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남은 50만 기프트는 장비에 투자하기로 했다. 어차피 스킬 슬롯이 없어, 기껏 얻은 전설 등급 스킬도 습득하지 못하고 있는 판국인데, 스킬에 더 투자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장비 목록을 천천히 둘러봤다. 유일 등급이나, 전설 등급보다는, 신화 등급 장비를 위주로. 전설 등급은 거치는 단계라 생각하고, 최종 장비를 맞출 생각이었다.
‘물론 장비 하나 맞추니 끝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지만 말이야.’
[500,000기프트를 지불해 대멸겁의 지팡이(G)를 구매했습니다.]
신화 등급 장비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비쌌다. 무기류라고는 하지만 하나에 50만 기프트. 유일 등급 장비가 수백 기프트를 호가했던 것을 생각하면 수백, 수천 배에 달하는 양이다.
그러나 과연 신화 등급인 만큼, 그 옵션은 여태껏 봐왔던 장비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대멸겁의 지팡이(G)>
종류 : 무기
등급 : 신화(God)
내구 : 666/666
옵션 : 착용 시 마법 속성 혼돈(Chaos)으로 변경, 마력 +15.0, 마력 소모 -70%, 마법 위력 +75%, 마법 증폭 +75%
고작 지팡이 하나에 붙은 옵션이, 유일 등급 장비 세트를 가볍게 상회하는 수준. 과연 신화 등급 장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벼락이라도 맞은 양 검게 그을린 지팡이를 가볍게 들어 올린다.
그와 함께 떠오르는 메시지들.
[마력 능력치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근원을 탐구하는 자’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근원을 탐구하는 자>
등급 : 유일(Unique)
조건 : 마력 능력치가 100에 도달할 것.
보상 : 기프트 채굴량 +20%
[‘신의 무구’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신의 무구>
등급 : 유일(Unique)
조건 : 최초로 신화 장비 착용.
보상 : 기프트 채굴량 +25%
업적 두 개로, 단숨에 채굴량이 50%가 늘어났다.
[마법 속성이 혼돈으로 변경됐습니다.]
‘마법 속성을 혼돈으로 변경시켜준다?’
단순히 설명만 봐서는, 쉽게 감이 잡히지 않는다. 골똘히 생각하던 나는 이내 간단한 결론을 내렸다. 직접 시험해보면 된다. 새로운 스킬에, 새로운 장비, 기대감으로 심장이 뛴다.
나는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여전히 눈은 멈추지 않았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눈을 치우고 있었다. 그때, 한쪽에서 김민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강태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형님, 나가십니까?”
“그래.”
“저번에 말씀드렸던 화력 발전소 말입니다. 형님의 도움 덕에, 잘 해결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강태윤이 내게 부탁했던 것이 생각났다. 서울 시내에 폐쇄된 화력 발전소가 있고, 다시 가동한다면 서울 시내에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고.
워낙 할 일이 많아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뭐, 서울의 변이체들을 소탕했으니, 간접적으로 그의 부탁을 들어준 셈이었다. 생각을 하는 사이, 그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연료는 서울을 샅샅이 뒤져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효율은 상점에서, 직접 전기를 구매하는 것보다 350% 뛰어난 수준입니다.”
폐쇄된 화력 발전소를 재가동하는 것. 아무리 기프트의 도움을 받는다지만,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진심으로 그에게 감탄하며, 칭찬했다.
“대단하다.”
그는 코를 가볍게 매만졌다.
“저 서울대 수석 출신입니다.”
새삼스럽게 자기 PR까지 덧붙여서.
나는 문득 궁금한 점을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이제 인터넷망 연결도 가능한 건가?”
“형님도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저 전봇대로 연결돼있고, 그 시설들은 아직도 건재할 겁니다. 잘하면 망 연결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에.”
전국에 전기가 흐른다면, 인터넷망 연결이 된다면 플레이어를 수색하는 데 애를 먹을 필요가 없다. 인터넷으로 플레이어의 위치를 특정한 후, 찾아가면 될 테니까.
“그래, 혹시나 예산 필요하면 민혁이한테 말하고.”
“아뇨, 충분합니다. 이제는 형님의 은혜에 보답할 차례이지요. 형님, 오늘은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가냐? 음··· 아직 안 정하긴 했는데, 아마···”
“아마?”
“인천 쪽이 아닐까 싶다. 가장 큰 대도시이기도 하고. 오늘은 무언가··· 제대로 변이체를 사냥하고 싶어서 말이야.”
강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천에도 화력 발전소가 있습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거기는 멀쩡하게 남겨주셨으면···”
“걱정은, 내가 설마 도시를 다 파괴하기라도 할까 봐? 그럴 생각은 없으니까.”
한, 반만 파괴할까?
“예, 형님.”
가만히 있던 김민수도 내게 다가왔다.
“구원교에서 노획한 전차 개조에 성공했네. 탑승자의 마력에 따라 성능이 달라지니까, 어지간한 상급 변이체조차 상대가 가능해질 거야. 어쩌면 최상급 변이체도···”
말을 흐리던 그는 재차 입을 열었다.
“솔직히 그때 봤던 괴물 같은 모습을 생각하면 의문이긴 하지만 말일세.”
그는 바른 마음 교회에서 봤던 루나(당시에는 최상급 변이체)를 떠올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확실히 그 당시에 최상급 변이체는 그들이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시간이 거의 한 달 가까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우리 그룹의 생존자들도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요리로 인한 버프, 스킬로 인한 버프를 모두 받는다면, 정민혁만 하더라도 최상급 변이체 하나 정도는 혼자서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
거기에 ‘효율적인’ 현대식 무기까지 더해진다면, 최상급 변이체를 사냥하는 것도 아주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최상급 변이체가 강하다곤 해도, 지금 우리 쉘터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최상급 변이체?
