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검을 쥐고 발도 자세를 취한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극한의 발도술.’
[체력과 마력을 90% 소모해, 다음 발도 공격을 500%만큼 강화합니다.]
주르르. 입술을 타고 피가 흘러내린다.
육체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엄청난 피로를 호소했다. 하기야, 체력과 마력을 10%, 20%도 아니고 일순간 90%나 소모했으니 당연한 여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쓰러질 순 없지.’
쓰러지는 순간, 토네이도를 소멸시킬 마지막 기회마저 놓치는 것이다.
나는 억지로 정신을 다잡아, 마지막 남은 마력을 끌어모아 진리의 눈, 게비샤를 사용했다.
[진리의 눈, 게비샤가 상대방의 약점을 포착합니다.]
그 사이 고층 빌딩들을 허물고, 잔해를 집어삼킨 토네이도는 더욱더 몸집을 불렸다. 그야말로 ‘무질서한 폭군’이라는 표현이 떠오르는 순간. 그러나 나는 그 속에서 선을 볼 수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선.
‘망설이지 않는다.’
하지만 더는 망설일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선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푸른색을 넘어 이제는 백색으로 빛나던 검에서 뻗어나간 검기는 그대로 토네이도를 향해 날아갔다.
팟!
강렬한 빛과 함께 내 몸이 뒤로 날아갔다. 낙법을 이용해 바닥에 착지한 나는 토네이도를 바라봤다. 정확히 말하면 한때, 토네이도가 있었던 곳을.
토네이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안에서 빙빙 돌던 잔해들만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질 뿐이었다. 물론 잔해들이 워낙 많은 탓에 융단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지면이 움푹 팼지만.
직후, 메시지가 떠올랐다.
[칭호 ‘폭풍을 벤 자’을 획득했습니다.]
<폭풍을 벤 자>
조건 : Lv.25 이상의 폭풍을 검으로 베기
보상 : 바람 계열 공격에 대한 저항(25%) 상승, 모든 능력치 +1.0
내게 보상으로 주어진 건 칭호. 바람 계열 공격에 대한 저항을 올려주고, 모든 능력치를 아무 조건 없이 1이나 올려주는, 만독불침 이후에 얻은 두 번째 칭호였다.
잠시 고통도 잊은 채 미소 짓던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공간 창고에서 체력 회복제와, 마력 회복제, 그리고 음식을 꺼냈다. 풀도핑으로 빠르게 회복할 생각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음료수 마시듯 한 병당 1,000기프트짜리 회복제를 쭉쭉 들이켜고 있는데 기계 정령, 에코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코가 입을 열었다. 정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형님, 촬영 완료했습니다.
“그래?”
- 어떻게 할까요? 미국 측에 자료 넘길까요?
잠시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뭐 미국이면 상관없겠지.”
- 대가는 제가 확실하게 받아내겠습니다.
“그건 너한테 맡길게.”
지난 2주간, 미국은 우리 그룹에 접촉 시도를 해왔다. 뭐, 정확히 말하면 서로 접촉 시도를 했다는 표현이 어울리겠지만. 그 결과, 우리는 미국과 제휴를 맺게 됐다.
그 일환은 바로 영상 공유. 그들은 내 전투 영상을 공유받고 싶어 했고, 나는 일정한 대가(기프트)를 받는 조건으로 그들에게 영상을 넘기기로 했다. 물론 내가 넘기고 싶은 영상만.
물론 그 대가라 해봐야 얼마 되지 않는 수준(끽해야 몇천 기프트 정도)이기에, 그룹 운영비로 모두 다 넘기는 것으로 했지만 말이다. 생각하는 사이, 제법 체력과 마력이 차올랐다.
때마침 전화가 걸려왔다. 강태윤으로부터의 전화였다.
“그래, 태윤아.”
- 형님, 서울을 제외하고, 한국의 네 곳에서 자연재해가 추가로 관측됐다고 합니다. 미국, 기상청으로부터 자료를 넘겨받았습니다.
“세 곳? 어딘데?”
- 각각 광주, 부산, 제주입니다.
“메시지 내용을 떠올리면···”
생산성이 떨어지는 플레이어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번 자연재해가 일어났다고 했다. 즉 서울, 대구, 광주, 부산, 제주의 플레이어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번 자연재해가 일어났다는 뜻.
공교롭게도, 내가 불과 며칠 전 방문했던 도시들이기도 했다.
‘칭호를 딸 수 있으려나?’
토네이도를 없애서 칭호를 얻었던 것처럼, 다른 자연재해를 없애도 칭호를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천천히 날개를 펼쳤다. 남은 세 도시에 가서 알아볼 가치는 충분했다.
플레이어들도 덤으로 구출할 겸. 도약한 내 몸이, 빠른 속도로 비행하기 시작했다.
***
서울과 인천의 화력 발전소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플레이어들은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자연스럽게 인터넷 역시 사용이 가능해졌다.
기존에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포털 사이트를 통해 서로 교류를 나눌 수 있었다.
- 부산인데 ㅅㅂ 무슨 영화 해운대처럼 파도 몰려오는 거 보고 기겁했다.
- 아무렴, 화산보다야 낫지. 그래도 거긴 고층 빌딩 올라가 있으면 살잖아?
부산에는 쓰나미가 몰려왔고, 제주도에는 화산이 분출됐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재앙이었다.
- 정말 죽겠다 ㅅㅂ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서울로 올라갔어야 되는데. 갓진서님 보고싶읍니다···
- 서울은 괜찮음?
- ㅇㅇ 여긴 멀쩡함. 갓진서님이 계시잖아.
