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그 친구가 리더였답니다. 정말 데려가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그 친구’란 제이드라는 흑인 남자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 나는 이미 그가 그룹의 리더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진리의 눈, 게비샤를 통해 그의 마음을 들여다봤으니까.
“개인의 판단입니다. 저희가 싫다는 플레이어를 굳이 데려간 적은 없잖습니까?”
“하지만 저대로 두면 틀림없이 죽을 게 뻔한데··· 우리 쉘터로 온다면 분명 도움이 될 친구입니다. 저 친구들 말을 들어보면 엘리트 미군 출신이라고···”
확실히 강순철은 전술, 전략에 밝은 군인이 필요하다고 꾸준히 주장해왔다. 그러던 찰나에 발견한 ‘엘리트 미군’이라니, 그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구미가 당길 만도 했다.
그런 그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를 넘겨줬습니다. 그 역시 위성 통신을 사용 중이라 하니 정말로 필요하다면 연락할 겁니다.”
강순철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얼굴에 드러난 아쉬움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제이드가 있을 강릉 시내를 돌아봤다. 인연이 닿는다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리라.
그러던 바로 그때였다. 저 하늘 너머에서, 폭설 사이를 뚫고 비행기 여러 대가 나타난 것은. 슈우우웅. 귀를 찌르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들이 하늘에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잠시,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룹원들도, 나조차도.
‘저건···’
강순철이 중얼거렸다.
“전투기?”
그래, 평범한 비행기가 아니다. 분명 군용으로 사용되는 전투기다. 진리의 눈, 게비샤를 사용하고 나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잘못 본 게 아니다. 틀림없이 조종사가 탑승한 전투기 맞다.
대체 전투기가 갑자기 어떻게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걸까? 나는 바다를 바라본다. 바다에는 자욱한 안개가 깔려있지만 내 눈은 안개를 꿰뚫고,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었다.
거대한 배 한 척. 위에 도열된 수십여 기의 전투기. 분주하게 움직이는 수십 명의 사람들.
‘항모?’
그래, 배의 정체는 한미 연합 훈련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거대한 항모였다.
나는 또다시,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전투기야 그럴 수 있다 쳐도 항모를 운용할 만한 세력이 존재할 거라고는, 그것도 우리가 있는 앞바다에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생각하는 사이 전투기들에서 일제히 미사일이 발사됐다. 목적지는 도시. 번쩍이는 불빛과 함께 시내의 일부에 거대한 화염구가 일었다. 나는 평범한 미사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력이 미세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스킬이나 기프트로 강화된 미사일이 틀림없었다.
단순 위력만 놓고 보면, 지난번 내가 맞았던 현무 미사일과 비슷한 위력. 물론 그때보다야 내가 훨씬 더 강해지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보호할 여력이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재촉했다.
“서두르죠.”
“······”
무차별적으로 미사일을 날려대기 시작한다. 귀를 찌르는 폭발음. 강릉 시내는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기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이동하던 우리의 위로 전투기 한 기가 지나갔다.
다행히도 그는 우리를 봤는지, 직접적으로 미사일을 날리진 않고 우리를 지나쳐 편대와 합류했다. 아직 폭격이 끝나지 않았는지 또다시 바다에서 전투기들이 날아오기 시작한다.
강릉 시내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 생각인 듯 보였다. 나는 저 전투기들이, 제이드와 아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최대한 발걸음을 서둘러, 강릉시 인근을 벗어났고 전투기들도 쫓아오지는 않았다. 디아블로에 탑승한 채, 나는 S31을 들었다. 강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윤아.”
- 예,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함선과 교신, 가능하냐?”
- 갑자기 그게 무슨···
“직접 보는 게 빠르겠네.”
나는 기계 정령, 에코를 이용해 강태윤에게 영상을 전송했다. 당연하게도 항공모함이 담기진 않았지만 전투기 여러 기가 강릉시를 폭격하는 내용이 담긴 영상이었다.
- 이건 대체···
“아마도 미군이겠지?”
- 예, 제가 밀덕이라 좀 아는데··· 저 전투기 미군 전투기 맞습니다. 그리고 저 정도 전투기를 운용할 정도면, 형님 말씀대로 진짜 항공모함이라도 온 모양인데요? 가만있어 보자, 태평양을 돌아다니는 미국 항공모함이라면···
“온 모양이 아니라, 진짜로 왔다니까. 교신 가능할까?”
- 저쪽에서 위성 통신을 사용하다는 가정하에, 아주 불가능하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다만?”
- 관련 지식이 부족해서, 지금 당장은 불가능합니다. 차라리 외국 사이트에 글을 투고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래, 안 되면 할 수 없지. 외국 사이트라···”
외국 사이트에 글을 투고한다라··· 우리 한국인이 포털 사이트를 통해 서로 대화를 나눴던 것처럼, 다른 나라 사람들 역시 인터넷을 광장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있었다.
- 그건, 제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태윤아, 고맙다.”
나는 S31을 닫고, 품속에 집어넣었다.
예정치 못한 전투기의 등장에 강원도 변이체 토벌은 마무리 짓기로 했다. 다른 이들은 쉘터로 돌아갔고, 나만 강원도에 남았다. 아직 구출하지 못한 플레이어들의 존재를 염두에 둬서다.
“거, 살살 좀 하게.”
쇠사슬에 묶인 채 엄살을 부리는 노인. 내가 붙잡은 특수 변이체, 도플갱어였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꼴을 보면 아무리 봐도 변이체보다는 인간처럼 보인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에게 물었다.