떼거리로 몰려온다면 모를까, 고작 몇 개체로는 센트리 건들을 돌파하는 것부터 쉽지 않을 것이다. 설령 내가 없다 하더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란 것이 내 생각이었다.
“양산도 가능합니까?”
“아직 완전히 시설이 갖춰지지 않아서, 양산은 무리지만··· 재료가 충분하다는 가정하에, 하루에 열 대 정도는 무리 없이 찍어낼 수 있을 거네. 물론 인력만 확보된다면 그 배 이상도 찍어낼 수 있겠지만 말일세.”
“믿을 만한 생존자들을 추려주시기 바랍니다. 이왕이면 김민수 씨 같은 공돌이들로.”
“추가로 말인가.”
“예, 안 그래도 카드깡으로 뽑은 제작 스킬도 좀 있어서.”
내 말에 김민수의 표정이 환해졌다.
***
인천의 5성급 호텔 옥상. 인천 시내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하얗게 눈으로 뒤덮인 도시, 그리고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 물론, 자세히 바라보면 아름다운 풍경은 잔혹하게 바뀐다.
한때 이 도시에 거주했던 인간들은 모조리 변이체로 변해버렸고, 남은 인간이라고는 오로지 이 도시에 숨어있을 ‘극소수의’ 인간들이 전부다. 감상에 잠겨있던 나는 가볍게 점프했다.
점차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을, 일식(日蝕) 현상의 전조를 느꼈기 때문이다.
바닥에 착지한 후, 중얼거린다.
‘영령 빙의.’
[영령 빙의(L)를 사용합니다.]
마도사, 벨루가를 소환하는 편이 효율적일 테지만, 이번 기회에 새로운 영령을 불러볼 생각이었다.
[상급의 영령 ‘대마도사, 옐레나’를 불러옵니다.]
‘떠돌이 영령’이 아닌 상급의 영령이 소환됐다.
들었던 이름이다. 대마도사, 옐레나. 내가 지금 걸치고 있는 대마도사 옐레나 세트에 붙어있는 수식어 아닌가. 곧 나와 비슷한 복장을 한 금발의 여자가 내 앞으로 걸어온다.
- 내 후계자?
“······”
- 아니, 그럴 리는 없겠고. 하지만 그 지팡이는···
그녀는 내가 착용한 대멸겁의 지팡이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 더 묻고 싶지만, 시간이 없네. 네 이름은?
“이진서입니다.”
- 나와 계약할 거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대마도사, 옐레나.
이 영령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대단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떠돌이 영령이 아닌, ‘상급’의 영령이라는 걸 보면 마도사, 벨루가보다 더 대단한 존재일지도 모르지.
아니, 대단한 존재일 것이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마력이 100을 넘어서며, 내 기감은 전에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격, 영혼의 크기.
그녀는 마치 거대한 산을 보는 것 같았다. 생전에는 지금의 나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괴물이었다는 소리.
- 계약은 성립됐어.
[대마도사, 옐레나가 몸에 빙의됩니다.]
[마력에 따라 동화율이 설정됩니다.]
[마력 102를 확인했습니다.]
[현재 동화율 54%] [지속 시간 : 1시간] [재사용 대기시간 : 36시간]
[영령의 능력치와 스킬의 일부를 불러옵니다.]
[마력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5.000 상승했습니다.]
[마력 요새(U)를 일시적으로 습득했습니다.]
[마력 분신(L)을 일시적으로 습득했습니다.]
‘마력 102로도 고작 동화율이 54%라니···’
그 정도로, 그녀가 대단한 영령이라는 방증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런 그녀의 힘을 얻었다. 비록 동화율이 54%라 그런지, 스킬을 두 개밖에 습득하지 못하긴 했지만.
마력 능력치를 일시적으로 5나 얻었으니, 오히려 이득이라고 봐야 했다.
<마력 요새>
종류 : 패시브(Passive)
등급 : 유일(Unique)
설명 : 온몸에 상시 강력한 마력의 갑주를 두른다. 마력 갑주는 사용자의 마력에 비례한 내구도와 방어력, 재생력을 얻는다. 마력 갑주가 파괴될 경우, 다시 재생되기 위해서는 24시간이 걸린다.
앱솔루트 배리어와 같은 방어 스킬이지만, 마력 갑주는 상시 방어 스킬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공격 마법이 아닌, 방어 마법이라는 점에서 조금 아쉽긴 하지만···
뭐, 그래도 나쁘지 않다. 앱솔루트 배리어까지 더해진다면, 적어도 영령 빙의 중에 미사일 여러 발이 정통으로 꽂힌다 하더라도 죽을 일은 없으리라.
‘뭐, 미사일이 날아올 확률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나는 이번에는 마력 분신으로 눈길을 돌렸다. 무려 전설 등급 스킬. 마력 분신.
<마력 분신>
종류 : 액티브(Active)
등급 : 전설(Legendary)
설명 : 마력을 소모해 분신을 하나 소환한다. 소환된 분신은 사용자의 스킬을 똑같이 따라 한다. 마법의 위력은 본체가 사용한 스킬의 위력, 범위가 최대 75%로 적용된다. 마력을 모두 소모하면 분신은 사라진다. (재사용 대기시간 : 24시간)
‘마법을 똑같이 따라 한다라···’
나는 마력 분신을 사용했다. 곧, 마력이 빨려들어 가는 느낌과 함께 내 모습을 본뜬 분신이 생성된다. 물끄러미 분신을 바라보던 나는 지면을 향해 마법, 미티어 스트라이크를 사용했다.
이미 일식이 시작된 후라 완전히 어두워진 세상, 초록색으로 빛나는 운석이 지면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운석은 하나가 아닌, 두 개다.