
하나당 50기프트를 호가하는(나는 45기프트에 구매했지만) 유일 등급의 아이템. 그 효능은 단순하다. 마력을 흡수하는 것. 바닥을 향해 철사‘들’을 힘껏 던졌다.
수십 개, 수백 개의 철사를. 그대로 지상으로 내려간 철사들은 바닥에 부딪혔다.
내가 하려는 짓은 간단했다. 저 바닷물은 평범한 바닷물과 달리 마력이 담겨 있다.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은, 바닷물에 담겨 있는 마력을 전부 흡수하는 것.
그렇게 한다면, 자연스럽게 해일 역시 소멸할 거란 생각이었다. 그때, 기계 정령, 에코가 입을 열었다. 정민혁의 목소리가 아닌 연병수의 목소리였다.
애초에 이 계획을 낸 것은 내게 좋은 생각이 있다고 말한 이가 연병수였다.
- 저, 형··· 그런데 이거 위험할 수도 있어요. 만약 마력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
“못하면?”
- 책에는 ‘불안정해서 폭발한다’라고 쓰여 있어요.
“중간에 끊으면 되잖아?”
- 한번 연결한 링크를 끊어버리는 건 더 위험한 일이라고···
이제 마력을 흡수하려는 나로서는 섬뜩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폭발이라··· 그렇게 안 되도록 노력해봐야지.”
- 네, 형··· 건투를 빌게요.
마력을 개방한다. 그와 동시에, 철사들이 바닷물의 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쭉쭉. 철사를 타고 내게 전해지는 마력. 그 양은 그야말로 방대하기 그지없다.
순식간에 내 마력량 역시 맥스(Max)까지 차오른다.
이제 내가 할 일은 하나뿐이다. 연병수의 말대로 내 몸이 터지지 않게, 마력을 소모하는 것. 나는 피닉스를 바라본다. 피닉스 역시 나를 바라봤다. 방금 해일을 집어삼킨 녀석의 몸집이.
커진다. 그냥 커지는 것도 아니고, 방금 전의 두 배, 세 배로···
[막대한 마력으로 인해 피닉스(U)의 등급이 일시적으로 피닉스(L)으로 상향 조정됩니다.]
[피닉스가 보유한 모든 스킬이 한 등급 상향 조정됐습니다.]
하늘의 태양을 덮을 정도로 거대해진 녀석에게 손짓한다. 녀석이 빠른 속도로 비행하더니 해일에 그대로 몸을 부딪친다. 그러자 해일은 그대로 소멸해버렸다.
하지만 마력은 줄어들기는커녕 더욱더 늘어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곤란해질지도···’
[피닉스(L)가 레인 오브 파이어(U)를 사용합니다.]
불의 비가 쏟아진다. 바닷물들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피닉스를 향해 날아온 것은. 나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무언가’는 피닉스와 거칠게 부딪친다. 그리고 지면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변이체?’
하지만, 방금 추락한 변이체는 평범한 변이체가 아니었다.
[데미안(Demian)]
- 다수의 플레이어와 동족을 살해하고, 진화의 정점에 도달한 초월체.
- 특수 변이체일 때보다 모든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플레이어를 살해하거나 동족을 살해해 체내에 기프트를 축적할 수 있고, 축적한 기프트로 신체와 특수 능력을 더 강화할 수 있다.
- 최대 500,000마리의 변이체를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
- 보유 기프트 : 100,000
‘초월체?’
처음 보는 변이체의 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