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 ······
내 대답이 의외였던 건지, 잠시 침묵을 지키던 고경표는 다시 입을 열었다.
- 전라도에 있는 변이체들의 사냥권을 드리겠습니다.
“사냥권?”
짤막하게 중얼거린 나는 내가 뭐 잘못 들은 건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냥권? 단어만 놓고 보면 무슨 조업권을 말하는 것 같은 뉘앙스다. 설마 그런 뜻으로 말한 걸까?
- 말 그대로 전라도 내에 있는 변이체들을 한 달간 마음대로 사냥하실 수 있는 권리입니다.
설마가 사람 잡았다. 마치 전라도를 자신의 영역인 것처럼 말하는, 전라도 내의 변이체들을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말하는 그의 뻔뻔한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어져, 재차 물었다.
“그게 댁 겁니까?”
- ···저희 그룹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소리십니까?
“영역을 인정하고 나발이고···”
- 전라도에 남은 변이체들의 숫자는 100만도 넘을 겁니다. 그 100만을 기프트로 환산하시면···
“그 변이체들 앞으로 며칠만 있으면 상급으로 변하는 거 아시죠?”
첫 ‘자연 진화’ 공지 이후 30일이 흘렀다.
최하급 변이체가 하급 변이체로 변하기까지 3일, 하급 변이체가 중급 변이체로 변하기까지 9일. 중급 변이체가 상급 변이체로 변하기까지 앞으로 9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게다가 이미 상급 변이체로 진화한 변이체들의 숫자 역시 적지 않았다. 애초에 사냥할 만한 능력이 있었다면 이들이 사냥했을 것이다. 그러지 못했다는 것은···
이들의 능력 부족을 의미한다.
- 예, 알죠?
“막아낼 수는 있고?”
- 예, 막아낼 수 있지요.
“막아낼 수 있으시다면 그냥 가겠습니다. 상급 변이체의 습격도 막아낼 수 있는데, 고작 산성비 하나 못 막아낼까.”
그러자 그의 어조가 다급해진다.
- 그러지 말고 좀 도와주십쇼! 비와 변이체는 다르지 않습니까.
“나는··· 그때 못 들었던 대답을 마저 듣고 싶은데요.”
- 정녕 이렇게까지 하셔야 되겠습니까?
“뻔히 죽을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을, 그냥 두고 보지는 못하겠다는 게 내 생각이라서요.”
- 그냥 제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시는 건 아니고요?
“그것도 어느 정도는 이유가 되겠네요.”
- ······
잠시 침묵이 이어진다.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우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강력한 번개가 이쪽에서 약 수십 미터 떨어진 지면을 강타했다. 아무래도, 산성비가 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대로라면 예상보다 더 빨리···’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번개도 치네. 고경표 씨, 빨리 결정하세요. 시간이 없습니다. 나, 바쁜 사람이에요.”
부산, 제주에 들를 예정이다.
물론 그가 설령 거절한다 하더라도, 저들을 그냥 두고 갈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를 몰아내고 그의 그룹원들에게 판단을 맡기려 할 뿐이다. 우리 그룹에 합류할지, 합류하지 않을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 그룹원들의 의사를 확인했습니다. 무조건 합류하겠습니다. 대신 제 자리 보전은···
“그건 염려하지 마십쇼.”
고경표라는 인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는 분명 능력 있는 인물이었다. 애초에 지금까지 그룹을 무사히 운영해왔을 정도면, 그 경험치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 그러면 이제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빌어먹을 비 좀 없애주십시오.
“확인했습니다.”
우르릉.
다음 순간, 번개가 나를 향해 떨어진다. 하지만 번개는 앱솔루트 배리어를 뚫지 못하고 흡수돼버리고 말았다. 번개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네 번···
마치 신이 분노하듯 번개를 계속 토해냈다.
[칭호 ‘번개를 맞은 자’을 획득했습니다.]
