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서문주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쉘터에 병원을 세우고 싶다고 말했고, 나는 흔쾌히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는 주상 복합 단지 옆에 있는 대형 병원 건물을 개조해, 병원을 세웠다.
병원 일은 그의 전 그룹원들 중 몇 명이 돕기로 했다. 다른 전 그룹원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분야의 업무에 배치됐다. 지나가는 말을 들어보니 금세 적응했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독사파는··· 바른 빛 선교회에서 재사회화 과정을 거치게 됐다. 바른 빛 선교회. 바른 마음 교회나 구원교처럼 직접 문제를 일으키는 집단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사이비 종교다.
그들의 신앙의 대상은 이진서, 다름 아닌 ‘나’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땐 어처구니가 없어서 정민혁에게 당장 없애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체념해가는 단계다.
- 맹목적인 신앙은 잘못된 건 맞지만, 이러한 세계에선 그 신앙이 마냥 잘못된 것만은 아닙니다. 그 신앙이 올바른 곳에 쓰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잘못된 게 맞는데, 잘못된 게 아니라는 그의 궤변에 설득당한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해서, 동작구에서 구출한 김선우라는 목사를 주축으로, 바른 빛 선교회는 유지됐다.
그런 광신도(전직)들에게 재사회화를 당한다니··· 나는 진심으로 독사파에 대한 명복을 빌어주었다.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정민혁, 진혜연, 김민수, 강순철, 김하나 등등 그룹을 대표하는 간부들이 모여 있다. 일주일마다 가지는 정기 회의였다.
나는 가운데 비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들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제일 먼저 화두를 꺼낸 건, 강순철이었다.
“전투를 원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위해, 미리 실전 경험을 쌓아둬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일리 있는 말이었다. 앞으로 나는 멀리 나가는 빈도가 늘어날 것이다. 어쩌면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향하게 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변이체의 숫자에는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쉘터를 비운 동안, 변이체가 쳐들어온다면 결국 그룹원들의 힘으로 막아내야 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미리 실전 경험을 쌓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대답을 한 건 강순철이 아닌, 정민혁이었다.
“그건 미리 설문 조사를 해뒀습니다.”
그는 내게 종이를 건넸고, 나는 그로부터 종이를 받아들었다. 직접적으로 변이체와 전투를 원한다고 작성한 그룹원의 비율은 33%. 숫자로 따지면 약 700명 정도에 달한다.
700명. 결코 적지 않은 숫자. 게다가 그들 대부분이 기프트로 신체를 강화하고, 버프 스킬로 떡칠한데다 음식 버프로 강화된 플레이어라는 걸 감안한다면···
제아무리 상급 변이체라 한들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뭐, ‘특수 변이체’라는 변수가 존재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경기도 근방의 변이체들은 대부분 형님이 소탕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인천까지 대부분의 변이체들을 소탕했다.”
물론 아직까지 남아있는 변이체들의 숫자도 적지 않을 테지만, 서울과 인천을 포함한 경기도 일대의 대부분의 변이체들은 소탕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만약 확정된다면 강원도 쪽으로 대규모 토벌을 가는 게 어떨까 합니다.”
“강원도?”
대답은 강순철로부터 들려왔다.
“진짜 실전을 경험하기엔 변이체가 적은 것보다는 많은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강원도의 플레이어들도 겸사겸사 구출할 겸.”
강태윤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때에 맞춰서 강원도에 있는 기지국을 가동해, 강원도 전체에 인터넷망을 연결할 생각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때, 김민수가 손을 들며 말했다.
“공방에서 제조한 전차도 실전 배치해보려 합니다. 아직 완성된 건 스무 대뿐이긴 하지만.”
스무 대의 전차. 아직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유일 등급 제조 스킬로 도배한 그가 직접 관여해 만든 만큼 평범한 전차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적어도 구원교에서 봤던 전차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겠지. 딱히 내가 반대할 이유도 없고, 전차의 성능도 시험해보고 싶었기에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다른 분들도 동의하십니까?”
“저는 찬성이에요.”
제일 먼저 김하나가 손을 들며 말했고,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만장일치로 강원도 변이체 원정이 결정지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정민혁에게 말했다.
“철저히 대비하자. 아마 나도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참여하긴 하겠지만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나쁠 건 없을 테니까.”
“예, 형님.”
더 할 말이 없다면, 이걸로 파(破)하려 그랬다. 그때, 진혜연이 손을 들었다.
“구성원들을 쓱 둘러봤는데 제 나이 또래거나, 저보다 나이 어린 애들도 적지 않더라고요. 그 애들을 교육하기 위한 학교를 만드는 건 어떨까요? 학교라는 명칭이 그러면 교육 기관으로···”
”학교? 국영수라도 배우자는 건가?”
박승기가 쓰게 웃으며 물었다. 그는 진혜연의 물음이 어린아이의 엉뚱한 생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진혜연은 고개를 젓고는 그를 또렷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아뇨, 이 세계에 걸맞은 교육을 받아야겠죠. 가령 총기를 다루는 법이라든가. 아니면 변이체를 효율적으로 처치하는 법이라든가. 무작정 실전을 먼저 겪게 하는 것보다는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교사는 누가 하고?”