“이름이 뭡니까?”
“동방예의지국 모르는가? 자네야말로 이름이···”
노인은 황급히 말을 고쳤다.
“하하, 내 이름은 장영하일세.”
“직업은?”
“보면 모르는가. 비록 넝마가 되긴 했지만, 내가 이래 봬도 사단장일세.”
“사단장?”
“그래, 뭐··· 그것도 다 옛말이지만 말일세. 그런데, 자네는 정말 이름도 안 밝힐 건가?”
“이진서입니다.”
“이진서?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배달부로 유명했습니다.”
“역시 모르겠군. 아, 살살 좀 하게.”
나는 쇠사슬을 묶인 노인을 칭칭 끌었다. 그는 방송국 옥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해보십시오.”
“뭘 말인가?”
“변이체들, 불러 모으는 거 말입니다.”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데.”
“그때 하지 않았습니까?”
“늙어서 내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네. 하지만 어떻게 하는지 정말 모르겠는걸.”
노인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 했는지, 정말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VVIP 상점에서 미스릴 장검 하나를 구매해 그의 목에 내밀었다.
그의 목에 닿은 미스릴 장검은 파츠츠거리며 스파크를 일으켰다. 미스릴은 부정한 존재와 상반되는 힘을 가졌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기겁하면서 나를 쳐다봤다.
“마, 말로 하게.”
“생각해내는 게 좋을 겁니다.”
“이러지 말게.”
나는 미스릴 장검에 조금씩 힘을 줬다. 솔직히 말하면 이 정도로 그가 죽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쇠사슬에 묶여있다곤 해도, 그는 명색이 특수 변이체였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그에겐 크나큰 위협이었을 것이다. 그의 전신이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건 바로 다음 순간.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목숨에 대한 위협이 ‘트리거’인 모양이다.
“나는 정말 인간이란 말일세.”
반은 변이체의 얼굴, 반은 인간의 얼굴을 한 채 그는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아직 완전히 변이체로 변하진 않은 모습이다. 그러나 그의 목에 났던 상처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영감님이 그런 꼴을 하고 인간이라고 주장해봐야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
그는 나를 노려봤다. 다음 순간, 그가 입을 벌렸다. 아···! 비명 소리와 함께 파장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변이체들이, 강원도 인근의 변이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성능은 확실하네.’
“이제 됐나? 이렇게 해야 속이 시원했나?”
“됐습니다.”
그는 토라진 듯 옥상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곧 메시지가 떠오른다.
[일식이 임박했습니다.]
해와 달이 겹쳐진다. 일식. 일식 기간 중에는 변이체의 능력치가 세 배로 상승한다. 물론 그에 걸맞게, 드랍하는 기프트 양 역시 세 배로 상승하기에 버닝 타임 이벤트라 부르곤 했었다.
하지만 떠오른 메시지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하급 변이체가 중급 변이체로 진화합니다.]
하급 변이체가, 중급 변이체로 진화했다. 온 도시에서 변이체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느릿느릿하던 움직임이 훨씬 더 민첩해졌다.
어둠에 잠긴 도시에서 오로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물경 수만에 달하는 중급 변이체들. 그 모습은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아포칼립스 풍경 그대로였다.
“저 수많은 변이체들이 달려오면 우리 다 죽는 거 아닌가? 어떻게 할 건가? 책임지게, 책임져!”
공포에 질린 채 한껏 떠들어대는 노인을 바라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같은 변이체면서, 무슨 책임을 집니까. 영감님 구하러 오는 거 같은데.”
“···웃기지 말게.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변이체가···”
수만에 달하는 중급 변이체. 그 숫자는 수만에 그치지 않고, 실시간으로 더 늘어나고 있었다. 물론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그에 대한 ‘합당한 대처’를 할 생각이었다.
[영령 빙의(L)를 사용합니다.]
[상급의 영령 ‘대마도사, 옐레나’를 불러옵니다.]
나타난 옐레나는 나를 보고, 노인을 한번 보더니 인상을 찡그린다.
- 그런 취향?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 취향은 존중할게.
“······”
나를 놀리던 그녀는 흥이 식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 이럴 때만 나를 부르지 말고, 평소에 좀 부르라고.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기는 매한가지였으므로.
[대마도사, 옐레나가 몸에 빙의됩니다.]
[마력에 따라 동화율이 설정됩니다.]
[마력에 따라 동화율이 설정됩니다.]
[마력 109를 확인했습니다.]
[현재 동화율 58%] [지속 시간 : 1시간] [재사용 대기시간 : 36시간]
‘마력 분신.’
곧 내 분신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성운의 가호.’
- 모든 스킬의 재사용 대기시간을 초기화합니다.
성운의 가호를 통해, 스킬의 재사용 대기시간을 초기화했다.
성운의 가호가 통하는 스킬의 범위에는 당연히 ‘마력 분신’ 역시 들어있었다. 즉, 마력 분신의 재사용 대기시간 역시 초기화됐다. 한 번 더, 마력 분신을 사용한다.
두 개의 마력 분신. 마치, 명령을 기다리듯 나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괴물이구만.”
“누가 누구에게 괴물이라는 겁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지상을 향해 미티어 스트라이크를 시전하기 시작했다. 이 춘천시에 플레이어가 하나도 없다는 건 미리 파악해뒀다. 따라서 거리낄 것 역시 없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미티어 스트라이크를 사용했다. 곧, 세 개의 운석이 신호탄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