<번개를 맞은 자>
조건 : Lv.15 이상의 낙뢰를 일곱 번 맞기
보상 : 마력 흡수 0.5%
의도하지 않았지만, ‘번개를 맞은 자’라는 새로운 칭호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보상은 마력 흡수 0.5%. 눈을 빛냈다. 마력 흡수. 말 그대로 받은 피해를 흡수해 마력으로 전환하는 능력치. 보호막 능력을 가진 나로서는 효율이 좋은 능력치라 할 수 있었다.
“5급 바리케이드 구매해서 건물 전체에 덮어줘.”
[확인했습니다.]
먼저, 플레이어들의 안전부터 확보했다. 산성비에 지금 플레이어들이 있는 건물 전체가 녹아내리고 있다. 바리케이드로 땜빵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뚫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신경 쓸 건, 산성비 하나뿐만이 아니니까. 기프트가 줄어들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건물 전체가 실시간으로 5급 바리케이드로 덮이는 걸 보며, 나는 갈락시아의 도서관을 열었다.
저 비를 멈출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도서관 안에는 분명 내가 원하는 정보가 담긴 서적이 있을 것이었다. 산성비를 맞으면서도 멀쩡한 도서관. 진리의 눈, 게비샤를 사용한다.
그러자 도서관 안의 서적들이 분류되기 시작한다. 도서관 내부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곧 내가 원하는 서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적을 꺼내 펼친다.
<무녀 시안의 멈추지 않는 비를 멈추는 노래>
종류 : 책(Book)
이해도 : 0%
‘기우제 같은 건가.’
아니, 기우제는 비를 부르는 노래고, 지금은 비를 멈춰야 하니 반대라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안력을 키우니, 이해도에 대한 보상 목록이 출력됐다.
[이해도 50% 달성 시, 무녀의 노래(R) 습득.]
[이해도 100% 달성 시, 기청제(祈晴祭)(U) 습득.]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했던 스킬 카드 도박에서 기청제라는 이름의 스킬이 나왔던 것 같기도 하다. 내 생각이 맞았다. 나는 분명 기청제라는 스킬 카드를 보유하고 있었다.
‘나는 습득할 수 없다.’
애초에 습득하지 않고 보류했던 것부터 습득할 수 없기 때문에 보류해뒀던 것이다. 나는 이미 스킬 슬롯 여덟 개를 다 알차게 채운 상태니 말이다.
물론 아직 희귀 등급 스킬인 ‘만다라바의 옷장’이 있긴 하지만 비를 멈추게 하는 유일 등급 스킬보다는 장비 프리셋을 마음대로 교체할 수 있는 만다라바의 옷장이 훨씬 나았다.
‘지금 와서 그룹원들을 내려오라고 말하기에는··· 늦었지.’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간부들이지만, 그들의 스킬도 꽉꽉 채워져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고경표 씨.”
- 예, 예?
“스킬 슬롯 다 채웠습니까?”
- 예, 저는 다 희귀 스킬로 채워놓은 상태입니다.
“하나 삭제하세요.”
- 어째서···? 제가 어떻게 모은 기프트인데 그걸 삭제하라뇨.
“더 묻지 말고 삭제하세요.”
- 예···
‘그리고···’
희귀 등급 스킬인 무녀의 노래는 그냥 구매해버리면 될 노릇이었다. 나는 앉아있던 전봇대에서 가볍게 도약했다. 바리케이드 위에 착지한 나는 검을 휘둘렀다.
마치 벌레처럼 생긴 상급 변이체 한 마리가 들러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단숨에 상급 변이체를 베어버린다. 하지만 명색이 상급 변이체라고 녀석은 단번에 죽지 않았다.
‘확실히 근력에 대한 투자가 모자라긴 했지.’
기본 능력치 70만 올리고, 나머지는 대충 올린 감이 없잖아 있었으니까. 사실 지금은 근력에 대한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해서, 내버려 뒀다는 표현이 옳았다.
‘이번 일이 끝나면 근력을 올려주는 액세서리라도 구매해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마력을 검에 싣는다. 그리고 가볍게, 나를 향해 기다란 촉수를 뻗어오던 상급 변이체를 단숨에 찔렀다. 퍽! 마치 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녀석의 몸이 그대로 터져버린다.