“교사 경력이 있는 분이 하시면 좋겠지만··· 그건 의원님이 하셔도 되고···”
그는 진혜연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껄껄 웃었다.
“흠흠, 뭐 나야 할 일 없는 늙은이니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런데 의원님도 총 쏘는 법 아나? 미필 아니셨나?”
“···누구보고 미필이라는 거야···!”
끼어든 김하나에게 역정을 내던 박승기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거나 혜연이 생각도 나쁘지 않은 생각인 것 같네만···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까 좋은 생각인 것 같기도 해.”
가만히 있던 정민혁도 의견을 냈다.
“혜연이 생각을 확장해서··· 어린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설이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세계에 관한 교육이 필요한 건 어린아이뿐만이 아닐 테니까요.”
침묵하고 있던 서문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입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는 법이죠.”
나는 문득 아공간 내에 잠들어 있는 ‘갈락시아의 도서관’을 떠올렸다. 교육 기관 옆에 도서관을 세우면 딱일 것 같다. 학습을 통해서 스킬을 얻는다는 점도 어울리고.
아무래도, 여덟 번째 스킬 슬롯을 근시일 내에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은 기프트가 많이 없지만, 어차피 시간문제일 뿐이다. 앞으로 3일 뒤, 하급 변이체들이 중급 변이체로 모두 변한다면 기프트에 상당히 여유가 생길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박승기에게 말했다.
“의원님이 맡아서 추진해주세요.”
생각을 낸 건 진혜연이지만, 무언가를 추진하는 데 있어서는 박승기를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괜히 5선 국회의원이 아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이걸로 이번 정기 회의는 마치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걸로 두 개의 그룹 과제가 생겼다. 하나는 강원도 원정, 나머지 하나는 교육 기관 설립. 모두 다 근시일 내에 이루어질, 이루어져야 할 것들이다.
***
제이드와 그의 동료들은 변이체들을 처치하며, 계속 동쪽으로 이동했다. 경기도를 벗어나고 강원도에 들어서자 변이체의 수는 급감했고, 자연스럽게 그들도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그들은 인근의 야산에 있는 민가에 묵게 됐다. 사실 민가라고 해봐야, 눈이 가득 쌓여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폐가에 지나지 않았지만.
제이드는 바리케이드를 구매해 원두막의 주위를 단단히 둘러싼 뒤, 폐가로 돌아왔다. 동료들은 폐가 안에서 사방을 경계한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변이체는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변이체 새끼들이라 하더라도 이런 야산까지 들어오진 못하겠지. 다행이네.”
“그런데, 제이드. 정말 우리를 구출하러 오는 게 맞을까?”
창을 내려놓은 제이드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배낭에서 육포를 꺼내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내 아버지, 대리어스는 허언을 하는 성격은 아니다.”
“이런 세상에서 뭘 어떻게 구하러 온다는 건지.”
동료들의 얼굴에는 불신이 가득하다. 그가 자세한 설명을 해준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 제이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안 믿기면 따라오지 말든가.”
그의 동료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믿긴 하는데··· 제이드, 미국이랑 한국이랑 거리가 수천 킬로미터는 되잖아? 거기서 우리를 어떻게 구하러 올 방법이··· 있긴 한 걸까?”
“있다.”
사실 제이드도 직접적으로 대리어스에게 ‘방법’에 대해 물어본 적은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저 동해로 나와서 앞으로 사흘만 기다리라고 했을 뿐이니까.
“그 방법이 뭔데?”
다음 순간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에게 질문한 동료가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그가 아닌, 바리케이드로 향해 있었다.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뭐야?”
“나도 모른다.”
짤막하게 말하고, 창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바리케이드를 향해 달렸다. 괴물 같은 도약력으로 바리케이드 위에 올라선 그는 무언가를 향해 창을 겨눴다.
이내,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는 그가 기대했던 것처럼, 변이체가 아니었다.
무언가의 정체는 개구리 군복을 걸친 노인이었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일렀다. 그는 상급 변이체와 전투를 해본 적이 있었고, 그들이 기상천외하게 진화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인간의 형태를 한 변이체라 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는 것이다.
“사람?”
여전히 창을 노인의 목을 향해 겨눈 채 그가 물었다.
“당연히 사람이네. 딱 보면 모르겠는가? 나 좀 살려주게.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네···”
“······”
잠시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던 그지만, 그는 이내 노인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우리 사정도 어려워서.”
불쌍해 보인다고 해서 남을 돕기에는 제 코가 석 자였다. 사실 남을 돕는다는 것도 여유가 있을 때의 이야기고, 그에게, 그들에게 여유란 없었다.
“······”
노인의 표정은 절망으로 일그러졌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왔던 것처럼 숲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제이드는 딱한 얼굴을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아래로 내려왔다.
“뭐야?”
잔뜩 경계 어린 동료들의 물음에 그는 담담히 거짓말을 읊었다. 진실을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들짐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