- ㅅㅂ 존나 부럽네. 등신 같은 우리 리더는 합병 괜히 거절해서 --
- 너희 리더도 거절함? 우리 리더도 거절함. 우리끼리 알아서 먹고 살 테니까, 참견질하지 말라면서 ㅋㅋ 그 새끼 딱밤 마렵네, 진짜.
- ㄹㅇ?
- 근데 여기서 또 전기나 통신망 끊기면 어떻게 되는 거냐? 우리 진짜 아무도 안 도와줌? 다 죽는 거임?
비상시를 대비해 각 지역의 그룹들은 기지국에 바리케이드를 꼼꼼하게 설치해뒀다. 그러나 그 바리케이드가 이런 재앙 앞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못 버틴다’는 것이 대부분 플레이어들의 생각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 설마 다 죽이기야 하겠어? 아까 설명 못 봄? 생산성 떨어지는 놈들 정리하려고 이번 자연재해가 일어난 거라잖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답글을 본 채 생각에 잠겨있던, 남자는 키보드 자판을 입력하기 시작한다.
- 그니까, 이게 다 존버충들 때문이라는 거잖아? 그러면 그 존버충들 다 죽이면 어떻게 되는 거임?
- 아마 자연재해도 사라지겠지? 근데··· 그렇게 말하니까 좀 소름 돋는데. 너 누구냐?
남자- 채호민은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폰을 닫았다. 그는 빠르게 코트를 입은 채 바깥으로 나왔다. 머리를 빡빡 민 한 무리의 남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더, 이곳에서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 곧 용암이 이곳까지 들이닥칠 겁니다.”
그는 이곳 제주도 그룹의 리더였다.
“아니, 피할 필요 없다.”
채호민은 고개를 절레 흔들면서, 미소 지었다.
“내 친구들이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알려줬거든.”
“해결할 방법이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남자들을 향해 엷게 미소 짓던 채호민은 주거동으로 내려갔다. 사람들이 두려운 얼굴로 무기를 들고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인터넷 봤지? 기생충들은 자진해서 앞으로 나온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
“한 번도 변이체 잡아본 적 없이 혜택만 보고 있었던 기생충 새끼들, 앞으로 나오라고.”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본다. 앞으로 나갔다가,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대로라면 다 죽는다, 이 멍청한 놈들아.”
용암은 계속 흐르고 있었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그들의 목숨을 위협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쟤, 쟤가 변이체를 한 번도 잡아본 적 없어요.”
젊은 여자의 말에, 채호민은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손이 움직였다. 그의 손날은 정확히 남자의 목을 꿰뚫었다.
“꺄아악!”
“더 나와.”
주거동에는 변이체를 잡아본 적 없는 사람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그리고 그들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채호민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들은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지명 당한, 혹은 도망가는 사람들을 모두 죽인 그는 창밖을 내다봤다.
“용암이···”
“멈췄어?”
사람들은 슬퍼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모르는 듯한 애매모호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서로 대화를 나누던 ‘동료’들이 죽었다는 점을 슬퍼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저 용암이 멈춘 것을 기뻐해야 할 것인가.
채호민은 그들을 향해 싸늘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더 이상의 기생충들은 용납하지 않는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벌어질 경우, 제일 먼저 죽는 건 너희들이 될 거야. 죽기 싫으면, 변이체와 열심히 싸우도록.”
사람들은, 그의 그룹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그룹에 새로운 ‘규칙’이 출현하는 순간이었다.
***
부산에는 쓰나미, 제주에는 화산, 그리고 광주에는 산성비가 내리고 있다고 했다. 산성비. 내가 아는 산성비와 달리 닿는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무시무시한 비였다.
고층 건물들조차 부식된 채로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지상에 있는 것들은 이미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린 지 오래였다. 물론 내게는 별다른 피해는 주지 못했다.
앱솔루트 배리어는 내게 위협이 되는 모든 것을 튕겨냈으니 말이다. 뭐, 앱솔루트 배리어를 해제한다 하더라도 내게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그나마 멀쩡한 건물 위에 걸터앉은 채, 산성비를 아무렇지 않게 맞으면서 떠돌아다니는 변이체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한다.’
토네이도는 그냥 베어버리면 됐지만···
광주 시내 전체에 내리는 비라니. 도통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지성으로 미티어 스트라이크를 날려볼까 고민했지만, 지상 피해만 더 클 것 같고.
‘영령 빙의를 다시 사용해볼까?’
옐레나에 빙의하면, 그녀는 뛰어난 마도사니까 뭔가 방도가 있지 않을까? 물론 이미 영령 빙의를 사용했지만, 성운의 가호를 사용해 초기화시키면 그만인 노릇이었다.
그때였다. S31에 페어링 신호가 걸려온 것은.
‘블루투스?’
모르는 기기지만, 나는 페어링을 연결했다. 곧 블루투스 전화가 걸려온다.
- 이진서님이십니까?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했더니, 고경표다. 나와는 구면이었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그를 만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 고경표 씨, 삼일 만이네요.”
- 예. 전화번호를 몰라서 부득이하게···
“그때 드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 죄송합니다··· 깜빡하게 저장을 안 시켜놔서···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뭐, 지난 일 가지고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뭐, 겁나 욕을 하긴 했다.
내가 아니라 정민혁이. 정신 나간 것들이 하늘 높은 줄 몰라본다면서 리더들을 겁나 깠었지. 그가 하는 욕을 하도 많이 듣다 보니, 조금 생겼던 악감정도 눈 녹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바로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저희 좀 도와주십쇼!
그리고 나는 입을 열었다. 마치 악동과도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맨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