아니, 단순히 녀석의 몸만 터진 것이 아니라, 녀석의 밑에 있던 바리케이드 역시 반파돼버렸다. 나는 녀석의 잔해를 가볍게 털어내고는, 틈 사이로 가볍게 몸을 던졌다.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내 정체를 확인하자 그들의 얼굴이 환해진다. 고경표가 허겁지겁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고경표씨, 이거 습득하시고.”
나는 사람들을 향해, 방금 구매한 무녀의 노래 스킬 카드를 건넸다.
“다들 이거 습득하세요.”
“이건···”
“기청제를 열어, 비를 멈출 생각입니다.”
“이런 걸로 비가 멈출 리가···”
“같은 배 타기로 했는데 이런 식이면 조금 섭섭한데···”
그것도 그냥 스킬 카드가 아니라, 내 ‘기프트’까지 직접 들여가면서 얻은 것들이다. 내 눈빛을 읽은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 하, 하겠습니다! 뭐해? 다들 습득해!”
고경표를 선두로, 사람들은 군소리 없이 스킬들을 습득하기 시작했다. 곧, 그가 기청제를 사용했다. 어느새 생겨난 수십, 수백 개의 촛불들. 촛불 옆에 있는 푸른색 광원들은···
‘영혼인가.’
영혼이 실제로 존재할까 하는 의문이 잠깐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세상에서 존재한들 이상할 건 없었다.
“다들 일제히 노래를 시작해야 해!”
“예!”
그의 구령에 맞춰서 사람들이 ‘무녀의 노래’를 시작한다. 마치 찬송가를 연상케 만드는, 듣기 좋은 음색들. 촛불들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하고, 푸른색 광원들은 춤을 춘다.
마치 한풀이를 시작하려는 듯한 모습. 흥미로운 얼굴로 지켜보던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비가··· 그치고 있다.’
틀림없다. 비가 점점 그쳐가고 있었다. 기청제의 효과가 확실했다는 소리다.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진다. 그들은 하늘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소리를 통해 비가 얼마나 오는지 들을 수 있을 테니까. 그 사이, 방금 전 내가 만들어놓은 구멍들로 변이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내 검에 모두 다 베이고 말았다.
굳이 스킬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 봐야 중급 변이체, 상급 변이체에 불과했으니까. 마침내 우리는 무사히 기청제를 끝마칠 수 있었다. 하늘의 비도 그쳤다.
“업적···?”
저 산성비를 그치게 만들면, 토네이도를 베었을 때처럼 업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맞았던 모양이다. 얻지 못한 게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기청제를 습득할 수 없는 상태니, 아쉬움은 접어두기로 했다. 다음에 기회가 또 있겠지.
“이제는 비도 그쳤겠다··· 우리의 건설적인 미래를 위한 이야기를 나눠보실까요?”
“···예.”
일순간 고경표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어떻게 보면 체념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누가 보면 내가 악당이라고 생각하겠네. 나는 그의 어깨를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안 잡아먹습니다, 안 잡아먹어요. 앞으로 한배 탄 입장 아닙니까.”
그가 말한 대로, 사실을 미리 전해 들었는지 사람들- 그의 그룹원들은 그리 놀라는 얼굴들은 아니었다.
“그렇지요.”
“앞으로 다들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는··· 서울로 올라가서 마저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제 저희는 어쩔까요?”
“여기서 대기하시면 됩니다. 부산이랑 제주도도 가봐야 해서요.”
그때, 기계 정령, 에코가 입을 열었다.
- 형님, 제주도는 가실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화산 분출이 멈췄다네요. 방금 제주도의 플레이어에게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 의외네. 뭐 방법이라도 있었던 건가?”
- 그 방법이··· 조금 이따 말씀드리겠습니다.
“알았다.”
나는 날개를 펼친 채, 재차 날아올랐다. 다음 목적지는 부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